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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귀한 만남 / 김후란

부흐고비 2020. 3. 3. 08:42

귀한 만남 / 김후란


내 책장 한쪽에는 조그만 조개껍질, 깨어진 기왓장 조각, 무의가 새겨진 돌 등이 있다. 모두 나의 추억이 담긴 기념품이다. 크고 작은 인연으로 나와 만나진 어느 날의 귀한 벗들이다.

인생이란 그런 것이다. 살아오는 동안에 만나진 무수한 인연을 징검다리 뛰어넘듯 건너뛰면서 마음 한 구석에 그 인연을 소중히 간직하고 더러는 잊어버려 가며 사는 하나의 과정이라 할 수 있다.

바닷가를 거닐다가 눈에 띈 영롱한 조개껍질을 집어든다. 다시 보면 발길에 채이도록 흔한 조개껍질에 불과할 수도 있으나, 그 중에서 유독 내 눈을 끌어당긴 한 순간의 인연이 귀해서 집에까지 가져온 것이다.

낡은 절을 찾아갔다가 뒤뜰에 뒹구는 기왓장 조각을 발견하고 옛스런 무의에서 그 옛날 숨결을 느낀다. 몇 백 년 간 절 지붕에 얹혀 있다가 새 기와에 밀려 버림받은 기왓장, 그 한 조각에서 기와 굽던 이와 나의 만남이 이뤄진 사실도 생각하면 신기한 것이다.

한 번은 친구와 더불어 햇볕이 따가운 강가를 거닐었다. 가느다란 강물은 맑았으나 모래밭을 끼고 도는 게 아니라 빽빽하게 들어찬 돌밭을 안고 흘렀다.

우리는 돌더미 속에 주저앉아 땀을 닦았다. 사방에 널려 있는 큰 돌 작은 돌이 어지러웠고 우리를 압도했다. 그런데 우연히, 참으로 우연히 한 개의 돌이 나를 올려다보고 있는 걸 보았다.

손바닥만 하고 납작하게 생긴 돌에 농무(農舞)를 추고 있는 사람 모습이 박혀 있었다. 나는 그 돌을 집었다.

들여다볼수록 무늬는 살아서 춤을 춘다. 농악소리가 울리고 상모 끝에 길게 늘어진 끈이 빙글빙글 돈다. 이 돌이야 전문적인 수석 수집가에겐 어떻게 인정을 받을지 모르지만 무늬는 일품이다.

나는 이 한 개의 돌을, 아니 그 속에 살고 있는 농무 추는 사람과의 만남의 위해서 나도 모르게 돌밭 강가까지 끌려 온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생각하면 살아가는 데 있어서 만남이 갖는 의미와 무게는 말할 수 없이 크고 수중하기만 하다. 그 중에도 사람과 사람과의 만남은 자신의 구체적인 삶에 직접 영향을 미치는 것이어서 더구나 그 비중은 크고도 무겁다.

돌아다보면 나의 경우도 잊을 수 없는 몇몇 사람과의 뜻깊은 만남이 있었다. 그들은 저마다 다른 소리로 부딪쳐 왔다. 나 또한 그들에게 크든 작든 어떤 영향을 미쳤을 것임에 틀림없을 것이다.

인간 생활이란 그렇게 서로 영향하는 사람끼리 성장의 계기가 되어 주고 혹은 상처를 입히면서 살기 마련인 것 같다.

친구가 그랬다. 사랑하는 마음으로 한때 혹은 오래오래 이어진 사람과의 만남이 그랬다. 스승이 그랬다. 선배가 그랬고 후배가 그랬다. 그뿐인가. 읽고 싶었던 책을 제대로 찾아 읽었을 때, 한 권의 책을 통한 저자와 나와의 만남은 깊은 정신적 공감자로서의 기쁨을 안겨 준다.

그러나 사람과 사람 사이의 만남이란 반드시 기쁨으로만 연결되지 않는 게 인간관계임을 뼈저리게 느낄 때가 있다.

'만남'에는 또 언젠가 '헤어짐'이 있기 때문이다. 약속과 파이는 깨어지기 위해서 만들어진다는 속담이 있지만 만남이야 말로 헤어지기 위해서 있었던 것처럼 반드시 이별의 쓴잔을 마시게 한다. 그렇게 만나고 헤어지고 하면서 단련되어가는 게 인간사이다. 마치 불에 달군 쇠가 망치로 두드려 맞으면서 더욱 야무진 쇠붙이 물건이 되어지듯이.

그렇더라도 만남은 매번 새롭고 매번 귀하다.

잠시 헤어질 때의 아쉬움도 크건만, 사소한 오해나 불가피한 일로 아주 결별해야 하는 쓰라린 아픔도 있다. 결코 그런 일은 없으리라고 여겼던 사이에도 인간의 얄팍한 마음은 야박하게 돌아서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런 고통을 또다시 겪는 한이 있더라도 처음 만나 두 마음이 하나로 얽히는 순간의 순수한 기쁨을 어찌 거부할 것인가. 운명의 잔을 들어 다소곳이 마실 수밖에 없다.

허나 옳지 않은 만남, 만나지 않았어야 하는 만남이라면 깨끗이 미련 없이 던져 버리는 용기가 필요하다. 이성의 힘으로 무모한 감정을 누르고 지배해야 하는 것도 이런 때일 것이다.

친구를 잘못 만나 자기 자신이 진탕으로 끌려가는 수도 있다. 가난 때문에 타락하는 경우보다는 나쁜 교우로 인해 일생을 잘못된 길에서 헤매는 경우가 더 많다는 사실은 인간관계의 무서운 인연을 말해 준다.

만나지 않았어야 하는 만남을 거부하고 그 운명의 잔을 쏟아 버리는 용기야말로 인간이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고통 중에도 가장 잔혹하고 살점을 도려내는 아픔이긴 하지만 살아가는 데 있어서 그것은 어쩔 수 없는 시련이라 할 것이다.

본래의 자기 자신을 잃지 않고 오히려 한층 아람차게 키워가기 위해서 우리는 아름답고 유익한 만남을 기대해 가고 싶다.

가슴과 가슴이, 영혼과 영혼이 뜨겁게 얽혀드는 신선한 자극을 체험해야 한다.

외롭고 두렵고 힘겨운 인생 도정을 덜 외롭게, 덜 두렵게, 덜 힘겹게 살아가게 하는 아름다운 만남이어야 한다. 해질 무렵 하나 둘 불이 켜지는 가로등처럼 우리의 인생길을 서로가 밝혀 주는 불빛이 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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