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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골의 아침은 제주도에서 온 배가 닿은 항구만큼 시끄럽다. 어스레한 박명 속에서 감자밭이 모습을 드러낼 즘 뻐꾸기, 산비둘기, 방울새, 곤줄박이 이름도 알 수 없는 새들이 뽕나무 가지 사이에서 뭐라고 뭐라고 조잘거린다.

도시 사람들은 산골에 살면 촉촉한 감정이 되살아나 낭만이 뚝뚝 떨어질 거로 생각할지도 모른다. 먹을 것도 마냥 있고 하늘도 마냥 푸르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밤꽃이 자지러지게 피면 아무 데나 똥을 싸는 새들이 슬슬 나의 부아를 돋운다. 새들과 쌈박질하면서 여름을 보내는 엉덩짝 펑퍼짐한 아줌마가 있다는 것을 사람들이 좀 알아주었으면 좋겠다. 빨래에다 방정맞은 초랭이처럼 똥을 싸놓고선‘나 잡아봐라.’삐융 날아간다. 머리를 찧고 싶다. 산뜻이 저기 박달나무에 둥지를 틀면 여북 좋을까만 내 집 서까래에 둥지를 튼다. 놈들이 한 번 떴다 하면 툇마루는 지푸라기와 똥으로 초토화된다. 거무죽죽한 똥이 나무에 스며들어 얼룩이 생기고 철판 수세미로 문질러도 지워지지 않는다. 완전지대를 찾아온다고 왔으나 나는 흥부가 아니라는 말이다.

자로 잰 듯 균형 잡힌 도시 생활은 나와 맞지 않았다. 생生은 열리지 않는 판도라 상자였다. 부모님의 유산도 없고 성공할 기회도 주어지지 않았다. 버들같이 가는 허리에 야들야들 나부끼는 실크 원피스를 호리 낭창 걸치고 명동거리 한번 누벼보지 못했다. 태풍이 불어도 끄떡하지 않을 내 허리둘레는 삼십 이 센티였으며 내 차는 고물이었다. 상수리나무와 억새와 도깨비바늘이 허리에 감기고 풀벌레들이 그악스럽게 울어대는 골짝으로 일찌감치 들어왔다. 해는 나를 중심으로 떠오르고 지며 역사의 중심에 내가 있다. 날마다 듣는 건 솔바람 소리요 마주하는 건 심연 같은 고요함이다. 무슨 대순가.

자갈 속에서도 애기똥풀은 막무가내로 꽃을 피우고야 만다. 살고픈 대로 산다. 욕망에 정직하며 내면에 집중한다. 여름만 되면 이놈의 자식들이 나를 성가시게 하니 골칫거리다. 그냥 대충 수월히 넘어갈 일이 아니다.

나의 지인인 그는 일본 여행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공항을 늦게 도착할 수밖에 없었다. 이대로 가다가는 비행기를 놓치고 만다. 한국에 있는 딸에게 전화를 건다. 그의 딸은 한마디로 항공사가 비위를 거스르면 불이익을 당할 만큼 잘나가는 인간이었다. 그날 비행기는 십 분 늦게 떴다. 이 시대 권력은 날아가는 새를 떨어뜨리는 것이 아니라 뜨는 비행기를 막아 버린다. 그가 지랄 같게 부러웠다. 열등감이란 막대기가 속을 긁어댔다. 어둡고 뻥 뚫린 공허감이 고개를 쳐든다. 뜨는 비행기는 놔두고라도 도시가 나를 궁벽한 산골로 내쳐버리듯이 새집이라도 한 번 부숴봤으면….

앞뜰과 뒤란, 서까래까지 샅샅이 뒤져 인정사정없이 무차별 공격할 것이렷다. 일의 시작은 우당탕 때려 부수던가 싹싹 쓸어버리기다. 예언자 같은 엄숙한 얼굴을 하고 눈을 까뒤집었다. 소매를 훌훌 걷어붙이고 장대 빗자루를 들었다. 일종의 통일된 정신과 긴장된 자세가 요구된다. 옳다구나, 오늘 너, 잘 걸렸다. 쌓아 놓은 연탄이 무너지듯 아직 알을 낳지 않은 새집 두 채가 폭삭 무너졌다. 정복자와 피정복자의 관계, 약자를 강탈하는 강자의 쾌감이란 이런 것이런가. 내가 지금 무엇을 하고 있다는 걸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다는 생각이 들자 간질간질 재밌어 죽을 지경이었다.

한데, 이게 웬일인가. 오장육부를 물에 헹궈낸 듯 시원하여 득의의 미소를 짓고 있는데 신발장에서 새 한 마리가 푸드덕 날아오른다. 하고많은 자릴 놔두고 하필이면 운동화 속에다 둥지를 틀어 알을 까놓았다. 지금보다 더한 위험에 놓일지라도 항복하지 않을 테다. 어디도 가지 않고 이 한자리에서 주어진 그대로 살겠다는 시위 같았다. 언젠가 비행기 좌석에서 호기심으로 리모컨을 누르고 보았더니 스튜어디스를 부르는 장치였던 때만큼이나 당혹스러운 순간이었다. 내 아무리 악다구니가 세고 육이오사변을 겪고 난 나일론 양말처럼 질긴 인간일지라도 생명 앞에서는 어쩌지 못한다.

지상의 모든 존재는 밑도 끝도 없이 아득한 생에 유배당한 자들이다. 끝없이 빗나가기만 하는 희망을 찾아 눈보라 치는 벌판을 헤매는 노숙자들이다. 돌이킬 수도 피할 수도 없으니 오직 살아내야 한다. 고난만 있는 것은 아니다. 내일은 내일의 태양이 뜬다. 생이란 정복되지 않은 신비가 있으니 의연한 척 씩씩한 척 살아갈 수밖에 없다. 엄밀히 따지면 숲은 새들의 세상이다. 날개를 접고 돌아간 새들이 암컷을 꼬셔와 보듬어 핥고 제 새끼 낳아 살지 않는다면 여름은 없다. 여름이 없으면 인간도 산에서 생존하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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