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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메밀꽃 질 무렵 / 김경실

부흐고비 2020. 4. 19. 21:52

메밀꽃 질 무렵 / 김경실


눈빛 메밀밭엔 늦더위를 식히는 빗줄기까지 촉촉이 내리고 있었다.

메밀꽃이야 서울 근교에서도 볼 수 있었으나 단내를 풀풀 풍길 만큼 원시적이고 토착 정서가 넘치는 봉평의 메밀꽃을 보아야 그 아름다움과 흰빛의 서늘함까지 느낄 수 있을 것 같았다.

이상기온 현상으로 지난해 보다 열흘이나 일찍 핀 메밀꽃은 어느 사이 거뭇거뭇 시들고 있어 나그네의 마음을 서운하게 하였지만 다행이 늦게 핀 메밀꽃이 소금을 뿌린 듯 군데군데 남아있어 문향의 고향다운 정취를 풍기고 있었다.

허생원과 조선달 동이가 파장 후 탁배기를 들이키며 계집과 농탕질 하던 충주집은 형체조차 사라진 채 표징 석만 남아 무심한 세월을 말해 주고 있었다.

드팀전 장돌이들이 나귀에 짐을 싣고 밤새워 걸어왔을 길이 이제는 고속도로가 뚫려 편히 앉아 올 수 있으나 어떻든 아침부터 빗속을 달려온 기대가 조금은 무너져 내리는 느낌이었다.

현대식 건물이 들어서 몰라보게 달라진 마을을 서운한 마음으로 둘러보다 봉평의 낮은 구릉과 다듬어지지 않은 척박한 들녘이며 울퉁불퉁한 계곡에서 고향 같은 그리움을 발견하게 되었다. 저만치 붉은 황톳길에 어우러진 들풀이며 몸통 굵은 나무들, 자갈투성이 메밀밭을 끼고 속살을 드러낸 채 낭랑히 흐르고 있는 개울물, 태기산이 키우고 있는 야수파의 그림 같은 이것들이야말로 메밀꽃 못지않게 가산의 문학 속 에서 요요히 빛을 바라며 여태 것 살아 있는 것들이 아닌가.

태고부터 쉼 없이 세월을 자아온 물레방아는 고색이 창연한 채 엎디어 있었다.

비도 피할겸 급한 마음에 안으로 들어섰다. 쾌쾌한 곰팡이 냄새와 죽은 듯한 정적만이 안겨 왔지만 이것이야말로 오랜 세월 많은 이들이 한결같은 사랑으로 꽃피어 온 예술의 향취요, 문명에 식상한 도시인들의 향수가 아니겠는가. 그 옛적 얼금뱅이 허생원과 이 고을 최고의 미색 성처녀의 괴이한 하루 밤 인연이 메밀꽃만큼이나 아름답게 서려 있고 죽은 듯 고요함속에 달의 숨소리마저 배어있는 현대와 고전이 공존하는 곳이다.

잠시 커피 한 모금에 여독을 풀며 쉬고 있노라니 묵묵히 돌기만 하는 물방아가 여인의 수난사와 유사성이 있는 듯 느껴졌다. 흉물스런 방앗간에서 일어나는 충동적 행위는 사랑이란 미명으로 얼마나 많은 여인의 삶을 빗나가게 하였을까. 태고를 거슬러온 여인의 슬픔이 내게로 전이되는 느낌이었다. 그러나 어떤 천형에도 성처녀의 아픈 사연을 품은 채 천년의 세월을 더 버틸 것 같은 물방앗간의 고독이 나그네를 더 견딜 수 없게 하였다.

한동안 마음을 묶어 놓았던 성처녀의 연민에서 벗어나 비에 범벅이 된 황톳길을 걸었다.

흐느끼는 듯한 빗속에 극 채색을 띠고 있는 메밀꽃에 홀리고 싶어서였다.

싱싱한 옥수수 이파리며 키 작은 콩 포기들은 진녹색을 띤 채 갓 피어난 메밀꽃과 조화를 이루었다. 여길 보아도 저길 보아도 온통 눈빛의 메밀꽃뿐이라 그 서늘함이 오관을 시립게 했다.

붉고 긴 대궁은 흡사 홍학의 긴 다리를 닮았고 조팝 같은 꽃잎은 순결한 꿈을 꾸는 소녀의 얼굴을 닮았다. 꽃포기가 다칠세라 조심스레 안으로 들어섰다.

그냥 서 있기만 해도 흰빛이 묻어나고 흰빛에 앞도 되어 숨이 막힐 지경인데 넓디넓은 메밀꽃밭에 달빛이 쏟아진다면 그 황홀함에 질식하고 말 것이 아닌가.

바람에 부대끼며 내리는 빗줄기는 마치 실루엣처럼 흰빛을 덮어 버린다. 그 실루엣 속의 메밀꽃은 더할 나위 없이 고혹적이며 관능적이기까지 하다.

지금껏 메밀꽃을 예찬하는데 가산 외에 어떤 대상도 끼어 줄수 없었던 것을 이제서 알 것 같다. 초라한 생가에서 탁배기 몇 잔에 얼큰해 나오는 많은 사람들이 가산을 얼마나 사랑하고 있나 말해 주고 있는 것이다. 가산의 묘가 메밀꽃 필 무렵에 그것도 소설에서처럼 달밤에 옮겨졌다는 운명 같은 사실이 안타까워 이 가을비 속에 많은 이의 발길이 끊어지지 않는 게 아닐까. 소중한 것을 도둑맞은 마음으로 황톳길을 다시 걸었다.

정답게 끈끈한 삶의 이야기가 배어 있는 장터로 나왔다.

애당초 울긋불긋한 비단 피륙이 널려있고 각다귀들이 풍장 치는 모습을 기대하였던 것은 아니지만 신 바람나게 길쭉한 장날 분위기가 어딘가에 조금은 남아 있을 것 같았으나 서운함만 키우고 말았다.

그리운 것들은 모두 사라져 버린 채 희미한 그림자만 남아있었다.

이른 저녁을 먹으려고 봉평에서 소문난 메밀국수 집을 찾아들었다. 외지사람들로 성업이었다. 방안에는 메밀꽃이 만개한 대형 액자가 눈부셨다. 가산도 없는 곳에서 홀로 고향지기가 되어 고향을 지켜 줄 것이라 생각하니 메밀 맛이 더욱 일품이었다.

장날이면 앙칼진 계집의 목소리가 새어나오고 떠들썩했을 충주집터에 서고 보니 인생유전을 절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

돌아가야 할 도시의 권태가 유쾌하진 않았지만 내년 가을 눈빛 메밀밭에 달의 숨소리를 들어보려 다시 오리라 마음먹고 발길을 돌렸다.

파주의 실향민 묘원에 계신 가산도 서운키만한 이내 마음을 알고나 계실까.

내 안의 메밀꽃은 아직 지지 않았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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