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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면학의 서 / 양주동

부흐고비 2020. 7. 17. 16:28

독서의 즐거움! 이에 대해서는 이미 동서 전비들의 무수한 언급이 있으니, 다시 무엇을 덧붙이랴. 좀 과장하여 말한다면, 그야말로 맹자의 인생 삼락에 모름지기 '독서, 면학'의 제 4일락을 추가할 것이다. 진부한 인문이나 만인 주지의 평범한 일화 따위는 일체 그만두고, 단적으로 나의 실감 하나를 피력하기로 하자.

열 살 전후 때에 논어를 처음 보고, 그 첫머리에 나오는
"학이시습지 불역열호?"
운운이 대성현의 글의 모두로 너무나 평범한 데 놀랐다.
"배우고 때로 익히면 또한 기쁘지 아니한가?"

이런 말씀이면 공자 아닌 소, 중학생도 넉넉히 말함직하였다. 첫 줄에서의 나의 실망은 그 밑의 정자인가의 약간 현학적인 주석에 의하여 다소 그 도를 완화하였으나 논의의 허두가 너무나 평범하다는 인상은 오래 가시지 않았다.

그랬더니 그 후 배우고, 익히고, 또 무엇을 남에게 가르친다는 생활이 어느덧 2, 30년, 그 동안에 비록 대수로운 성취는 없었으나, 몸에 저리게 느껴지는 것은 다시금 평범한 그 말의 진리이다.

"배우고 때로 익히면 또한 기쁘지 아니한가?"

정씨의 주는 워낙 군소리요, 공자의 당초 소박한 표현이 그대로 고마운 말이 아닐 수 없다. 더구나 현세와 같은 명리와 허화의 와중을 될 수 있는 한 초탈하여, 하루에 단 몇 시, 몇 분이라도 오로지 진리와 구도에 고요히 침잠하는 여유를 가질 수 있음이, 부생 백년, 더구나 현대인에게 얼마나 행복된 일인가! 하물며, 난후 수복의 구차한 생활 속에서 그래도 나에게 삼척안두가 마련되어 있고, 일수의 청등이 희미한 채로 빛을 내고 있으니,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일전 어느 문생이 내 저서에 제자를 청하기로, 나는 공자의 이 평범하고도 고마운 말을 실감으로 서증하였다.

독서란 즐거운 마음으로 할 것이다. 이것이 나의 지설이다. 세상에는 실제적 목적을 가진, 실리 실득을 위한 독서를 주장 할 이가 많겠지마는 아무리 그것을 위한 독서라도, 기쁨 없이는 애초에 실효를 거둘 수 없다. 독서의 효과를 가지는 방법은 요컨대 그 즐거움을 양성함이다. 선천적으로 그 즐거움에 민감한 이야기야말로 다생의 숙인으로 다복한 사람이겠지만, 어렸을 적부터 독서에 재미를 붙여 그 습관을 잘 길러 놓은 이도, 그만 못지않은 행복한 족속이다.

독서의 즐거움은 현실파에게나 이상가에게나, 다 공통히 발견의 기쁨에 있다.

콜럼버스적인 새로운 사실과 지식의 영역의 발견도 좋고, '하늘의 무지개를 바라보면 내 가슴은 뛰노나.'식의 워즈워스적인 영감, 경건의 발견도 좋고, 더구나 나와 같이, 에머슨의 말에 따라, '천재의 작품에서 내버렸던 자아를 발견함.'은 더 좋은 일이다. 요컨대, 부단의 즐거움은 맨 처음 '경이감'에서 발원되어 진리의 바다에 흘러가는 것이다. 주지하는 대로 '채프먼의 호머를 처음 보았을 때'에서 키츠는 이미 우리의 느끼는 바를 대변하였다.

그때 나는 마치 어떤 천체의 감시자가 시계 안에 한 새 유성의 헤엄침을 본 듯, 또는 장대한 코르테스가 독수리 같은 눈으로 태평양을 응시하고--모든 그의 부하들은 미친 듯 놀라 피차에 바라보는 듯--말없이 다리엔의 한 봉우리를.

