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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남의 글 / 이태준

부흐고비 2020. 9. 17. 14:20

남의 글처럼 내 글이 쉬웠으면, 하는 생각을 가끔 한다. 자기가 쓴 것은 동사 같은 뚜렷한 말에서도 그 잘못된 것을 얼른 집어내지 못하면서 남의 글에서는 부사 하나 덜된 것이라도 이내 눈에 걸리어 그냥 지나치지 않는다.

“남의 눈에 든 티는 보면서 어찌 하야 네 눈에 든 대들보는 보지 못하느냐?”
한 예수의 말씀은 문장도文章道에 있어서도 좋은 교훈이다.

자식처럼, 글도 제게서 난 것은 애정에 눈이 어리기 때문인가? ‘여기가 잘못되었소.’ 하면 그 말을 고맙게 들으려고는 하면서도 먼저는 불쾌한 것이 사실이요 고맙게 여기는 것은 나중에 교양의 힘으로 되는 예의였다. 내 글이되 남의 글처럼 뚝 떨어져 보는 속, 그 속이 진작부터 필요한 줄은 알면서도 그게 그렇게 쉽게 내 속에 들어서 주지 않는다. 문장 공부도 구도求道의 정신에서만 성취될 것인가 보다.

오늘도 작문 40통을 앞에 놓을 때, 불현듯 도화 교원圖畵敎員이 부러운 생각이 났다. 도화라면 백 장인들 꼲기 얼마나 쉬우랴! 이것은, 그 자질구레한 글자를, 그렇게도 아낄 줄 모르고 많이만 늘어놓은 글자들을 한 자도 빼놓지 않고 발음을 해봐야 한다. 음미해야 하고 또 다른 것과 비교해야 한다. 도화나 작문이나 다 봐야 하는 의무는 마찬가지지만, 도화를 꼲는 것은 미용美容의 심사요, 작문을 꼲는 것은 신체검사라 할까. 얼른 들떠놓고 한 눈으로 보고는 어떻다고 말할 수 없는 것이 작문이다.

이 점에 있어 그림은 글보다 언제나 편리하다. 미술은 전람회장에 들어서면 두 시간 내지 서너 시간에 수백 명의 작품을 완전히 감상할 수가 있다. 그러나 문학은 《전쟁과 평화》 같은 것은 그 하나만 가지고도 여러 주야를 씨름해야 한다.

그런 글, 그런 문학이면서도 이 스피드 시대에 그냥 엄연한 존재를 갖는 것은 이상스러울 만한 일이 아닌가. 더구나 작문에 있어 점수를 매긴다는 것은 가장 불유쾌한 의무다. 그냥 ‘여기가 좋소’ 그냥 ‘여기는 이렇게 고치는 것이 좋지 않을까’ 투로만 보아간다면 좋겠는데 교무상敎務上 채점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런데 무슨 과학에서와 같이 공식적인 해답을 쓰고 못 쓴 것이라면 한 문제에 몇 점씩으로 해서 그야말로 과학적인 정확한 채점이 될 수 있지만 글은 그런 계산적인 채점 표준이 있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러니까 90점을 주면서도 이것은 어째서 90점에 해당한다는 논리적인 선언을 할 수 없다. 대체大體가 감정 속에서 처리되는 것이므로 작문 점수란 영원히 부정확한 가점수假點數일 것이다.

낮은 점수를 받은 학생의 불유쾌는 무론의 것이려니와 야박스럽지만 더 잘 쓴 여러 층의 사람들이 위에 있기 때문에 할 수 없이 낮은 점수를 매겨야 하는 교사도 결코 유쾌할 수 없는 일이다. 점수가 적은 것을 듣고 그 학생을 부를 적에는 남에게 변변치 못한 음식을 줄 때와 같이 손이 잘 나가지 않는 것을 학생들은 아마 몰라 줄 것이다.

재능이든 선악善惡이든 남을 전형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요 또 좋은 업業이 아닐 듯싶다. 더욱 남에게
“너는 종신 징역에 처한다.”
“너는 사형에 처한다.”
하는 분들은 그 자신들로부터 얼마나 신산辛酸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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