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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자고 가래이 / 박양근

부흐고비 2020. 7. 22. 17:05

그날은 당일로 돌아올 기차표를 끊지 않았다. 큰집에 갈 때면 늘 당일치기로 돌아오곤 했고 제삿날에는 늦은 밤차를 타고 내려왔다. 다음 날의 출근이 조금은 부담스럽기도 하지만 특별한 일이 늘 가로막은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자고 와야겠다고 내심 작정했다.

부산으로 내려온 지 어언 스무 해가 넘는다. 그동안 가족 사정도 많이 바뀌었다. 형제들은 하나 둘 분가를 하였고, 무엇보다 집안 대주가 수를 다하면서 집안이 휑하니 빈 듯해져 버렸다. 당연히 어머니 혼자 집을 지키게 되었다. 어머니는 아직은 나다닐 정도여서 자식들에게 의탁하지 않아 마음 편하다고 말씀하신다. 그러면서 가족들이 밀물처럼 밀려왔다 썰물처럼 빠져나가는 명절의 소동을 묵묵히 지켜보고 계신다.

어릴 때의 일이다. 당시 여름철에는 모기가 유달리 극성스러웠다. 에프킬러나 모기향이 없어 모기장만이 유일한 방충장비였다. 가장자리를 맡아야 하는 경우에는 모기떼의 희생양이 되기 일쑤였던 만큼 형제들은 가능한 모기장 가까이 누우려 하지 않았다. 어쩌다가 모기 한두 마리가 찢어진 틈을 뚫고 들어와 종횡으로 누비면서 포식을 할 때면 여름 하늘을 지나가는 쌕쌕이 소리만큼이나 날카로웠다.

그러다보면 잠이 들어버린다. 어디선가 선선한 바람이 밀려와 눈을 떠보면 어머니가 부채를 들고 모기장 밖에서 모기를 쫓고 있었다. 한밤중 대청마루에 앉아 부채질하는 어머니의 뒤로 은하수가 길게 흐르고 앞마당의 감나무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어떤 때는 뿌연 새벽이 되도록 부채질로 모기를 제 편으로 부르고 계셨다. 어깨가 턱 벌어진 자식이 되어도 어머니의 눈에는 모기에게 무방비로 공격받는 어린 아이로 보였던가보다. 그 여름밤 풍경은 내가 대학교에 들어가서도 이어졌다.

며칠 전 할머니 제삿날이었다. 제수준비가 어떤지 전화를 드렸다. 겸사하여 모임이 생겨 시간에 맞춰 올라가겠다고 하니 조심스럽게 덧붙이신다.

“자고 가래이.”

순간 가슴에 흰 바람이 불었다. 일전에도 자고 내려가라는 말씀을 서너 차례 하셨지만 청개구리마냥 훌훌 내려왔다. 다음날 회의가 있다는 핑계였지만 아침 열차를 타면 굳이 안될 일도 아니었다. 이제는 내 집안이 곱살맞은 것도 아닌데 바쁘다는 핑계가 나도 모르게 입에서 또 튀어나왔다.

몇 년 전까지 그런 말을 하지 않으셨다. 자식이 바쁜 나이 줄에 접어들었다는 사실을 뻔히 아는 터라 제사가 끝나면 정성스럽게 음식을 싸서 손에 쥐어줄 뿐이었다. 그 어머니가 이제 투정하듯 자고 가란다.

3년 사이에 어머니는 퇴행성관절염으로 양쪽 무릎을 두 차례에 걸쳐 수술을 받았다. 적잖은 자식들을 업고 안아 키우느라 양쪽 무릎이 활처럼 휘어져 제대로 걸을 수 없게 되었다. 싫다는 어머니를 간신히 설득하여 교정해 드렸더니 무척 기뻐하면서 나들이를 여간 조심하는 게 아니다. 아파트 경로당을 오가며 소일하는 시간을 빼면 거의 집안에서 보내는 셈이다. 그 적적함을 누군들 쉽게 이겨낼까 싶다.

아예 왕복열차표를 예매했다. 돌아오는 시간은 다음날 아침시간으로 했다. 마음이 느긋해졌다. 이제 얼마가 남아 있을지도 모를 여생을 손꼽아보면 마주할 수 있는 시간이나 횟수가 너무나 짧고 적다. 지난주까지만 해도 당일에 돌아오려고 하였는데 내 맘이 왜 바뀌었는지 뚜렷한 이유가 생각나지 않는다.

며칠 전 직장 동료가 사고로 세상을 떴다. 장남인 그 친구는 마흔 여덟의 나이였다. 친구의 장지까지 따라온 여든 셋의 모친은 붉은 묘지를 빙빙 돌며 몸을 가누지 못한 채 호곡을 하였다. “아까바라”라는 피맺힌 곡소리는 날래 쉬어버렸고 무심한 까치도 덩달아 울어댔다. 그날 가장 서러운 사람은 그의 어머니였다.

제사가 끝나고 멀리 사는 형제들이 뿔뿔이 돌아갔다. 회사에 근무하면 출퇴근 시간에 매여지지만 학교에 근무하면 출근을 강의시간에 맞출 수 있는 이점은 누리게 된다. 그런 여유를 가진 사람은 집안에서 나 밖에 없다. 그런데도 지금까지 그 여유가 왜 주어졌는가를 깨닫지 못했다. 낯을 붉힐 수밖에 없는 일이다.

어머니가 종종 걸음을 치며 이부자리를 깔았다. 늙어가는 자식을 위해 이부자리를 펴는 더 늙은 어머니, 몸이 배길세라 초여름인데도 두터운 요를 깔고 준비해 둔 새 이불을 폈다. 무엇보다 어머니 품을 떠난 후로 30여 년이 지났건만 내가 좋아하는 베개의 크기를 아직 잊지 않으셨다. 나는 아이처럼 몸을 이불 속으로 넣었다.

가만히 어머니의 표정을 살핀다. 흐뭇한 미소가 주름살 사이로 퍼져간다. 두 자식은 먼저 저승으로 보내고 나머지 자식들은 남의 집에 보낸 홀어머니의 속마음이 가을바람처럼 소슬하게 다가온다. 이제 더 거두어드릴 것도, 손에 쥘 것도 없는 여든 살의 나이. 그 어머니가 다 큰 자식을 위해 이불을 펴는 것이다. 하룻밤 동안 자식을 집안에 품는 기쁨이나 영원히 자식을 가슴에 묻는 아픔의 극점은 어머니라는 존재에서만 가능하다. 남은 행복이란 이런 것일까. 사랑과 정을 고스란히 베풀고도 오히려 모자라 미안해하는 어머니의 시선이 봄꽃보다 곱다.

따뜻한 감촉에 살며시 눈을 떴다. 일찍 기차를 타는 자식을 위해 더운 아침밥을 하러 부엌으로 들어가면서 가만히 내 발을 쓰다듬는 어머니의 손길이다. 나도 한쪽 발을 교통사고로 심하게 다쳤던 적이 있다. 그러고 보니 우리 집에서 발 수술을 한 사람은 어머니와 나 뿐이다.

다음 집안 대소사가 다가올 때도 “자고 가래이”라고 말씀하실 게다. 그 말을 몇 번이나 더 들을 수 있겠는가. 한여름의 부채질 소리가 갈수록 선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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