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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흐르는 강가에서 / 박완서

부흐고비 2020. 3. 7. 08:15

흐르는 강가에서 / 박완서


서울 살다가 경기도로 거주지를 옮긴 건 서울 사람이 된 지 만 60년 만이었다. 남다른 교육열과 도시 지향적인 엄마를 따라 상경한 게 여덟 살 때 일이고, 지금 살고 있는 경기도 구리의 산골짜기 마을로 이사를 한 게 내 나이 예순여덟 살 되는 해였으니까, 작금의 이 나라의 민심은 노소를 가리지 않고 그 옛날의 우리 엄마보다 훨씬 더 도시, 특히 서울 지향적이다. 젊은이들은 아이들 교육을 위해서라지만 늙은이도 마찬가지인 게 교통편이 좋고 편의시설이 가까운 도심에 살아야 자식들한테 걱정을 덜 끼치고 홀로서기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때까지 내가 살고 있던 아파트도 그런 면에서는 나무랄 떼 없는 조건을 갖춘 곳이었기 대문에 그때 내가 아무한테도 의논하지 않고 단독으로 저지른 탈(脫)서울의 용단은 내 자식들도 이해할 수 없는 돌출행위였다.

이 동네에 처음 와보고 반한 것은 아마도 내 고향 마을과의 유사성 때문일 것이다. 고향 마을도 나지막한 동산이 삼면을 삼태기처럼 감싸 안은 동네였다. 마을 서북쪽? 산은 높고 남쪽은 산이라기보다는 숲에 해당하는 동산이어서 양지바르고 아늑하고, 동쪽으로는 넓은 벌판이 부챗살처럼 퍼지면서 그 끝으로 개울이 흘렀다. 정지용이 읊은 시, “넓은 벌 동쪽 끝으로 옛이야기 지즐대는 실개천이 휘돌아 나가고…”에 딱 들어맞는 지형이었다. 그건 시인의 고향과 내 고향의 유사성이라기보다는 산이 많고 그 사이사이에 평야가 분포한 우리나라 농촌 마을의 전형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우리 고향마을 동쪽 끝으로 흐르던 개울은 실개천은 아니고 꽤 큰 개울이었다. 곧 큰 저수지와 만나기 직전이었기 때문이다. 갈수기 때는 마을에서는 잘 안보였지만 장마가 지면 내 가슴까지 차오를 것처럼 불어났다. 장마철은 거의 여름방학 동안이어서 겨울에는 안보이던 개울이 불어난 것을 보면 무서워서 가슴이 두근거렸다.

이 마을에서 바라본 한강은 장마철에 부풀어 오른 고향 마을의 개울물 정도로밖에 안 보였다. 2킬로미터 정도의 거리도 있었고 무엇보다도 시야를 가리는 어떤 장애물도 없었기 때문이다. 무서워서가 아니라 친근감으로 가슴이 울렁거렸다. 서울에서는 아파트라는 거대한 시멘트 기둥을 의식하지 않고 한강을 조망하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한강을 조망할 수 있는 위치에 반해서 충동적으로 헌 시골집을 한 채 장만했고 그 후 벼르기만 하는 사이에 집은 더욱 퇴락해서 결국 헐고 다시 짓고 이사를 단행한 지 십년 남짓 된다. 그 십년 동안은 내가 한강과 친해지고 즐기고 감동한 세월이라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집은 공식대로 남향으로 앉혔지만 거실은 남쪽 창을 동쪽으로 ㄱ자로 꺾어 한강을 조망할 수 있게 했다. 집에 처음 오는 손님이 앞의 숲만 보고 공기 좋겠다고 칭찬을 하면 더 칭찬이 듣고 싶어 동쪽 창으로 한강을 보게 한다. 한강은 어느날은 칭찬을 들을만하고 어느 날은 한강이 잘 안보인다. 집에서 보는 한강이 가장 아름다울 때는 해뜰 무렵이다. 강 건너로는 순한 짐승이 엎드려 있는 것처럼 능선이 부드러운 산봉우리들이 보이고 그 사이로 해가 불끈 솟으면 수면이 금빛으로 은빛으로 때로는 주황색으로 부서진다. 물속을 노닐던 신비한 물고기가 잠시 그 아름다운 비늘을 드러내 보여준 것처럼 그 순간은 짧다. 짧지만 그런 날은 뭔가 좋은 일이 있을 것만 같고, 몸도 온종일 개운하지만 황사나 안개에 가려 안 보이는 날은 몸도 마음도 울적하게 가라앉는다.

