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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떳떳한 가난뱅이/ 박완서

부흐고비 2020. 3. 7. 08:32

떳떳한 가난뱅이/ 박완서


뭐는 몇십%가 올랐고, 뭐는 몇십%가 장차 오를 거라는 소식을 거의 매일 들으면서 산다. 몇%가 아니라 꼭 몇십%씩이나 말이다. 이제 정말 못 살겠다는 상투적인 비명을 지르기도 이젠 정말 싫다. 듣는 쪽에서도 엄살 좀 작작 떨라고, 밤낮 못 살겠다며 여지껏 잘만 살았지 않느냐고 시큰둥하게 비웃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우리네 백성들의 생활력이 질기다는 게 모멸에 해당하는 일인지 찬탄에 해당하는 일인지 그것까지는 잘 모르겠지만 질기다는 것만 믿고 너무 가혹하게 당하고만 있는 것 같아 뭉클 억울해진다. 더 억울한 건 물가가 오를 때마다 상대적으로 사람값의 하락을 느끼게 되는 일이다.

가난이 비참한 건 가난 그 자체의 물질적인 궁색을 견디기 어려워서라기보다는 부의 지나친 편재로 배고파 죽겠는 처지에서 배불러 죽겠다는 이웃을 봐야 하는 괴로움 때문인 경우가 더 많다. 게다가 소유하고 있는 물질과 금전의 다과를 인간을 재는 척도로 삼는 풍조 때문에 가난뱅이는 어디 가나 기죽을 못 펴고 위축돼서 사람이 지닐 최소한의 긍지도 못 지키고 비굴하게 한구석으로 비켜서 살아야 한다.

우리의 현재 봉급 수준과 물가 수준으로 볼 때 우리의 생활이 궁색하다는 건 지극히 정당하고, 잘 산다면 그게 오히려 부당한 거다. 그런데 왜 정당하게 사는 사람이 위축되고 부당하게 사는 사람이 당당한가? 이건 엄청난 비리다. 어차피 비리가 판을 치는 세상인 걸 무력한 백성이 새삼 뭘 어쩔 수 있을 것인가 하고 죽은 듯이 비리에 굴종만 할 것이 아니라 한번 과감히 도전해 봄직도 하지 않을까. 우리 스스로의 사람값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말이다.

무능이나 게으름에서 오는 가난이 아닌, 우리가 속한 사회가 가난한 것만큼의 정당한 가난은 고개를 들고 정면으로 당당하게 받아들여 한 점 부끄러움도 없어야겠다. 의연하고 기품 있는 가난뱅이가 돼야겠다. 뿐만 아니라 부당하게 치부한 사람, 우리가 속한 사회의 일반적인 생활수준에서 동떨어지게, 엄청나게 잘 사는 사람을 준엄한 질책의 시선으로 지켜보고, 경멸까지도 사양치 않음으로써 그들을 부끄럽게 만들어야 할 것이다.

요즈음 많이 쓰이는 말로 상류층이란 말처럼 듣기에 민망한 말이 없다. 거액의 밀수 보석을 사들인 사람도 상류층, 위장 이민도 상류층―.

이 타락할 대로 타락한 정신이 어째서 우리의 상류층일 수 있단 말인가. 나라의 대들보건 기둥뿌리건 가리지 않고 갉아서 치부를 하고, 그 부를 보다 안전하게 지키기 위해 환물 투기를 일삼아 경제 질서를 어지럽히고, 일신의 안일에만 급급한 나머지 위기의식만 예민해져, 보다 전쟁의 위험이 없는 나라도 도피할 궁리나 하는 게 이들이다. 그래서 해외에서 열심히 떳떳하게 사는 교포들의 정신생활까지 해치는 게 이들이다.

쥐는 영감이 발달돼 난파할 배를 미리 알고 떠나 버린다는 말이 있다. 이들은 쥐새끼만한 영감도 없는 채 처신은 꼭 쥐처럼 약게 하다가 조국을 떠나는 것도 쥐새끼가 난파선 버리듯 한다. 그러나 가난하나마 정신이 건강한 백성들은 조국이 난파선의 운명에 처한다 할지라도 결코 그 고난의 현장에서 피신하지 않고 끝내는 목숨을 걸고 난의 운명을 극복하고야 말 최후의 용기가 될 것이다.

그것만으로도 가난뱅이는 얼마든지 당당할 수 있지 않을까. 적어도 '정신적인 상류층'을 자처할 수도 있지 않을까.

경제 부흥에 안간힘을 쓰면서 우리는 '잘 살아 보자'를 외쳤었다. 이 '잘 살아 보자'가 차츰 '어떡하든 잘 살아 보자'가 되고 종당에는 '수단 방법 가리지 말고 잘 살아 보자'로 돼 버렸다. 물질적인 가치가 정신적인 가치위에 군림하고 인간은 이제 완전히 물질의 노예로 타락하고 말았다.

지금이라도 이 인간의 타락을 구할 새로운 싹이 틀 고장이 있다면, 아직까지는 양심을 물욕에 팔지 않고 살아 온 떳떳한 가난뱅이들의 고장밖에 더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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