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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고독과 사색 / 안병욱

부흐고비 2020. 5. 24. 21:51


--인간은 사회 속에서 사물을 배울 수 있다. 그러나 영감을 받는 것은 오직 고독 속에서다-- 괴테

제일의 탄생
사람은 두 번 태어난다. 한 번은 존재하기 위해 태어나고 한 번은 생활하기 위하여 태어난다. 우리는 어머니의 뱃속에서 출생하여 이 세상에 내던져진다. 나의 몸뚱이가 태어나는 것이다. 그것은 나의 생명의 탄생이요 신체의 탄생이다. 필자는 이것을 제 1의 탄생이라고 일컫는다. 그러나 인간에게는 제 2의 탄생이 있다. 자아가 탄생하고 나의 정신이 태어나는 것이다. 우리는 청년 시대에 이것을 경험한다. 사람은 제 2의 탄생과 더불어 참된 자기가 되고 진실한 인간이 될 수 있다.

동물에는 제 1의 탄생밖에 없다. 동물은 정신 탄생과 자아의 탄생을 모른다. 오직 인간만이 제 2의 탄생을 갖는다. 인간은 신체적 존재인 동시에 신체를 넘어서는 정신적 존재다. 인간은 육을 가진 영이다. 우리는 육체의 차원에 속하면서 동시에 자아와 인격과 정신의 차원에서 살아간다. 여기에 인간의 영광과 존엄성이 있는 동시에 고민과 불안이 또한 따른다.

인간을 동물의 질서에서 엄연히 구별하는 것은 제 2의 탄생이다. "에밀"의 저자 루소는 이렇게 말하였다. '모든 사람은 세상에 두 번 태어난다. 한 번은 어머니로부터 하나의 생명으로 탄생하고, 한 번은 인간으로서 사회에 태어난다.'

이것은 인간의 2중 탄생을 간결하게 표현한 명언이다. 탄생에는 언제나 심한 고통이 따른다. 어머니는 자기의 생명을 걸고 자식을 낳는다. 제 1의 탄생에서는 한없는 신체의 고통이 동반한다. 제 2의 탄생에서는 신체적 고통 대신에 정신적 고뇌가 따른다. 우리의 정신은 불안의 골짜기를 헤매야 하고, 회의의 안개에 휩쓸려야 하고, 허무의 어두운 밤을 방황하고, 절망의 절벽에 부딪쳐야 한다. 자신 만만한 생의 충실감을 느끼는가 하면 걷잡을 수 없는 인생의 좌절감을 경험하게 된다. 즉 빛과 어둠의 교차를 체험한다. 그것은 제 2의 탄생을 위한 인간 자아의 악전고투요 정신적 몸부림의 현상이다.

인생의 의미와 자기의 운명의 부조리에 대해서 근본적인 물음을 던지게 된다. 나는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 것이며, 또 무엇을 해야 하고 어떻게 인생을 살아야 하는가, 무엇이 '참'이고 무엇이 '거짓'이며 생의 목적과 의의는 어디에 있는가? 젊은이들은 인생의 이러한 근본적인 위문 앞에 엄숙히 서게 된다. 그러나 아무도 시원한 해결과 대답을 제시해 주지 않는다. 스스로 탐구해야 한다. 그는 회의로 잠 못 이루는 밤을 경험해야 하고 자기의 생을 저주하고 싶은 우울한 심정을 느낀다. '나를 이 세상에 이끌어 온 자는 도대체 누구인가? 만일 그러한 자가 있다고 하면 나는 그에게 항의하고 싶다.' 이 말은 덴마크의 고독한 실존 철학자 키에르케고르가 인간의 존재의 우연성에 관해서 항의한 말이다. 이것은 비단 키에르케고르만의 항의가 아닐 것이다. 제 2의 탄생을 경험하는 젊은 혼들이 인생의 어느 시기에 반드시 한 번은 던지게 되는 생의 항의다.

우리는 분명히 이 세상에 내던져진 존재다. 하이데거의 표현을 빌린다면 피투성의 존재다. 게보르펜하이트의 자각이다. 누가 무엇 때문에 나를 지금 여기에 한 인간으로 내던졌는가? 기독교에서는 이것을 하나님의 섭리로 돌린다. 불교는 인연이요, 업보라고 한다. 어떤 이는 이것을 운명에 돌리기도 하고 우연에 돌리기도 한다.

