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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늙어가는 데 관하여 / 이양하

부흐고비 2020. 3. 4. 12:05

늙어가는 데 관하여 / 이양하1


아직 하늘이 아름답고 산이 아름답고 나무가 아름답다. 아침 산책을 나서면 으레 따라 나서서 우선 죽어라 하고 언덕길을 달리는 우리 꼬마의 날씬한 몸매가 아름답고, 일찍부터 모여서 장난치는 애들이 귀엽고, 양지바른 곳에 솜병아리처럼 둘러앉아 소꼽장난하는 어린애들이 귀엽다. 학교에 오가는 길, 가다 장기를 한두 번씩 두는 늙은 영감님의 웃는 얼굴이 반갑고, 학교에서 만나 서로 안부를 묻고 집안 이야기, 학교 이야기, 세상 이야기를 주고받는 친구들이 아직 무척 반갑다. 그리고 저녁 고요한 등불 아래 자다 신경질을 부리고 하는 외에는 큰 흠이 없는 아내와 마주 앉아 책을 뒤적거리는 데도 아직 싫증이 나지 않는다.

지금은 갠 10월 아침, 조반을 먹고 책상을 대하고 앉아 있는 이 순간만 하더라도 사위(四圍)의 모든 것을 받아들이고 누리고 즐기는 데 있어서 젊었을 때와 크게 다른 것을 알지 못하겠다. 멀리 바라보이는 인왕산 너머로 끝없는 높고 푸른 하늘, 담 너머 보이는 이웃집 감나무에 대롱대롱 달린 똥그란 감, 지난번 흰불나방의 잠식으로 한때 죽은 듯 하던 쫑나무에서 새로 돋아나는 때 아닌 신록을 보여주는 잎새, 가는 바람을 받아 지나간 여름날의 영화를 회상하는 것처럼 너울거리고 있는 아카시아, 방금 아침 햇볕 아래 유난히 반짝이는 솔잎, 그리고 이 솔잎이 뜰에 또렷이 던지는 아삭아삭한 그림자, 그리고 뜰 한 구석에 빨갛게 핀 한 송이 월계….

이 모든 것은 이 아침의 신선하듯이 신선하게 느껴지고, 두부 장수의 종소리, 엿장수의 가위 소리, 길모퉁이서 떠드는 어린애들 소리, 학교운동장에서 들려오는 호각소리, 아우성 소리, 또 그 너머로 들려오는 전차, 자동차의 우르렁거리는 소리는 어린 시절의 축제일처럼 가슴을 뿌듯하게 하고 설레이게까지 한다. 그리고 오오, 방금 담배와 성냥을 갖다 놓고 간 우리 정례(貞禮)의 붉은 손과, 입가의 안개처럼 뽀얀 솜털의 아름다움이여! 생각이 오늘 할 일, 이제부터 해야 할 일에 미쳐도 모든 것은 이제부터 해야겠다고 생각하는 데 있어서 젊었을 때와 조금도 다름이 없다. 그리고 매일 접촉하는 친구들을 생각하더라도 그 수가 엉성하여 호젓함을 느끼기에는 아직 거리가 멀다. 같이 새 잡이 하고 동막이하던 어렸을 때 동무들은 대개 이북에 있고 또 많이 죽었다. 그리고 젊어서 얻은 친구들 중에도 이미 귀적(鬼籍)에 든 친구가 있고, 오다가다 뜻하지 않은 일로 서로 멀어진 친구도 적지 않다. 그러나 이 즈음 생일이 멀지 않아 몇몇 친구를 불러볼까 하여 손꼽아 보니 열 손가락에 내리지 않아 이들을 맞아들일 내 집이 비좁을 지경이다.

거울을 들여다보아도 뚜렷이 늙은 것을 보지 못하겠다. 이마에 굵은 주름이 서넛 보이고 작금 급작스레 는 흰 머리카락이 눈에 띈다. 그러나 이마의 주름살로 말하면 새파랗게 젊어서부터 내 주름살보다 깊은 주름살을 갖고 있던 친구를 알고 있고, 나 자신 젊었을 때에도 자고 일어난 때 같은 때 주름살이 지어지고 한 것을 기억한다. 그리고 흰 마리로 말하면 많이 유전(遺傳)에 달리는 것으로서 2,30대의 청년 가운데도 반백이 된 사람이 있는 것으로 보아 반드시 늙었다는 움직일 수 없는 증거가 되는 것은 아니다. 나는 아직 건전하여 나의 오장육부는 그 기능을 조금도 상실치 않았다. 그 증거로는 초로(初老)에 으레 엄습한다는 요통이니 견비통이니-하기는 이것은 사실인 모양이어서 내 아내는 요즘 견비통으로 애먹고 있다-하는 것을 겪어 본 일이 없다. 아침마다 낙산을 올라가나 치받이 길에 숨찬 줄을 모르겠고, 가다 달음박질을 해보고 하여도 젊었을 때에 비하여 유달리 고통스러운 것을 알지 못하겠다. 여름마다 즐기는 수영은 지난여름에도 즐길 수 있었고 이번 가을에는 서울에 수십 년을 살면서도 아직 올라가 본 일이 없는 백운대에 올라가볼 계획을 하고 있다.

