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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글과 몸과 해금 / 김훈

부흐고비 2020. 10. 22. 08:48

글을 쓸 때 내 마음속에는 국악의 장단이 일어선다. 일어선 장단이 흘러가면서 나는 한 글자씩 원고지 칸을 메울 수 있다. 이 리듬감이 없이는 나는 글을 쓸 신명이 나지 않는다. 내 몸속에서 리듬이 솟아나기를 기다리는 날들은 기약 없다. 그런 날 나는 때때로 술을 마시거나, 자전거를 타고 강가로 나간다.

휘몰이 장단으로 글을 쓸 때, 내 사유는 급박하게 솟구치는 언어 위에 서려서, 연결되거나 또는 부러진다. 사유가 부러지고 다시 이어지는 대목마다 문장이 하나씩 들어선다. 이런 문장들은 대체로 짧고 다급하다. 문장은 조바심치면서, 앞선 문장을 들이박고 뒤따르는 문장을 끌어당긴다. 휘몰이로 몰고 나가는 문장은 거칠다. 나는 이런 문장을 한없이 쓰지는 못한다. 힘이 빠지면 내 문장은 중모리쯤으로 내려앉는다. 중모리 문장은 편안하다. ​사유는 문장 속에 편안하게 실린다. 휘몰이 문장을 쓸 때는 사유가 문장을 몰고 가지만, 중모리 문장을 쓸 때면 문장이 사유를 이끌고 나가는 것 같다. 그래서 중모리 문장을 쓸 때 내 몸은 아늑하다. 그 아늑함이 한가하고도 부질없이 느껴질 때 나는 다시 휘몰이 쪽을 넘보는데 휘몰이 문장을 불러오려면 사유의 질감을 바꿔야 한다. 이 전환은 쉽지 않다.

한 개의 문장을 하나의 우주로 만들어보고 싶은 충동에 시달릴 때, 나는 진양조로 나아간다. 24박자로 끝없이 늘어지고 퍼지면서 먼 것들을 불러들이고 가까운 것들을 쓰다듬어 가면서 하나의 거대한 산맥과 강물을 문장 속에 끌어들여 출렁거리게 하려면 진양조 리듬 위에 올라타야 한다. 올라타서 천천히 몸으로 바닥을 밀면서 나아가야 한다.​

진양조 문장을 서너 개 쓰고 나면 몸은 기진맥진해져 나자빠지지만, 마음속에는 여전히 미진한 것들이 남아 있어 다시 솟아오르는 진양조 리듬에 올라타야 한다. 휘몰이는 날뛰고, 걷어차면서 앞으로 나아가고, 진양조는 뱀처럼 땅을 밀면서 나아간다. 나는 글을 몸으로 쓴다. 몸이 글을 밀고 나가는 느낌이 없으면 단 한 줄도 쓰지 못한다. 연필을 쥔 손아귀와 손목과 어깨에 사유의 힘이 작동되어야 글을 쓸 수 있다. 그리고 몸과 사유를 연결시켜서 글로 옮길 수 있게 해주는 것이 리듬이다. 나는 이 리듬이 어디서 오는 것인지 어렴풋이 알고 있다. 그 리듬은 살아있는 생명 속에서 발생한다. 그래서 이 리듬은 비논리적인 것이고 오직 시간 속에만 존재하는 것이다. 글을 쓸 때 나는 작곡을 생각한다. 글은 몸속의 리듬을 언어로 표현해 내는 악보이다.

해금은 놀라운 악기다. 해금의 음색은 그 악기를 연주하는 인간의 몸의 질감을 느끼게 해준다. 모든 국악기는 양악기에 비해 훨씬 더 진하게 연주자의 몸을 느끼게 하지만, 그 중에서도 해금이 풍기는 육체의 질감은 가장 깊고 진하다. 해금의 음색이 매우 빈논리적으로 들리는 까닭은 이 육체의 질감 때문일 것이다.

몇 년 전, 진도에 놀러 갔다가 진도 단골들의 시나위를 구경한 적이 있었다. 사실, 해금의 생김새는 볼품없다. 네 가닥 줄에 대나무 통이 전부다. 그러나 그 음역과 표현력은 놀랍다. 거칠게 꺽이고 휘면서 섬세한 것들을 아우른다. 진도에서 본 시나위 악사는 왼손으로 해금의 네 줄을 싸감아 쥐고 떡 주무르듯이 소리를 주물렀다. 소리를 손으로 주무르는 것이다. 그래서 해금의 소리는 주무르는 인간의 몸의 소리처럼 들린다. 몸이 겪어내는 온갖​ 시간감과 몸속에서 솟고 또 잦는 리듬이 그의 손바닥으로 퍼지고 그 손바닥이 소리를 주물러서 세상으로 내보내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가 소리를 주무를 떄, 그의 손바닥에 와 닿는 떨림은 다시 그의 생명으로 전달되고 있었다.

해금을 켜는 시나위 악사를 바라보면서, 나는 나의 글이 해금의 소리를 닮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아, 소리를 주무를 수 있는 자들은 얼마나 복된가. 나는 해금 악사가 소리를 손바닥으로 반죽해 내듯이 내 문장을 주물러 낼 수가 없다. 그래서 그 힘이 모두 빠진 날 나는 해금연주를 듣는다. 작년에 해금 음반이 많이 나왔는데, 꼭 나를 위해서 만들어 준 음반 같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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