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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위대한 순간은 온다 / 장영희

부흐고비 2020. 3. 9. 07:51

위대한 순간은 온다 / 장영희1


어제 나를 찾아온 용호는 내가 서강대부설야학에서 가르쳤던 학생인데, 정비공으로 취직이 돼 고향인 속초로 내려간다고 했다. 사실 용호의 꿈은 신부님이 되는 것이었는데 지난해 수능고사 점수가 기대에 못 미쳤고, 담당 신부님이 조심스럽게 사제의 길을 포기할 것을 권고했다는 것이다. 선물로 책 한 권을 주며 나는 앞에 ‘이 세상에 기쁨과 행복 주는 사람 되거라!’라고 썼다. 그것을 보고는 한숨과 함께 용호가 말했다.

“에이 선생님. 제가 어떻게 이 세상에 기쁨과 행복을 줘요. 저는 신부님이 돼서 위대한 일을 많이 하고, 세상에 기쁨과 행복을 주려고 했어요. 그랬는데….”

자동차 정비공이 어떻게 이 세상에 기쁨과 행복을 주겠느냐는 말이었다. 나는 “물론 신부님도 이 세상에 기쁨과 행복을 주겠지만 정비공도…”, 라고 말하려 다가 그만뒀다. 좌절된 꿈에 슬퍼하고 있는 용호가 어떻게 받아들일지 몰랐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나는 문득 토니를 떠올렸다.

유학중 내가 살던 기숙사의 경비아저씨 토니는 나이가 한 예순쯤 됐는데 전직이 콜택시 기사였다. 그가 언젠가 자신이 기사 시절 크리스마스이브 새벽에 겪은 일화를 얘기해 준 적이 있다.

그날 밤 당번이었던 그는 시내 어떤 주소로 가라는 연락을 받았다. 도어벨을 누르니 한참 있다가 문이 열렸고, 거기에는 마치 40년대 영화에서 막 걸어 나온 듯한 복장에 모자까지 단정히 쓴 아주 나이 든 할머니가 서 있었다. 그 뒤로 보이는 방에는 가구가 다 흰색 천으로 덮여 있었다.

차에 타자 할머니는 주소를 주면서 시내를 가로질러 가달라고 부탁했다.

“그러면 돌아서 가는 건데요, 할머니.”

“괜찮아요. 난 시간이 아주 많아. 호스피스 병원으로 가고 있는 중이거든요. 식구도 없고, 의사 선생님 말이 이젠 갈 때가 얼마 안 남았대.”

어둠속에서 할머니 눈에 이슬이 빤짝였다. 토니는 미터기를 껐다. 그로부터 두 시간 동안 토니와 할머니는 함께 조용한 크리스마스 새벽 거리를 드라이브했다. 그녀가 젊은 시절 엘리베이터 걸로 일하던 빌딩, 처음으로 댄스파티를 갔던 무도회장, 신혼 때 살던 동네 등을 천천히 지났다. 때로는 어떤 건물 앞에 차를 세우고 그냥 오랫동안 어둠 속을 쳐다보기도 했다.

어슴푸레 날이 밝아오자 할머니는 “이젠 피곤해, 그만 갑시다.”라고 말했다. 병원에 도착해서 토니는 몸을 굽혀 할머니를 안아 작별인사를 했다.

“자네는 늙은이에게 마지막 행복을 줬어. 아주 행복했다우.”

할머니가 말했다.

“난 그날 밤 한참 동안 할머니를 생각하며 돌아다녔지. 그때 내가 그냥 경적만 몇 번 울리고 떠났다면? 그래서 크리스마스 날 당번이 걸려 심술 난 다른 기사가 가서 할머니에게 불친절하게 대했더라면…, 돌이켜보건대 나는 내 일생에 그렇게 위대한 일을 해 본 적이 없어. 내가 대통령이었어도 아마 그렇게 중요한 일은 하지 못했을지 몰라.”

우리는 보통 우리의 삶이 위대한 순간들로 이뤄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 위대한 순간, 내가 나의 모든 재능을 발휘해 위대한 일을 성취할 나를 기다린다. 내게는 왜 그런 기회가 오지 않느냐고 안타까워하고 슬퍼한다.

그렇지만 그 위대한 순간은 우리가 모르는 새 왔다 가는지도 모른다. 남들이, 아니면, 우리 스스로가 하찮게 생각하는 순간들 속에 숨어 있는지도 모른다. 무심코 건넨 한 마디 말, 별 생각 없이 내민 손, 스치듯 지은 작은 미소 속에 보석처럼 숨겨져 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런 순간은 대통령에게도, 신부님에게도, 선생님에게도, 자동차 정비공에게도, 모두에게 골고루 온다.

  1. 장영희: 1952~2009 서울 태생. 서강대 영어어문전공교수로 봉직하면서 번역가, 수필가, 칼럼니스트로 활발한 활동을 하였다. ‘문학의 숲을 거닐다’ ‘생일’ ‘축복’ 등 많은 저서와 번역서를 출판하였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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