“이 무슨 구차스런 변명이요 구구스런 궤변인고. 고희(古稀)를 산다 하여도 이제 20년을 살지 못할 몸이” 하는 속삭임을 듣는다. 그러나 죽음으로 또 말하면 그 앞에는 “남달리 약한 사람도 없고 남달리 내일(來日)을 자신할 수 있는 사람도 없다.”는 세네카의 말과 같이 노소(老少)가 없는 것이다. 한두 살에 죽는 어린애가 있고, 14,5세의 방년(芳年)에 죽는 소년이 있고, 3,40세에 죽는 장년이 있어, 죽음과의 거리를 갖고 노소를 말하는 절대적 기준을 삼을 수는 없는 일이다.

사람들은 흔히 심리적 영령과 생리적 연령을 말하고, 심리적 연령의 개인차를 말한다. 그러나 자기의 심리적 연령이 생리적 연령보다 젊다고 생각지 않는 사람은 하나도 없는 것으로 나는 생각한다. 우리는 누구나 다 가슴속에는 구언(久遠)의 청춘을 갖고 언제까지나 젊다는 착각 또는 환각 속에 살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한다. 그리고 늙음이란 그야말로 도둑고양이 걸음으로 살금살금 다가드는 것이어서 당자의 주관으로서는 이것을 좀체 눈치채게 되어 있지 않은 덕이 아닌가 한다. 그리고 다른 사람과의 대조 또는 다른 사람 눈에 비치는 자기의 모습으로 비로소 놀람을 갖고 자기가 어느 정도 늙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으로 생각된다.

요즘 동네에 나서면 어린애들이 “할아버지 어디 가세요” 하는 인사를 하고, 가게에 들러 담배를 사면 흔히 “할아버지 잔돈 없어요?”, “할아버지 거스름돈 받아 가지고 가세요” 하는 말을 흔히 듣는다. 인사성 있는 사람의 호의의 말이다. 처음 이 할아버지란 말을 들었을 때는 가위 한 충격이랄 것을 느꼈고, 요즘도 들어서 그다지 유쾌치 못하게 생각하고 있다. 아침 산보 오가는 길에 내가 산에서 체조를 한다고 해서 ‘재주’ ‘재주’하고 부르는 애들이 버릇없는 놈들일는지 모르나 도리어 귀엽고, 이 ‘재주’라는 말은 아침 내내 기뿐 여운을 남기는 수가 있다. 나는 근자에 나보다도 몇 해 젊은 친구가 버스 안에서 차장애가 할아버지라고 불렀다고 “이놈 뭐야” 하고 좌중사람들이 다 눈이 휘둥그래지게 호령하였다는 말을 들은 일이 있다. 족히 있을 수 있는 일이다. 이것이 지나친 망발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찻집이나 요릿집에 갔을 때 젊은 아가씨한테서 아저씨도 아니고 할아버지라고 불릴 때 느끼는 당자의 환멸을 생각해 보라. 그러나 이 어린애들이나 젊은이들의 할아버지라는 말은 우리가 늙었다는 것을 엄숙히 선언하는 말로서, 우리로서는 어쩔 수 없는 운명의 말이라고도 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운명의 말은 다만 할아버지란 말 가운데 들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제 어떤 회합에 가더라도 혹은 앞, 혹은 뒤에 자리가 편하고 그 회에서 듣고 보기 편한 자리에 앉게 된 것을 기뻐하고 장유유서(長幼有序)의 미풍이 아직 남아 있는 것을 다행으로 생각하나, 한편 나의 나이를 의식하지 않을 수 없다. 또 전차나 버스를 타면 반드시 일어서서 자리를 사양하는 제복의 학생들을 보게 되는데 이것이 우리학교 학생일 경우에는 당연한 권리나 행사하듯이 천연스레 앉을 수 있으나, 우리 학생이 아닌 것이 분명한 앳된 어린 여학생일 경우에는 그 뜻이 고맙게 생각되고 어떤 학교 학생인가 하고 교표를 처다 보게 되면서도 역시 내 이제 늙은 사람이구나 하는 것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신춘세배 같은 때 오래간만에 찾아오는 집안 애들이나 친구의 자녀가 몰라보게 큰 것을 보고 새삼스레 우리가 늙어간다는 것을 느끼게 되는 것은 우리 노경(老境)에 든 사람의 누구나 다 경험하는 바이다. 바로 일전의 일이다. 아침 일찍이 매일 산보 가는 앞산에 올라가고 있었는데 이날은 어떤 낯선 백발노인이 뒤따라오고 있었다. 허술한 레인코트에 기다란 지팡이를 짚고 찬찬히 걸어 올라오는 것이었는데, 산마루에 올라서자 한 번 몸을 길게 펴고 먼 산을 바라보는 모습이 언덕길이 상당히 고됐던 것이 분명하였다. 그런데 백발 아래 주름살진 얼굴을 보니 어딘가 몹시 낯익은 데가 있었다. 그 노인도 한번 나를 보더니 낯익은지 유심히 보고 또 보는 것이었다. 나도 산을 돌려보는 틈틈이 다시 보고 하는 중에, 문득 흰 머리가 검어지고 얼굴의 주름이 걷히며 30여 년 전 일본 고등학교 다닐 때 길 건너 대학에 다니던 젊은 사각보(四角帽)의 젊은 얼굴이 나타났다. 나는 놀라움 가운데도 머뭇머뭇하면서 “아, 전형(田兄) 아니시오!”하고 물었다. “아아, 역시 이형이구려, 나 전이오” 하는 대답이 떨어지자 우리는 동시에 고요한 아침 분위기에 어울리지 않게 웃음을 터뜨렸다. 30여 년 만에 처음 만나 희한하고 반갑기도 하지만 서로 알아보지 못할 정도로 늙었다는 것을 웃는 웃음이었다.

