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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가슴의 미학 / 김훈

부흐고비 2020. 10. 22. 08:46

유방성형수술을 받은 여자들이 집단 부작용을 일으켜서 우리나라 젊은 여자들의 젖가슴이 크게 망가져버렸다고 한다. 젖퉁이를 크고 팽팽하게 만드느라고 그 속에 실리콘이라는 이물질을 넣었는데 모양은 도톰해졌지만 좀 지나니까 진물이 흐르고 염증이 깊어져서 아예 젖을 도려내야 할 지경이라는 것이다. TV 뉴스를 보면서 아깝고 분한 마음을 참을 수 없었다.

여자들의 젖가슴이란 그 주인인 각자의 것이고 그 애인의 것이기도 하지만, 신라금관이나 고려청자나 백제금동향로보다 더 소중한 겨레의 보물이며 자랑거리다. 여자들은 누구나 다 한 쌍의 젖가슴을 키워내서 품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젖가슴은 더욱 보편적이고 더욱 소중한 일상의 보물이며, 민족적 생명과 에너지의 근본인 것이다. 희소가치가 없기 때문에 더욱 소중하다는 말이다. 더구나 그 속에 살아 있는 생명의 피가 흐르고 젖샘 꽈리에 젖이 고인다고 하니, 죽은 쇠붙이에 불과한 신라왕관과는 비교할 수 없다. 거리마다, 공원마다, 지하철마다 넘쳐나는 이 생명의 국보들은 새로운 삶을 향한 충동으로 우리를 설레게 하고 견딜 수 없는 것들을 견디게 해준다.

그런데 이 착한 젖가슴들은 죄다 곪아 터지게 만든 실리콘이라는 물건은 미국 기업이 온 세계 여자들한테 팔아먹은 것이라고 한다. 제 나라 여자들 젖가슴이 이토록 곪아서 문드러지도록 정부는 대체 무얼 했다는 말인가. 철딱서니 없고 맹하기는 여자들도 마찬가지다. 여자들의 젖가슴을 놓고, 누구의 가슴이 더 예쁘고 누구의 가슴이 덜 예쁘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몸의 아름다움에 대한 우열의 비교가 지금 이처럼 거대한 자본주의적 성형산업을 일으켜 놓은 것일 테지만, 몸은 본래 그렇게 말해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젖가슴에 관한 여러 감식가들의 견해를 살펴보니까, 빗장뼈의 중심점과 양쪽 젖꼭지 사이가 정삼각형을 이루는 구도를 으뜸으로 치고 있었다. 이것은 가슴을 앞에서 보았을 때의 얘기다. 옆에서 봤을 때는 젖가슴 그루터기의 직경보다 앞으로 내민 높이가 더 높은, 말하자면 방추형 젖가슴이 만인의 사랑을 받을 자격이 있으며, 밑으로 처진 젖가슴은 경멸과 혐오의 대상이다. 또 젖꼭지의 색깔은 연분홍을 최상품으로 치며 두 젖꼭지는 서로 토라진 듯이 바깥쪽을 바라보고 있어야 아름답다는 것이다. 나는 이 감정 의견들이 아주 틀린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이 제자백가의 설들은 모두 나름의 미학적 근거가 있어 보인다.

그러나 내 생각은 많이 다르다. 이 잔혹한 감정 기준들은 여자의 젖가슴을 사물화하고 있다는 점에서 근본적인 오류를 범하고 있다. 이 오류는 치명적이다. 젖가슴은 구조나 대칭이나 질량이나 밀도의 무제가 아니다. 생명현상과 자연현상에 대한 인식없이 우리는 젖가슴의 본질을 논할 수 없다.

내 생각은 이렇다. 여자 젖가슴의 모든 고난은 직립보행에서 비롯된 것이다. 네 발로 기어 다니는 포유류들의 젖은 아래도 늘어져서 편안하다. 이것이 무릇 모든 젖의 자연일 것이다. 두 발로 걷기 시작한 이후로, 여자들의 젖가슴은 어쩔 수 없이 전방을 향하게 됐다. 가엾은 일이다. 크고 무겁고 밀도가 높고 팽팽하고 늘어지지 않은 가슴만이 아름답다고, 남자나 여자나 모두 그렇게 세뇌돼 있다. 그러나 불행히도 크고 무거운 것들은 아래로 늘어지게 돼 있다. 늘어지려는 것을 자꾸만 끌어 올리니까 부작용이 생긴다. 생명이나 자연은 인간이 거기에 의미를 부여하지 않아도 이미 스스로 본래 그러함처럼 아름답고 편안하다. 그러니 가슴이 좀 늘어지기로 무슨 걱정할 일이 있겠는가.

여자들아, 당신들 가슴에 얼굴을 묻고 젖가슴의 삼각형 대칭구도나 젖꼭지의 방향을 따져 보는 사내들은 애인으로 삼지 말라. 이런 녀석들은 대개가 쓰잘 데 없는 잡놈들인 것이다. 이런 남자들을 믿고 살다가는 한평생 몸의 감옥, 광고의 감옥, 여성성의 감옥에서 헤어나지 못한다. 당신들의 젖가슴은 단지 젖가슴이라는 이유만으로 이미 충분히 아름답다. 직립보행의 고난을 떠안고 있는 그 가슴을 이제 좀 편안하게 해주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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