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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미끼 / 조상규

부흐고비 2020. 9. 14. 13:25

마음이 어지러운 날이면 낚시를 간다. 물고기의 생과 사를 내 손아귀에 거머쥘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가지기 위해서다. 무너져 내릴 것 같은 나의 존재를 확인시켜 줌으로써 위로를 받을 수 있다는 것이 솔직한 심정인지 모르겠다. 그들과 벌이는 숨 막히는 흥정에서 긴장된 순간을 즐긴다. 다른 생명을 주검으로 몰아가는 수심(獸心)이 내 마음속에 자리하고 있음에 스스로 놀라곤 하지만 잡아야만 뱃속이 편한 것을 어쩌랴. 그 놈을 낚아챌 때 손으로 전해지는 짜릿하고 황홀한 손맛은, 남정네의 발기한 거시기를 손에 잡고 자신감에 찬 기쁨이라고 표현한 친구의 말이 생각난다. 세상에 이보다 더 큰 즐거움이 있을까. 물고기 입질 횟수가 잦을수록 긴장감이 나의 심장을 멎게 하여 몰아의 경지에 이르도록 한다. 낚싯대를 걸어두고 숨어서 기다리는 그들과의 만남, 그것은 미끼를 이용한 도박이다.

드디어 나를 찾아온 귀여운 손님, ‘내가 너를 얼마나 기다렸는지 아느냐? 오냐, 미끼를 한번 꿀꺽 삼켜 보아라.’ 어느덧 나는 동화 속의 마녀가 된다. 이 세상에 미끼를 사이에 두고 흥정을 하지 않는 것이 어디 있으랴. 세상은 온통 서로가 미끼에 물고 물린 채 속고 속이면서 살아가는 듯하다.

밤고개 근처에는 길손의 애환을 담은 ‘나그네’ 술집이 있었다. 간판이 말해주듯 술꾼들의 애환이 깃든 곳이며 나의 위안처였다. 그녀를 만나면 납덩이같이 무겁던 마음도 샤베트처럼 사르르 녹는다. 영원할 것 같은 순진성도 흐릿해지고 평상심도 곤두박질친다. 자주 드나들다 보면 가랑비에 옷이 젖어들듯 정이 드는가 보다. 다른 손님 좌석에 있다가도 나를 보면 살포시 웃는다. 나에게로 향한 마음이 몸과 함께할 수 없다는 독백으로 보이는 그녀의 미소는 안개꽃이다. 눈으로 먼저 웃고 얼굴을 여는 은은한 꽃, 나에게만 주는 알 듯 모를 듯 피고 사라지는 미소가 그저 좋다.

내가 물고기를 낚듯이 그녀는 내 마음을 건져 올리는 태공이다. 그러나 마주앉아 술잔을 나누는 만큼 내 호주머니는 가벼워진다. 미끼를 무는 순간 고통을 당하는 물고기와 다를 바 없는 것 같다. 장맛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밤이면 나는 외로운 한 마리의 물고기가 되어 그곳을 찾는다. 빗물이 빚어 놓은 아름다운 물방울을 좇아 수면으로 몸을 내밀듯 나는 위험도 마다않고 입질을 한다. 물고기의 습성을 닮아도 많이 닮았는가 싶다.

미끼는 상대방을 유혹할 수 있는 위장이 필요하다. 살아있는 지렁이나 새우를 두들겨 죽여 그 냄새를 물속으로 스며들게 한 후 낚싯바늘을 그들의 뱃속으로 숨겨 살아 움직이는 모습을 보이도록 하거나 밑밥을 뿌리고 물고기를 유인하는 것은 모두가 물고기를 유혹하는 미끼의 변용이다.

그러한 위장술은 그녀에게도 볼 수 있다. 홀인 되는 공처럼 빨려 들어가는 몸은 향수라는 미끼에 정신을 잃게 만들고 아슬아슬하게 올라간 치마에 욕정을 느끼게 하며 과감하게 노출한 가슴에 그리움을 가지도록 만든다. 이러한 미끼가 도사린 바늘을 감추고 푸른 물에 찌를 띄우듯 내 마음에 두둥실 찌를 띄운다.

나의 미끼는 술값이다. 이것이야말로 여인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는 가장 확실한 힘이다. 그것을 미끼로 건져 올리는 것은 무엇일까. 어깨를 짓누르는 일상의 고달픔을 여인의 따뜻한 미소 안에 잠재우고 싶은, 생활인의 욕망이 아닐까. 오색 무지개를 향한 아담의 꿈, 모자라는 한쪽의 갈비뼈 마저 채움으로 가슴 가득 포만에 이르는 만족을 가져 보려는 나름의 잠재의식일지도 모른다. 아무튼 그 시절, 서로의 손을 뻗쳐 미끼를 주고받으며 공생의 길을 걸어온 우리는 미끼를 앞에 놓고 흥정하는 낚시꾼의 모습과 다를 바 없었다. 세월이 지나도 이러한 흥정은 한없이 이어지는 것 같다.

세상은 온통 미끼의 덧칠이다. 심연의 물속에서 후각으로 먹이를 찾는 물고기처럼 세상 사람들은 욕망을 쫓아 불출주야 뛴다. 앞을 가늠할 수 없는 곳에 위험이 있는 것을 알면서도 유혹을 뿌리치지 못한다. 혼기나 취업을 앞둔 청춘남녀들이 성형이라는 미끼로 뜻한 바를 노리거나, 자녀의 효를 강요하기 위해 돈을 미끼삼는 부모도 같은 맥락이다. 여행처럼 스쳐가는 우리의 삶에서 나는 정을 미끼로 사람을 낚고 싶은 생각이 불현듯 일어난다.

정이 사뭇 그리워지는 요즘이다. 세월이 지나도 시들지 않는 정, 그것을 떡밥처럼 뭉쳐 정에 주린 사람들에게 뭉텅이 째 던져주는 것, 정이 미끼가 되는 날에는 마음이 곱고 착한 친구들이 어려운 항해를 하고 만선의 꿈을 이뤄 항구에 돌아온 것처럼 기쁨을 나누리라. 그래서 사람냄새 물씬 나는 이웃으로 오래도록 곁에 남을 것 같다.

아직 밤참 시간이 되지 않았는지 물고기는 입질을 하지 않는다. ‘빈 낚싯대에 손님이 올 리는 없을 게다. 그들이 맛있게 먹도록 신선한 음식을 공급 해야겠다’ 꿈틀거리는 지렁이와 껍질을 홀랑 벗긴 새우를 바늘에 꿴다. 구름을 벗어난 달빛만이 수면으로 내려와 부서진다. 시계를 보니 어느새 자정이 넘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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