실존 철학자들은 이것을 인생의 부조리라고 한다. 내가 지금 여기에 한 인간으로서 실존하는 데 대해서 아무도 합리적인 해석과 이유를 부여할 수 없다는 점에서 인생은 부조리하다는 것이다. 파스칼은 그의 명저 "팡세"에서 이렇게 말했다. '나는 내 인생의 짧은 기간이 내 앞과 뒤에 연결된 영원 속에 매몰되며 내가 차지하고 있는 이 조그마한 공간이 나를 알지도 못하고, 또 나도 알지 못하는 무한의 공간의 영원한 침묵은 나를 전율케 한다.'

이것은 '내'가 지금 여기에 실존하는 데 대한 파스칼의 철학적 회의의 말이다. 분명히 인생은 하나의 수수께끼요, 부조리요, 아포리아다. 젊은 생명들이 이러한 문제에 회의와 사색의 눈초리를 돌릴 때 그는 정신의 제 2의 탄생을 겪고 있는 것이다. 청년은 인생의 제 2의 탄생을 맞이하는 시기다. 인생에서 참으로 중요하고 보람 있는 것은 제 2의 탄생이다. 왜냐하면, 제 2의 탄생이야말로 새로운 자아, 참된 자기, '나'다운 내가 태어나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는 존재의 차원에서 생활의 차원으로 비약하는 것이다.

고독에의 향수
인간은 세 개의 눈을 갖는다. 첫째는 밖으로 향하는 눈이요, 둘째는 위로 향하는 눈이요, 셋째는 안으로 향하는 눈이다. 밖으로 향하는 눈은 자연과 객관적 대상의 세계로 향한다. 위로 향하는 눈은 신과 종교적 신앙의 세계로 향한다. 안으로 향하는 눈은 자아와 내면적 세계로 향한다. 청년의 사색과 관심의 특색은 내향성과 내면성이 있다. 그는 눈을 밖에서 안으로 돌리고 남에게서 자기에게로 돌린다. 청년은 주로 자아와 내면적 세계로 향한다. 그것은 자기 발견, 자기 탐구, 자기 성찰, 자기 응시의 눈이다. 내가 나의 내적 세계를 들여다보려는 눈이다.

사색에는 조용한 환경이 필요하다. 우리는 사색하기 위해서 주위의 접촉에서 격리되어 조용한 장소를 구한다. 더구나 자기 성찰에는 그러한 환경이 요구된다. 고독은 사색하기 위한 조건이다. 우리는 고독 속에서 자기가 자기 자신과 대면하는 시간을 갖는다. 내가 나를 응시하고 조용히 인생을 명상하는 시간을 가진다. 청년은 고독에의 향수를 느끼다. 그것은 마치 플라톤이 말한 바 영혼이 이데아의 세계에 대해서 노스탤지어를 느끼는 것과 같다. 고독의 시간은 어떤 의미에서 구원의 시간이다. 젊은 혼은 고독 속에서 마음껏 꿈을 꿀 수 있고 감상에 젖을 수 있고 상상의 날개를 타고 낭만의 세계를 달릴 수 있다. 내가 나하고 대화할 수 있는 시간이다. '젊은이는 술 없이도 취할 수 있다.'고 시인 괴테는 노래했다. 꿈을 꾼다는 것은 젊은 생명이 누릴 수 있는 특권이다.

'애지자의 정신만이 날개를 가진다'고 플라톤은 말하지 않았던가. 지혜를 사랑하는 자는 진리를 향해서, 미를 찾아서, 이상의 세계를 동경하여 한없이 위로 높이 날개를 펴며 날아갈 수 있다. 그러나 꿈은 어디까지나 꿈이요, 결코 현실은 아니다. 이데아에 대한 꿈과 이상에 대한 도취는 현실의 대지로 돌아와야 한다. 꿈은 깨어야 한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위대한 여러 사상가들이 고독을 사랑하고 고독한 애찬하였다. 고독은 그들에게 있어서 진지한 사색을 위한 정신의 터전이었다. 니체는 '고독은 나의 고향이다'라고 하였으며, '진리는 호의에서 착상된다'라고 하였다. 니체는 고독한 산보 속에서 사상의 영감을 받았다고 한다. 칸트도 또한 그러했다. 그의 줄기찬 철학적 사색은 케니하스베르크의 고적한 숲 속을 조용히 산보하는 가운데에서 이루어졌다. 네덜란드의 철인 스피노자는 홀로 렌즈를 닦으면서 사색을 연마하지 않았던가.

