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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존과 초월, 주체와 타자, 안과 밖, 정신과 몸, 모든 경계에 이를 때 우리는 문을 통해 넘나들고 때로 양존하는 순간을 맞기도 한다. 그래서 세계는 온통 문이다.
그 문들을 통해 한 세계에서 다른 세계로 가는 길 또한 무수히 많다. 우리는 수많은 문을 통과하며 살아가지만 똑같은 문은 없다. 같은 문을 통과해도 그 경험은 매 번 다르다. 매 순간 변화하는 세계의 사물들은 비슷한 것 같아도 모두 다르기 때문이다. 한 사람의 긴 생의 여정에서, 크고 작은 통과제의를 거칠 때마다 문을 통하지만 우리는 자신이 드나들었던 문들을 일일이 기억하지 못한다. 다만 그 길을 지나며 변화하고 나아갈 뿐이다. 때론 기억하지 못한다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이던가.
사립문(대문)
동짓달 깊은 밤, 꿈결인 듯 잠에서 깨어나다 사립문 여닫히는 소리를 듣기도 했다. 귀를 기울이면 문을 흔들고 지나가는 바람의 소리도 함께였다. 아침에 보면 사립문은 밤새 내린 눈을 맞아 몇 차례 바람결에 털어내기를 반복하면서도 의연히 제 자리에 서 있었다.
어린 시절, 마루에 걸터앉아 두 다리를 흔들며 들일 나가신 어머니를 기다리며 하염없이 바라보는 것이 사립문이었다. 어머니는 그 작은 문을 열어 나가셨고, 그 문을 통해 들어오실 테니까. 그리 높지도 않고 넓지도 않아 누구나 그 너머를 들여다보고, 건너다니고 여닫을 수 있는, 있으나 없으나 별무소용인 것 같은 문이었다. 공간적으로 안과 밖의 경계를 가지고 있으나 오히려 양쪽이 다 공유해도 좋은, 사립문만의 열린 세계였다. 사물이라는 실체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 너머의 대상까지 넘나들 수 있는 통 큰 자유를 가진 문이었다.
싸리나무는 7월 즈음, 주로 보랏빛의 애잔한 꽃을 피운다. 꽃이 지고 가을이 되면 어른들을 싸리나무를 베어 새로운 사립문을 세웠다. 이를테면 싸리로 만든 사립문의 수명은 거개가 1년인 셈. 1년이 지나면 비바람, 눈보라에 낡아 엮였던 새끼줄이 끊어지고 매듭이 풀려 사립문은 모양이 일그러지고 구멍도 생겨 존폐위기에 처하게 된다. 문틀 자체가 굵은 대나무나 고만고만한 통나무를 양쪽에 세워놓고 싸리문짝을 매달아두기 때문에 정밀하거나 튼튼함과는 거리가 멀기 때문이다. 그래서 1년쯤 지나면 그 작은 문이 더 허술해져 개들도 드나들 구멍이 생긴다.
사립문이야 애초 내 집 마당에 들어서는 사람을 감시하거나 막아보겠다는 의도는 꿈에도 없었다. 이 집은 내 집이니 그리 아시오, 정도의 자기 영역 표시가 전부였다. 살짝 닫아두거나 열어두는 차이로 집에 사람이 있거나 외출중이라는 의사나 전달해주면 그 역할이 다였다. 그러니 타인을 경계하거나 밀어내겠다는 의도는 애당초 없었다. 그래서 지나는 사람이 맘만 먹으면 얼마든지 그 집 안을 다 들여다볼 수 있었다. 어쩌면 누가 봐도 우리는 이렇게 사요, 라고 자신의 일상을 투명하게 드러낼 만큼 정갈한 시대의 산물이었을 것이다. 식구들이 마루에 앉아 밥을 먹고, 마당에 널어놓은 덕석의 농작물을 흘깃거리고, 빨랫줄에 널어놓은 옷으로 며느리 솜씨를 훔쳐보고, 잿간에서 괴춤을 올리며 나오는 주인도 볼 수 있었으니, 그저 사람 사는 모습을 그대로 다보여도 되는 시절이었으니.