공자께서는 “40에 불혹(不惑)이라” 하셨고, 조셉 콘래드는 “인생 40이 되면 황망한 바다를 항해하던 선원 앞에 항구가 가까워지는 데 따라 멀리 나타나는 지평선같이 앞날이 보이는 것”이라 하였다. 그리고 인생은 40부터 라는 것은 흔히들 하는 말이고 미국 어떤 작가에게는 바로<인생은 40부터 시작된다>는 제목의 저서가 있었다고 기억된다. 모두 40이란 것이 인생에 있어서 한 휙기적 연령이 된다는 것을 말하는 것으로 생각하여 큰 틀림이 없을 것이다. 노쇠(老衰)가 시작되는 것으로 말하면 내 경험 같아서는 서른다섯으로 보는 것이 바르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여기에 관해서는 같은 의견을 가진 사람으로 쇼펜하우어 같은 유명한 관찰자를 내세우라면 세울 수 도 있다 그러나 이것은 사소한 개인차에 속하는 문제요, 인생 40에 이르러 인생에 있어서의 우리의 전망 내지 경지에 뚜렷한 전환(轉換)이 온다는 것은 만인에 공통한 사실로 보아 무방하다고 생각한다.

40이 되면 우리는 우선 우리 생각가운데 회억(回憶)이 길고 기대(期待)가 짧은 것을 발견한다. 지나온 젊은 날은 콘래드의 선원이 항해해온 망망한 바다처럼 아득해 보이고, 앞날은 그가 앞에 바라보는 수평선처럼 금이 그어진다. 그리고 가는 시간, 세월의 속도가 아주 다르다. 40을 넘어서고 50을 넘어서면 세월 가는 것이 어떻게도 빠른지, 젊어서는 가는 세월이 전혀 인식되지 않고 죽음이 아주 안중에 없다 하여 무방할 것이다. 하루가 햇살 퍼지는 아침 열 시, 열한 시경에 있어 길고, 네 시, 다섯 시쯤 되어 해가 기울 무렵에 짧고, 또 한 통의 담배가 3, 4분(分) 먹을 때까지는 별호 줄어드는 것을 알지 못하나 6, 7, 8분 먹고 나서는 급작스레 줄어지는 데도 비할까. 지금도 17,8세 때를 회고하면 그 일양년은 50을 지나 보낸 7,8년보다도 더 길어 보인다. 이것은 아마 40, 50이 되어 갖는 경험은 반복에 불과한 것이라 모두가 그것이 그것인데 반하여 어렸을 때는 경험하는 모든 것이 새롭고 신기하고 신선하여 결국 많은 경험을 갖게 되는 탓이고 또 하나는 젊음이 깆는 정열과 의욕이 우리를 짙은 안개 속에 몰아넣어 모든 것을 제대로 보지 못하게 하는 나머지, 가는 시간에 대하여서도 환각을 갖게 하는 마약의 작용을 하는 탓이 아닌가 한다.