인간의 성격을 형성하는 데는 사회적 분위기가 필요하다. 사람의 인품은 타인과의 접촉에서 연마되고 원만해진다. 모가 진 돌멩이들이 서로 부딪쳐서 둥그런 자갈이 되듯이 규각을 가진 인간은 상호 접촉하는 가운데서 원만한 성격이 형성된다.

그러나 사색에는 고독의 분위기가 필요하다. 그러기에 괴테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인간은 사회 속에서 사물을 배울 수 있다. 그러나 영감을 받는 것은 오직 고독 속에서다.' 그러나 인간은 결국 고독 속에서 벗어나 현실의 생활로 돌아와야 한다. 인간은 어디까지나 남과 교통하는 사회적 실존이다. 우리는 사색을 위해서 가끔 고독의 세계를 갖는 것은 좋으나 고독 속에서는 살 수 없는 존재이다. 나와 너와의 생명적 공감의 따뜻한 인간적 대화 속에서 우리는 행복할 수 있고 생의 보람을 느낄 수 있다. 고독은 정신의 산책처지 영원한 안식처는 절대로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또한 알아야 한다. 그러므로 아리스토텔레스가 갈파한 바와 같이 '완전한 고독 속에서 혼자 살 수 있는 것은 야수나 신뿐이다.'

'네 영혼은 피로하거든 산으로 가라'라고 독일의 시인은 노래했다. 우리는 사색과 자기 성찰을 위해서 고독한 환경을 가끔 택하는 것은 좋다. 그러나 고독은 우리의 안식처는 아니다. 독일의 시인 뤼케르트는 '고독 속에서 살아라'고 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말하기는 쉬운 일이지만 실천하기는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정말 고독 속에 혼자 견딜 수 있는 사람은 진정한 거인이요, 정신력이 비상하게 강한 인간이다. 문호 입센이 말한 것처럼 '이 세상에서 가장 강한 인간이란 고독한 인간이다.' 산에 가면 거리가 그립고 거리에 있으면 산이 그리워진다. 자연 속에 있으면 문명이 그립고 문명 속에 있으면 자연이 그리워지는 것이 사람이다. 고독도 그와 비슷하다. 혼자 있으면 사람이 그리워지고 사람 속에 있으면 고독이 그리워진다. 청년들은 고독을 사랑한다고 한다. 그러나 청년의 고독은 흔히 감상주의로 미화된 고독인 경우가 많다. 그들은 고독에 대한 향수를 좋아하는 것이다.

니체나 레오나르도 다 빈치와 같은 정신적 거인만이 진정한 고독에 견딜 수 있었다. 청년의 고독은 애상과 낭만이 짝짓는 세티멘털리즘이라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우리는 홀로 있을 때 고독할 뿐만 아니라, 알지 못하는 군중 속에 섞일 때 더 한층 고독을 느낀다. 서로 따뜻한 대화를 잃어버릴 때 인간은 고독한 것이다. 낯선 군중들 속에서 스스로를 이방인처럼 느낄 때 우리는 고독의 비애를 느낀다. 현대인에게는 이러한 고독이 더욱 심해진다. 홀로 있어서 외로운 것이 아니라 많은 군중들 속에서 대화할 벗이 없기 때문에 고독한 것이다. 고독 속의 고독보다도 군중 속의 고독이 더욱 외로운 것이다.

생각하는 갈대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프랑스의 근대 합리론 철학자 데카르트의 이 말은 인간의 본질과 핵심을 드러낸 명언이다. 인간을 동물의 질서에서 엄연히 구별하는 근본 특색은 생각하는 능력에 있다. 인간은 사고하는 존재자다. 동물은 본능적 충동으로 살아간다. '먹고 자고 생식하고 죽는다.' 동물의 생은 이 네 개의 단어로 요약된다.