어찌 사람뿐이랴. 바람이 불면 저절로 닫히고 일 없을 땐 한낮에도 늘 열려 있는 문. 드나들고 싶은 사람은 언제든 드나드시오. 주인과 객이 항상 자유로우니 문도 자유로웠다. 그러니 열리고 닫힘에 제약이 없고 모두 품어 안았다. 이를테면 경계 없음, 무장해제였다.
이제 세월 따라 사립문의 숙명도 바뀌었다. 싸리꽃 만발하던 고향 산천도 변했지만 그 사립문 자리엔 햇빛에 광택을 뽐내는 파란 페인트를 입은 대문이 떡 버티고 있다. 어디 변한게 문 뿐이랴. 내 유년의 내력을 죄다 꿰고 있던 잎이 무성했던 감나무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고, 그 감나무로 대신했던 담은 벽돌이 쌓여져 있다. 내 청년기까지만 해도 울도 담도 없어 마루에 앉아 시선을 멀리 두면 바다는 밀물 썰물에 몸살을 앓으면서도 시침 떼는 모습이 그림처럼 고요히 두 눈에 담겼는데, 이제는 삼면으로 둘러쳐진 시멘트 담벼락에 가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오직 벽돌 담장 사이로 햇살에 반사된 파란 대문이 그 위용을 뽐내고 있을 뿐이다.
파란 대문과 함께 그곳을 드나드는 사람들의 마음에는 벌써부터 담이 쳐지고 문이 닫히고, 잠금장치도 걸어졌을 것이다. 경계 태세 완료, 외부인은 함부로 드나들지 마시오를 상징하는.
그곳을 탯자리로 살았던 사람들의 역사가 사라지듯, 생겨나고 스러져가는 것의 순환을 누가 막을 수 있겠는가. 다만 오랜 시간 내 기억에 존재해 있던 사립문의 자유를 구가하던 내가 스스로의 경계를 풀고 파란 대문을, 내 의식의 문으로 받아들이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흘러야 할 것만은 분명하다.
일주문
어느 사찰이든 일주문 없는 절은 거의 없다. 세간 집의 대문처럼 사찰에 들어가려면 일주문을 통해야 한다. 그래서 절집에 들어서는 이들에겐 통과제의의 제1관문이라고 한다. 일주문 안과 밖은, 세간과 출세간의 경계지점이다. 그 문을 지나며 세간의 시끄러움이나 알음알이들을 하나씩 내려놓는다. 절집의 예법대로 고요하게 비우고 내려놓기를 염원하는 것이다. 그렇게 얇은 허물벗기를 통하면 조금씩 산과 자연과 우주가 하나임이 마음에 들어오기 시작한다. 자신 안에 꽉 차 있던 공간이 조금씩 자리를 비워가며 새로운 세계가 자리바꿈을 하게 된다. 그래서 스님들은 일주문을 통과하면 혈육까지도 잊지 않으면 안 된다 했던가. 일주문을 경계로 차안에는 온갖 상像으로 이루어진 현상적 세상살이가 있고, 피안에는 그 상을 지워가며 본질을 찾아가는 초월과 이상의 세계가 존재한다.
그런 알음알이 때문인가. 가끔 처음 들어서는 사찰의 일주문을 통과하면서도 기시감에 몸이 오싹해지곤 한다. 세속에서 살면서 비바람 들이치지 않게 마음자락 단단히 단속해도 놓치고 마는 생의 비의 같은 것, 어쩌면 그것들이 운명처럼 다가드는 순간일지도 모른다.
모든 문이 그렇듯 일주문도 상징적 통과의례의 문이다. 그래서 일주문 안에는 세간을 지향하는 이들과 출세간을 지향하는 이들이 모일 수 있는 공간이 된다. 부처와 중생이라는 경계를 무너뜨리고 잠시 자신을 놓을 수 있는 곳이 절간이니. 깨달으면 피안이 되고, 현실의 벽에 갇혀 허우적거리면서도 그 삶을 놓지 못하면 차안의 사람이 된다. 누가 피안을 원하지 않으랴. 각자 제 삶의 무게가 무거워, 카르마의 두께가 두터워 피안의 세계에 한 발 다가서지 못하는 것일 뿐. 마음 한 번 돌이키면 자유를 구가할 수 있다 했는데, 본래 면목 찾아가는 마음의 일주문을 쉽게 넘어서지 못한다. 폭염의 삼복더위에 세간 일일랑 잠시 내려놓고 일주문 안 절집 도량에 앉아, 몸과 마음을 부려놓고 시원으로의 여행 길 나서보고 싶다.