공기가 투명할 때는 매일 다른 물빛까지 구별할 수 있다. 장마가 지거나 폭우가 내린 후에는 당연히 한강물도 황토 빛으로 변하여 거칠게 챈다. 추위가 혹독해 결빙하는 해는 비닐로 덮어놓은 것처럼 움직임 없는 회색빛이던 한강이 어느 날 햇빛에 부서지는 물결을 보여주면 어쩔 수 없이-강물이 풀리다니/강물은 무엇하러 또 풀리는가/우리들의 무슨 서름 무슨 기쁨 때문에/강물은 또 풀리는가-로 시작되는 서정주의 <풀리는 한강 가에서>를 읊조리게 된다. 시인은 아마 그 시를 전후(戰後)에 썼으리라. 전쟁을 겪은 세대만이 한강과 더불어 공유할 수 있는 우울과 한탄이 짙게 깔려 있다. 전쟁 때 다리 끊긴 한강, 얼어붙은 한강은 군인뿐 아니라 수많은 양민들이 운명과 생상의 갈림길이었다.

어찌 근세사에서뿐일까. 집에서 본 한강이 시냇물이나 호수처럼 만만해 보이는 것과는 딴판으로 마을을 감싸고 있는 아차산에 올라가서 내려다본 한강은 도도하고도 유유하다. 삼국 중 영토가 가장 광대했던 고구려가 왜 한강유역의 땅을 그렇게도? 탐냈던가를 한눈에 알 수가 있다. 고구려는 도읍을 평양으로 옮기고 나서 한강유역을 차지하려고 백제를 침공한다. 아차산을 요새로 삼은 고구려는 치열한 전투 끝에 마침내 그 유역 땅을 차지하고 백제의 옹진 천도를 불가피하게 했다. 그후에도 삼국 간에는? 한강유역을 차지하려는 전투가 그치지 않았다. 그만큼 한강유역의 땅은 기름지고 교통이 편하고 기후가 순후했던 것 같다. 암사동 등 한강유역의 땅에서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사람들의 삶의 터전, 선사시대 유물이 대량으로 발굴되는 것만 봐도 알 수가 있다.

아차산에는 능선을 따라 지금까지도 고구려 보루성 터가 남아있고 십여 년 전 발굴을 끝낸 유물들은 고구려 박물관이 신축되기를 기다리며 현재는 서울대 박물관에서 보관중이라고 한다. 발굴을 끝내고 나서 서울대에서 그걸 공개한 적이 있는데 나는 그때 본 그 유물들이 중국 지안(集安)박물관에서 본 고구려 시대 무기, 생활용품과 너무도 유사한 것에 놀란 적이 있다.

국운이 융성하고 태평할 때는 중국과 교역로로, 전쟁 때는 천연의 해지구실을 하던 한강을 가장 친근하고 사랑스럽게 볼 수 있는 데는 경기도 구리시에서 관리하는 한강둔치가 아닌가 한다. 한강이 속삭이는 물소리까지 잡힐 듯 인접한 산책로도 있고, 자전거 길도 있고, 몇 십만 평에 이르는 광대한 둔치에는 봄의 유채꽃을 비롯해서 여름의 백일홍, 달리아, 가을의 코스모스까지 사철 꽃이 그치지 않는다. 끝이 안 보이는 꽃밭을 보면 바로 서울과의 접경지대에 이런 선경이 있다는 게 믿어지지 않는다. 휴일에 부모 손을 잡고 나온 어린 꽃구경꾼들이 꽃밭 사이길을 희희낙낙 뛰노는 걸 보면 화초가 더 예쁜지 인(人)화초가 더 예쁜지 분간이 잘 안 된다. 돈 내고 타는 아찔한 것이 많은 이름난 놀이시설에 길게 줄 서 있는 아이들보다 훨씬 건강하고 행복해 보인다. 무엇보다도 한강 가엔 무조건 아파트가 있어야 하는 것처럼 여겨온 통념을 어기고 아무렇지도 않게 무심히 꽃을 피우고 있는 땅이 고맙고 한강한테도 덜 미안하다.

광나루에서 구리방향으로 난 국도를 타고 가다 워커힐을 지나면 곧 경기도라는 도계 표지판이 나온다. 그 43번 국도는 도계를 전후해서 커브 길이 심하지만 오른쪽으로는 유유히 흐르는 한강을 끼고 있어 차 속에 앉아 있어도 숨통이 트이고 기분이 상쾌해진다. 도계를 지나 차로 5분 안에 길이 Y자로 갈라지는 지점이 나온다. 오른쪽 길이 양평 가는 길이다. 뚜렸한 목적지 없이 반나절 정도의? 드라이브로 기분전환을 하고 싶다면 양평 가는 길로 붙을 일이다. 가다가 또 다시 길이 여러 갈래로 갈릴지라도 계속해서 오른쪽 길로 붙어야 한다. 그래야 한강을 놓치지 않는다. 잘못 붙으면? 기나긴 굴속으로 들어갈 수도 있다. 굴만 벗어나면 다시 한강을 낀 길을 찾을 수도 있지만 그동안이 아까울 만큼 서울에서 멀어질수록 한강이 아름다워진다. 계절 따라 아름답고 지역에 따라 아름답다. 대안의 경치가 특히 환상적이다. 그 길이 남한강과 북한강이 합쳐지는 두물머리에 이르면 아름다운 강은 위대한 강으로 변한다. 이건 강이 아니라 바다다. 유럽을 여행하면서 본 유럽문화를 꽃피운 온갖 강들의 이름을 떠올리며 애걔걔 그것도 강이라고… 무시해 주고 싶은 치기까지 발동한다. 그런 기분은 아마도 유럽문화에 압도된 상처나 열등감의 반작용일 수도 있겠으나 우리 민족 본연의 호연지기일 수도 있으리라.