그러나 인간은 살면서 생각하고 생각하면서 살아간다. 생각하는 것은 이성의 능력이요, 양식의 기능이다. 이성은 인간이 날 때부터 갖고 있는 자연의 빛이다. '양식은 이 세상에서 가장 공평하게 되어 있다.' 데카르트 철학의 명저 "방법 서설"의 제일 서두에 나오는 유명한 말이다.

데카르트가 여기서 말하는 양식, 즉 봉상스란 곧 이성을 의미한다. 데카르트에 의하면 모든 인간에게는 날 때부터 이성이라는 자연의 빛이 가장 공평하게 분배되어 있다. 이성이란 '사물을 바로 판단하고 거짓을 분별하는 능력'이다. 우리는 이성이라는 능력을 올바로 사용하여 사물에 대해서 옳고 그른 판단을 똑똑히 가져야 한다. 생각하지 않는 머리는 머리가 아니다. 바로 사색하고 옳게 판단할 줄 모르는 이성은 이성이 아니다. 이성의 이성다운 속성은 '생각하는 힘'에 있다. 진리와 허위를 올바르게 판단하는 것이 이성의 생명이다. 사색하는 능력과 이성의 빛에서 인간의 본질을 찾으려고 한 데카르트의 호모사피엔스의 인간관은 분명히 인간의 핵심을 드러낸 것이다. 우리는 데카르트와 더불어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라는 말을 다시 한 번 강조해서 선언하지 않을 수 없다.

인간이 생각하기를 그만둔다면 그는 인간의 본질을 포기하는 것이다. '코키토 에르고 숨'은 인간이 인간임을 당당하게 선언하는 말이다. 데카르트와 거의 비슷한 사상을 우리는 파스칼에서 본다. 파스칼은 데카르트보다 27년 후에 출생해서 12년 후에 별세하였다. 인간을 '생각하는 갈대'라고 말한 파스칼의 말은 너무나 유명하다. 인간은 바람에 나부끼는 갈대처럼 지극히 약한 존재다. 그러나 인간은 생각하는 갈대다. 생각하는 힘이 인간을 위대하게 한다. 인간의 품위는 생각하는 점에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옳게 생각하도록 힘써야 한다고 파스칼은 주장했다. 파스칼의 "팡세"에서 사색에 관한 유명한 단장을 몇 개 인용해 보기로 한다.

'인간은 한 개의 갈대에 지나지 않는다. 자연 속에서 가장 약한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생각하는 갈대다.' '사색이 인간의 위대성을 이룬다.' '나는 손도 발도 머리도 없는 인간을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생각하지 않는 인간을 생각할 수는 없다. 그런 것이 있다고 하면 돌멩이나 짐승일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모든 품위는 생각하는 데 있다. 그러므로 잘 생각하기로 힘쓰자. 이것이 도덕의 원리다.'

분명히 인간의 인간다운 품위와 존엄성과 위대성은 인간이 이성을 갖고 생각하는 점에 있다. 파스칼이나 데카르트는 누구보다도 그것을 강조하고 선언한 사상가들이다.

그러나 나는 현대인의 사색에 관해서 하나의 위기를 지적하고 싶다. 현대인은 매스컴의 위력에 눌려서 자기 머리로 끈기 있게 생각하는 자주적 사고력을 점점 상실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매스컴의 복잡한 체계 속에서 살고 있다. 매일같이 신문을 읽어 보아야 하고 라디오를 들어야 하고, 또 TV와 마주 앉고 영화를 보게 된다. 날마다 새로운 지식을 흡수하고 외부에서 강한 자극을 받는다. 사물에 의해서 나의 사색을 정리하고 나의 판단을 갖기 전에 남의 판단을 받아들이고 남의 의견을 읽게 된다. 우리의 머리는 자주적으로 생각하는 기관에서 수동적으로 받아들이는 기관으로 전략하기 쉽다. 생각하는 갈대에서 감각하고 수용하는 갈대로 변질한다.

현대인은 자기의 머리로 줄기차게 사색하는 습관과 능력을 잃어버리기 쉽다. 우리의 머릿속에는 '지식'은 많아도 '지혜'는 적다. '의식의 과잉'과 '예지의 빈곤'이것이 현대의 지식인이 빠지기 쉬운 결합이다. 남의 판단과 의견을 비판과 사고 없이 받아들이는 것은 정신의 노예요 사상의 종이다. 우리는 자기의 머리로 생각하고 자기의 판단과 의견을 가져야 한다. 옛날의 철학자들처럼 스스로의 머리로 줄기차고 끈기있게 사색하는 습관과 능력을 길러야 한다. 그러기에 철인 칸트는 청년들에게 언제나 다음과 같은 경고를 잊지 않았다. '스스로 사색하고 스스로 탐구하고 자기 발로 서라.' 이것은 사색에 관한 귀중한 헌장이요, 계명이 아닐 수 없다.