혹은 이미 정평 있는 고전을 읽으라, 혹은 가장 새로운 세대를 호흡한 신서를 더 읽으라, 각인에게는 각양의 견해와 각자의 권설이 있다. 전자는 가로되,
"온고이지신."
후자는 말한다.
"생동하는 세대를 호흡하라."
그러나 아무래도 한편으로만 기울어질 수 없는 일이요, 또 그럴 필요도 없다.

지식인으로서 동서의 대표적인 고전은 필경 섭렵하여야 할 터이요, 문화인으로서 초현대적인 교양에 일보라도 낙오될 수는 없다. 문제는 각자의 취미와 성격과 목적과 교양에 의한 비율뿐인데, 그것 역시 강요하거나 일률로 규정할 것은 못 된다. 누구는 '고칠 현삼제'를 취하는 버릇이 있으나, 그것도 오히려 치우친 생각이요, 중용의 좋다고나 할까?

다독이냐 정독이냐가 또한 물음의 대상이 된다. '남아수독오거서'는 전자의 주장이나, '박이부정'이 그 통폐요, '안광이 지배를 철함'이 후자의 지론이로되,
'나무를 보고 숲을 보지 못함'이 또한 그 약점이다. 아무튼, 독서의 목적이 '모래를 헤쳐 금을 캐어 냄'에 있다면, 필경 '다'와 '정'을 겸하지 않을 수 없으니, 이것 역시 평범하나마 '박이정' 석 자를 표어로 삼아야 하겠다. '박'과 '정은 차라리 변증법적으로 통일되어야 할 것--아니, 우리는 양자의 기념을 궁극적으로 초극하여야 할 것이다. 소인의 다음 시구는 면학에 대해서도 그대로 알맞은 경계이다.

벌판 다 한 곳이 청산인데,
행인은 다시 청산 밖에 있네.

나는 이 글에서 독서의 즐거움을 종시 역설하여왔거니와, 그 즐거움의 흐름은 왕양한 심충의 바다에 도달하기 전에, 우선 기구, 간난, 칠전팔도의 괴로움의 협곡을 수없이 경과함을 요함이 무론이다. 깊디깊은 진리의 탐구나 구도적인 독서는 말할 것도 없겠으나, 심상한 학습에서도 서늘한 즐거움은 항시 '애씀의 땀'을 씻은 뒤에 배가된다. 비근한 일례로, 요새는 그래도 스승도 많고 서적도 흔하여 면학의 초보적인 애로는 적으니, 학생 제군은 나의 소년 시절보다는 덜 애쓴다고 본다. 나는 어렸을 때에 그야말로 한적 수백 권을 모조리 남에게 빌려다가 철야, 종일 베껴서 읽었고, 한문은 워낙 무사 독학, 수학조차도 혼자 애써서 깨쳤다. 그 괴로움이 얼마나 하였을까마는, 독서 연진의 취미와 즐거움은 그 속에서 터득, 양성되었음을 솔직히 고백한다.

끝으로 소화 일편--내가 12, 3세 때이니, 거금 50년 전 일이다. 영어를 독학하는데, 그 즐거움이야말로 한문만 일과로 삼던 나에게는 칼라일의 이른바 '새로운 하늘과 땅'이었다. 그런데, 그 독학서 문법 설명의 '삼인칭 단수'란 말의 뜻을 나는 몰라, '독서 백편 의자현'이란 고언만 믿고 밤낮 며칠을 그 항목만 자꾸 염독하였으나, 종시 '의자현'이 안 되어, 마침내 어느 겨울날 이른 아침, 눈길 30리를 걸어 읍내에 들어가 보통 학교 교장을 찾아 물어보았으나, 그분 역시 모르겠노라 한다. 다행히 젊은 신임 교원에게 그 말뜻을 설명받아 알았을 때의 그 기쁨이란! 나는 그날, 왕복 60리의 피곤한 몸으로 집으로 돌아와, 하도 기뻐서 저녁도 안 먹고 밤새도록 책상에 마주 앉아, 적어 가지고 온 그 말뜻의 메모를 독서하였다. 가로되, "내가 일인칭, 너는 이인칭, 나와 너 외엔 우수마발이다 삼인칭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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