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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 부적 / 이미경
코로나19 바이러스가 요사를 부리고 있다. 봄은 왔건만 세상은 겨울왕국처럼 싸늘하다. 절반 가까운 상가들이 문을 닫았고 사람들은 서로를 경계하며 자기만의 섬으로 꽁꽁 숨는다. 손을 잡고 마주보며 웃던 사람 풍경은 안개 속으로 사라졌다. 거리에는 마스크를 부적처럼 낀 사람들이 유령처럼 지나간다.
보름 째 집에만 있다시피 한 나도 그들 사이에 끼여 바쁜 걸음을 옮긴다. 이름도 낯선 우한이라는 곳에서 박쥐가 발명원이라는 ‘코로나 바이러스’라는 말을 처음 들었을 때만해도 큰 걱정은 하지 않았다. 이미 메르스나 사스로 예방 접종을 받은 까닭이다. 그래서 큰 탈 없이 지나가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감염이 우려되는 사람들은 습자지 위의 물방울처럼 번졌다. 확진자와 사망자가 날마다 갱신되는 텔레비전 화면을 보다가 우리집에 마스크가 동이 났음을 알았다. 11시에 판매한다고 했으니 9시쯤 도착하면 구할 수 있으리라.
우체국 앞에 사람들이 꼬리를 물고 서있다. 끝이 보이지 않는다. 코로나19 발병이후 처음 보는 인파다. 그리운 사람에게 편지를 보내고 선물을 보내던 우체국 앞에 저리 사람이 많기는 역사 이래 처음일 것이다. 그것도 우체국과 거리가 먼 마스크를 사기위한 줄이다. 앞 줄 에 있는 사람은 새벽 6시애 나왔단다. 손녀에게 줄 마스크를 사야한다는 할머니 앞에 한 부부가 있다. 기다림에 지쳤는지 부인이 주저 앉아있고 남편은 뒤에서 허리를 받쳐주고 있다.
‘설마 확진자는 아니겠지?’ 화살처럼 부정적인 생각이 머릿속을 지나간다.
사람이 감당하기 힘든 일을 당했을 때 첫 번째로 오는 일반적인 반응이 부정과 분노라고 한다. 코로나가 창궐하면서 이런 심리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감염 우려로 자가격리 해야 할 사람이 동서남북으로 다녔고 확진자 판정을 받은 사람이 마스크를 산다며 줄을 섰다는 뉴스가 보도 되었다. 뿐만 아니라 확진자를 병원으로 이송하는 구급대원 얼굴에 침을 뱉은 사건도 있었다. 사람들은 코로나 포비아 주위를 서성거리기 시작했다. 나도 그곳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다.
역사를 봐도 16세기 찬란한 아스테카 문명을 무너뜨린 건 천연두바이러스였다. 아즈텍 사람들에게 스페인 사람들이 들이닥쳤을 때 아즈텍 사람들은 스페인 함대와 함께 도착한 바이러스에 무너지면서 파멸되었다. 전쟁에서 무력이 아닌 바이러스에 먼저 무너진 것이다. 지금, 4차혁명 시대를 맞이한 21세기에도 여전히 바이러스는 세상을 바꾸는 위험적인 존재가 되고 있다. 그러니 코로나19에 대한 두려움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반응이다.
멀리서 앰뷸런스 사이렌 소리가 들린다. 사람들이 일제히 소리 나는 곳으로 고개를 돌린다. 그 모습이 미어캣 같다. 혹 내가 사는 곳에서 확진자가 나오면 어쩌나 하는 불안한 눈빛이다. 오랫동안 서있었더니 허리가 아프다. 허리 운동을 하는데 남자의 목소리가 들린다. 오늘 마스크는 250 명에게만 준다는 것이다. 남자가 가리키는 전봇대를 보았다. 마스크는 5매씩 250명에게 공급 가능하다는 내용이 조그맣게 붙어 있다. 얼핏 봐도 내 순서는 250번이 한참 넘은 것 같다.
“노인에게 아침마다 운동을 하게 하는 우리나라는 참 좋은 나라다”
할아버지 한 분이 볼멘 목소리를 하며 돌아선다. 순번에서 한참 밀려난 나도 씁쓸하게 돌아선다.
“쾅, 우지직”
마스크를 구하기 위해 여기저기를 돌던 아주머니가 주차하다가 차를 박았다고 악을 쓰는 소리가 들린다. 새치기하지 말라는 말과 잠시 화장실 갔다 왔다는 말이 내 뒤에서 탁구공처럼 튄다. 마스크를 구하기 위해 새벽부터 줄을 선 긴 행렬의 아우성이 처절하다. 운이 없으면 생명을 잃을 수도 있다는 불안감이 삶 자체를 한없이 웅크려들게 한다.
코로나19로 모든 스케줄이 취소되었을 때 얼마간은 좋았다. 냉장고를 뒤져 요리를 하고, 화분 분갈이를 하며 햇살을 맘껏 마셨다. 뜸했던 친구에게 안부를 묻기도 했고 보고 싶었던 영화도 거실 1열을 혼자 차지하고 하루 종일 보는 호사도 누렸다. 하지만 딱 며칠이었다. 날이 갈수록 몸에서 생기가 사라지는 것 같다.
난세일수록 유토피아를 꿈꾸고 부적이 성행한다. 코로나19의 부적인 마스크를 구하지 못한 나는 생뚱맞게 유토피아를 꿈꾼다. 나는 영생불멸을 믿지 않을 뿐더러 생(生)은 멸(滅)하는 것이 순리라 믿는다. 태어남과 죽음이 반복하면서 새로운 발전을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니 살아서든 죽어서든 유토피아에 대해 구체적으로 생각해 본적이 없다. 하지만 이 순간 떠오르는 것이 있다. 평범했던 일상, 열심히 일하고 게으르게 운동도하고 가끔 친구들과 마주보며 웃던 아주 평범했던 일상이 그립다. 유토피아는 멀리 있는 게 아니었다. 매일 누렸던 아주 평범했던 일상의 순간들이 다 유토피아였다.
아파트 앞 약국에서도 코로나19 부적을 구하기 위한 사람들이 늘어 서 있다. 응달이 추워서인지 앞사람과 거리를 두기 위해서인지 지그재그 모양이다. 여기서도 내 순번은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마스크 사려다 전염되겠다는 여자의 목소리가 바람을 타고 흐른다.
햇살은 고운데 바람이 차다. 미련을 못 버린 찬 기운이 마지막 발악이라도 하는 걸까? 코로나19로 내가 움츠리고 있는 동안에 계절은 제 할 일을 하고 있었다. 담장 밑 동백은 붉은 웃음을 터트렸고 목련도 활짝 피었다. 과하지도 부족하지 않는 평범한 자연의 일상을 바라보며 천천히 걷는다. 꽃이 지기 전에 평범했던 일상으로 다시 돌아갔으면 좋겠다. 봄과 어깨를 나란히 한 계절이 무심히 약국 앞을 비추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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