생을 위한 사색
우리는 사색에는 반드시 내용이 있어야 한다. 사색은 언제나 무엇에 관한 사색이다. 무를 사색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내용이 없는 사색은 공허하다. 젊은 생명은 무엇을 위해서 사색해야 할 것인가. 청년은 인생의 제 2의 탄생의 시절이다. 청년의 눈은 밖에서 안으로 향하고 남에게서 나에게로 향하고 외적 대상에서 내적 자아로 향해야 한다. 청년의 사색의 초점은 주체적 자아의 자각과 확립에 있다. 내가 나를 알고 내가 나를 발견하고 나를 바로 일으켜 세우기 위해서 우리는 사색하는 것이다.

자아의 발견과 자아의 충실은 청년의 사색과 관심의 중심 목표가 되지 않을 수 없다. 22세의 젊은 키에르케고르는 그의 일기에 다음과 같이 썼다.

'어린이가 주위에서 자기를 구별하여 자아에 각성하게 되려면 상당한 세월이 필요하거니와 높은 정신생활에 있어서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나는 이제야말로 참된 의미에 있어서 자아에 각성하고 깊은 의미에서 나라고 부를 수 있다. 지금까지 나에게 결핍되었던 것은 나는 무엇을 해야 하느냐고 자각하지 못한 점이었다. 제일 중요한 것은 내가 무엇을 하기를 신은 바라고 있느냐. 그것을 위해서 내가 죽고, 또 내가 살 수 있는 그러한 이념을 발견하는 것이다. 우리는 무엇보다도 자기 자신을 알아야 한다. 나는 이제야말로 자아의 눈이 떴다. 나는 두려워하지 않고 나 자신을 물끄러미 들여다보고 진지하게 행동하련다.'

고독과 성실의 실존 철학자 키에르케고르가 자아의 발견을 위해서 얼마나 진지하게 사색했는가를 엿볼 수 있는 유명한 구절이다. 어린아이가 '이것은 나의 집이다. 나의 손이다'하고 '나'라는 말을 쓰려면 여러 해가 걸린다. 자아의 발견과 자아와 타아의 구별은 어린애에게 대단히 중요한 정신적 사건이다. 높은 정신생활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우리가 마음 속 깊은 자각에서부터 '나는 나다'하고 자아에 각성한다는 것은 인간의 진정한 의미에서 인간이 되는 것을 의미한다. 자아의 탄생은 깊은 의미에서 진정한 인간의 탄생이다. 그것은 나다운 '나'가 태어나는 것이요, 본래적 자기가 탄생하는 것이다. 키에르케고르에 의하면 인생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자기 자신을 아는 일이다. 그것을 그리스어로 옮기어 '그노티 세아우톤'이라고 일기에 썼다. 영어로 옮기면 'Knowtheself'다.

옛날 그리스의 델포이의 아폴로 신전의 대리석 벽에는 그노티 세아우톤 즉 '너 자신을 알라'라는 인생의 금언이 조각되어 있었다. 이 말을 철학적으로 말하면 '자아를 자각하라'는 것이다. 청년들의 사색의 목표는 자각에 있다. 자기 자신을 알기 위해서 사색하는 것이다. 그러면 '너 자신을 알라'는 말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며, 또 의미해야 하는가? 그것은 한 마디로 말해서 자기의 사명을 자각하는 것이다. 자기가 인생에서 해야 할 사명을 바로 깨닫는 것이다. 키에르케고르의 일기에 의지해서 설명하면 내가 그 때문에 살고 또 그 때문에 죽을 수 있는 인생의 이념을 발견하는 일이요, 신 또는 하늘이 나에게 정말 바라고 있는 것을 스스로 깨닫는 일이다. 인간은 사명을 느끼는 존재요, 사명을 위해서 사는 존재다. 인간은 사명을 자각할 때 위대해진다. 인간은 사명적 존재다.