내 안의 문
한 사람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문은 자신 안의 문이다. 이름 하여 이니시에이션. 누구나 태어나서 죽음에 이를 때까지 알게 모르게 수많은 성장의식을 치르게 되는데 그 문은 숙명처럼, 일생 동안 지나야할 과제이며 또 응당 거쳐야 하는 의례이기 때문에 피해갈 수도 없고 피해서도 안 되는 마음의 문이다. 사람은 수많은 관계 속에서 많은 경험을 하며 사는 동안 보이지 않는 문들을 다 지나쳐야 하기 때문이다. 똑같은 사건을 맞으면서도 누구는 절규하고, 누구는 아프지만 의연하게 받아들기도 한다. 아픔이라는 문의 크기는 같은데 그 문을 통과하는 사람의 마음 크기에 따라 다르게 맞아들여서다. 생의 변곡점에서 누구나 통과 제의의 문을 마주치지만 각자 자신이 가진 것만큼 자유롭게 열어줄 수도 있고, 폐쇄시킬 수도 있다. 간혹 어떤 이는 꼭꼭 닫아걸어 자신 속에 가두고 살기도 한다.
일생 동안 우리는 수없이 많은 이니시에이션을 지혜롭게 지날 때 삶도 성숙해진다. 따라서 이 마음의 문은 가장 솔직하게 그 사람을 그대로 반영하며 가시적으로 보이는 수많은 문들보다 더 복잡하고 중요하다. 어쩌면 숙명처럼, 한사람의 모든 생각과 행위의 총체를 이끌고 있기 때문이다.
자신을 잘 아는 이는 진정 자유로운 문으로 향하는 길목을 알고 있다 할 것이다. 자신 안에 있는 수많은 문들의 문턱 높낮이를 가늠할 줄 아는 이는 자신의 삶으로부터 단단해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유를 꿈꾸고 그 자유를 찾아 누릴 줄 안다. 누구나 자유를 찾고자 하면서 나아가지 못하는 모순은 인간의 역사를 거듭하며 자유로부터 너무 멀리 와 있기 때문이다.
사방이 벽으로 가려진 감옥에 살면서도 자유로운 사람이 있다. 반면 드넓은 들판 한 가운데에서도 포박당한 듯 옴짝달싹 하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 공초 오상순은 자유롭게 살았으면서도 죽음에 임했을 때, 넘쳐나는 자유가 오히려 자신을 자유롭지 못하게 했다고 말했다. 기독교인이던 그가 절에 가서 임종을 앞두고 깨달은 자유란 시공간의 자유가 아닌 자신이 지니고 있는 내면의 자유였다. 신을 쫓아 사는 것 도한 종속된 자유라는 것을 그때 깨달았을까. 누구나 품고 있을 내면의 자유는 대상과는 상관없는 문제일 테니까. 타인의 구속은 벗어나면 되지만 자신이 스스로 만든 구속은 어찌할 수 없는 것이니까. 그래서 인간은 스스로를 구속하는 문을 닫아걸고 외로워하는 존재가 아니던가.
자유를 찾아 그 문을 만나길 열망하면서도 자유는 아주 가까이, 자신 안에 있다는 것은 쉽게 통찰하지 못한다. 자기 안의 문을 만나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마음이 자유로운 이는 이미 자신을 아는 사람이며, 아무리 큰 문턱이 앞을 막아도 자유롭게 넘나들 수 있다. 누구나 자신 안의 문은, 수많은 문 중 단연 넘어서기 어려운 문이다. 그렇다면 내 안의 문은 어떤 크기와 어떤 모양으로 존재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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