40이 되면 또 우리의 궁둥이가 무거워지기 시작한다. 우리는 밖에 나가는 것이 점점 귀찮아지고 우두커니 앉아 있는 것이 그다지 고통이 되지 아니한다. “혼자 앉아 있을 줄 알아야 한다”는 엘리엇의 가르침을 우리는 힘 안들이고 실천하게 되는 셈이다. 이것을 반시(半時) 가만히 앉아 있지 못하여 “이애, 좀 가만 앉았거라” 라는 말이 귀 따갑던 어린 시절, 어깨동무하여 산으로 들로 쏘다니던 소년 시절, 조금 자라서 살려고 동분서주하던 청장년 때에 비하면 그야말로 소양지판으로 성장, 노쇠의 과정을 우리가 느끼는 궁둥이의 무게에 정비례한다는 공식을 수립할 수 있을 법도 하다. 공자의 ‘불혹의 경지’는 성현의 높은 경지로서 도저히 범인의 바랄 바가 되지 못할 것이나, 공자도 이 경지에 도달하는 데 무거워진 궁뎅이에 유력한 후원을 얻었으리라는 것은 생각할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좀 더 까놓고 말하면 공자의 불혹의 경지도 단순한 분비물과 관련시켜 생각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닌가 한다. 혹하지 않는 대상은 한두 가지가 아닐 것이나 이성(異姓)에 대하여 이성(理性)을 잃지 않는 것이 그중에 중요한 것이 됨은 틀림없는 일인데, 이 이성에 대한 이성은 분비선의 쇠퇴에 반비례하여 자라는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젊음을 생각할 때 언제나 어려서 피리를 만들고 하던 버들가지의 푸른 잎과, 활을 만들고 하던 날씬날씬한 청(靑)무피리를 생각한다. 그리고 언제고 아프게 기억되는 것은 어려서 풋씨름 할 때 다 넘어가다가도 몸을 한 번 뒤집어 상대방을 곧잘 이길 수 있었던 날쌤과, 하루 방학이 되어 집에 돌아와 짐을 끌러놓는 길로 젖어머님을 찾으러 대문을 나서다 젖은 길에 미끄러져 8, 9분 넘어질 뻔하다 어떻게 간신히 몸의 균형을 회복했던 때의 몸의 탄력이다. 우리가 걸음을 걸을 때 걷는 그 자체에 무한한 쾌감을 느끼는 것은 이 날쌤과 탄력 탓이라고 생각되는데, 나는 40대 어느 아름다운 오후, 의대 구내 언덕길을 걸을 때 가벼운 걸음에 형용할 수 없는 기쁨을 가져본 이래 다시 그런 기쁨을 누려본 일이 없다. 그런데 이것도 생각하면 분비선의 문제로서 내 몸의 파란 맘이 고갈된 탓이 아닌가 한다.

흔히 젊은이에게는 용기가 있고 늙은이에게는 지혜가 있다고 한다. 늙으면 과연 반드시 지혜를 갖게 되는지 나는 의문으로 생각한다. 늙으면 지금 말한 분비선의 기능이 쇠퇴되는 동시에 정열과 의욕이 가리던 짙은 안개가 점점 걷히며 사물을 제대로 바로 보게 되는 것은 사실인데 이것을 갖고 지혜라 할 수 있을는지? 혹 그렇다 하더라도 이렇게 얻어지는 지혜는 한 설움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인생이 40부터 시작된다는 것도 요는 냉철한 안목을 갖고 무엇을 계획하고 영위하고 성취한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겠는데 성취하여 얻는 것이 부(富)가 되고 명예가 되고 지위가 된다 하더라도 어려서 잡던 파랑새, 높이 타고 오르던 산봉우리, 젊어서 갖던 마음을 허락하는 친구의 굳은 악수, 온 세상을 안겨주는 애인의 포옹에 비하면 한 보잘것없는 그림자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말하자면 시(詩)를 잃고 산문(散文)과 타협하려는 것이다.

그렇다. 어린 시절을 서사시(敍事詩)라 하면 20전후는 서정시(抒情詩)요, 30 전후는 극시(劇詩)요, 40 이후는 잡탕 산문이 되겠다. 평판(平板), 건조(乾燥), 무미(無味), 아무런 비약도 없고 흥분도 없고 기복도 없다. 아무 데 가서라도 내동댕이치고 미련 없이 자리에서 일어날 수 있다.

  1. 이양하: 평남 출생(1904~1963), 동경제국대학에서 영문학 전공. 연희전문과 서울대학교 교수 역임. 시집 ‘마음과 풍경’과 수필집 ‘이양하 수필집’과 ‘나무’ 등이 있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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