우리는 이 역사적 현실 속에 내던져졌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는 또한 내던지는 자유를 갖는다. 우리는 이 세상에 무엇인가 보람과 빛을 던져 던지는 자유를 갖는다. 우리는 이 세상에 무엇인가 보람과 빛을 던져야 하고, 또 던질 수 있는 존재다. 인생은 가치를 창조하고 자아를 실현하려는 노력이다. 저마다 자기다운 천분을 발견하고 그것을 키우고 발휘하기 위해서 우리는 이 세상에 태어났다. 인생의 진정한 행복은 자아를 실현하고자 자기의 천분을 마음껏 발휘하는 데 있다. 영국의 사상가 존 스튜어트 밀이 말한 것처럼 '행복을 얻는 유일한 길은 행복을 인생의 목적으로 삼지 말고 행복 이외의 다른 목적물을 인생의 목적으로 삼는 데 있다.'

높은 이상의 실현을 위해서 밤낮으로 헌신 몰두할 때 우리는 삶의 보람을 느낄 수 있고 인생의 의미를 찾을 수 있다. 인생은 곧 창조다. 우리가 산다는 것은 저마다 무엇인가를 창조하는 것이다. 우리는 이 세상에 왔다 가는 이상 사회에 무엇인가를 남기고 가야 한다. 나의 피땀과 노력으로 인해서 사회의 한구석이 밝아지고 역사의 한 모퉁이가 달라져야만 할 것이다. 인생을 성실한 창조의 일터로 생각하고 그것을 위한 준비를 할 때가 곧 청년 시절이다. 사람은 모두 자기다운 방식으로 천분을 갖고 있다. 둥근 돌멩이는 둥글어서 쓸데가 있고 모난 돌멩이는 모가 나서 쓸데가 있듯이 사람은 각자 개성적 천분을 지닌다. 우리의 할 일은 그것을 올바로 발견하고 꾸준히 키우고 보람 있게 발휘하는 것이다. 사명이란 하늘이 나에게 보낸 명령이요 목숨이다. 그것을 다하는 것이 우리의 할 일이다.

인간은 높은 사명을 자각할 때 생활에 일관한 목표가 생기고 정신의 확고한 자세가 선다. 행동의 뚜렷한 원칙이 생기고 튼튼한 신념이 박힌다. 인간은 높은 사명에 살 때 비로소 악의 유혹을 물리칠 수 있고 불의의 타락 속에 전락되지 않는다. 진실로 인간을 위대하게 만들고 인생에 보람을 주는 것은 높은 사명의 자각과 실천이다. '너 자신을 알라'는 것은 '너 자신의 사명을 알라'는 뜻이다. 자아의 자각은 자기의 사명의 자각이다. 젊은이의 사색은 오로지 여기에 집중되지 않으면 안 된다. 프랑스의 유명한 생의 철학자 베르그송은 '사색인으로서 행동하고 행동인으로서 사색해야 한다'고 말하였다.

인간은 사색한다. 그러나 사색은 사색을 위해서 사색하는 것은 아니다. 사색은 행동을 위한 것이다. 행동하기 위해서 우리는 사색한다. 옳게 행동하려면 옳게 사색해야 한다.

사색이 없는 행동은 혼돈과 방향 상실의 행동이 되기 쉽고 행동이 없는 사색은 공허와 현실 유리의 사색이 되기 쉽다. 모두가 불완전함을 면치 못한다.

중국의 저명한 유가 사상가 왕양명이 이미 갈파한 바와 같이 지는 행의 시초요, 행은 지의 이루어진 것으로서 지행은 합일해야 하는 것이다. 사색은 행동의 원동력이 되고 행동은 사색의 결정체가 되어야 한다. 옳은 사색에서 옳은 행동이 나오고, 옳은 행동은 사색을 전제로 한다. 우리는 저마다 옳게 살기 위해서 옳게 사색하기를 힘쓰자.


안병욱(1920~2013): 철학자. 수필가. 평남 용강 출생. 일본 와세다 대학 철학과 졸업. '사상계' 주간, 숭실대 교수 역임. 삶의 길잡이로 또는 사상의 안내자로 많은 젊은 독자들을 확보하고 있는 인물이다. "현대 사상" "사색인의 향연" "철학 노트" "알파와 오메가" 등 많은 저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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