엄밀하게 말하면 거기까지가 한강이고, 한강으로 합쳐지기 전까지 흘러온 두 개의 큰 강은 남한강과 북한강이라는 다른 이름을 가지고 있고 그 발원지도, 받아들인 지류도 각각 다르다. 위대한 강, 한강을 이룬 두 개의 큰 줄기 남한강과 북한강을 함께 보려면 양수교를 건널 일이다. 양수교를 넘으면 남한강과? 북한강 사이에 넓고 살기 좋은 양평 땅이 나오고, 두 강이 합쳐지면서 생긴 삼각형 육지의 꼭지점에서 볼 수도 있다. 요즈음에는 그 근방 일대가 온갖 종류의 연꽃밭으로 개발되어 여름이면 꽃 구경꾼으로 붐비지만 전에는 그 꼭지점만으로도 명소였다.

(중략)

그러나 어찌 빼어난 경치만 가지고 한강을 위대한 강이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수종사에서 내려와 양수교를 건너지 않고 가던 길로 계속해서 북한강을 오른쪽으로 끼고 갈 수 있는 길로 접어들면 다산유적지 표지판이 나온다. 한강을 놓치지 않고 표지판만 따라가다 굴다리 밑에서 오른쪽으로 급커브를 하면 능내릴 마재(馬峴) 땅이 나온다. 마재는 정약전, 정약용 형제의 고향이자, 그 아랫대에서는 성인(정하상) 성녀(정정혜)를 배출하기도 한 한국천주교회의 요람지 중 하나이다. 다산 유적지 못 미쳐서 오른쪽으로 마재성지 들어가는 길이 나오고 다산 생가터와 묘소는 좀 더 앞으로 한강 가까이 왼쪽에 있다. 다산이 거기서 태어나서 어려서는 거기서 물장구치고 놀다가 소년이 되어서는 물머리까지 가서 고기도 잡았을 것이고 과거 보러 서울 갈 때는 거기서 배를 타고 갔을 것이다. 배를 타고 가다가 강물이 얕아지면서 바닥에 깔린 암석 때문에 배가 움직이지 못할 때는 뱃사공이 내려서 배를 밀었다는 기록도 나온다. 학문에 정진할 때는 선상에서 실학자들이나 천주학쟁이들과 토론도 했을 터이고 나라의 답답한 운명에 대해 울분을 토로하면서 밑바닥에서 허덕이면서도 굳건히 이 나라를 받쳐주고 있는 농사나, 길쌈, 수공업에 종사하는 백성들이 어떡하면 억압과 수탈을 벗어나 인간답게 살 수 있나를 진지하게 고민하고 사색했을 것이다.

다산 유적지에는 다산의 묘소하고 생가터에 기중기 등 몇 가지 간단한 다산의 발명품만 전시돼 있다가 그 후 실학 박물관이 되면서 실학사상뿐 아니라 실학의 형성과정 전개 등 디지털화 돼 실학자들의 방대한 업적을 누구나 단편적이지만 쉽게 접할 수가 있게 되었다. 어떻게 그들은 그때 그런 생각을 할 수 있었을까. 그들이 남긴 업적, 활동, 저서, 어록 등은 지금 우리 정치인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고, 소박하지만 소박해서 더욱 신실한 자유민주주의 사상 그 자체이고 사회주의와 자본주의의 행복한 화해이다. 그리하여 그들 실학자들은 당대의 모순이나 부패를 고민한 게 아니라 자식의 자식 대(代), 손자의 손자 代 까지 내다보고 고민한 것처럼 읽힌다. 그것이 바로 같은 지식인이라도 한 치 앞의 이익에 급급한 정치가나 어용학자들과 진정한 지식인의 다른 점이고 선각자의 엄혹한 운명일 것이다. 아무리 경치가 빼어나도 자연 그 자체만으로는 감히 위대하다고는 말 못하겠는데 한강을 그렇게 부르고 싶은 것은 위대한 사상의 발상지를 끼고 있고 그들이 오간 물길이었기 때문이다. 위대한 강의 원형이 더는 훼손되지 말았으면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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