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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돌들의 묵언을 읽다 / 김정화

부흐고비 2020. 10. 26. 14:50

2020 경북문화체험 전국수필대전 입선

햇볕 쨍쨍 한낮에 연지 해자 뜰을 걷는다. 잎자루를 든 연잎이 잎을 길쭉하게 오므리고 하늘에 떠 있는 구름을 다 마실 듯하다. 더러는 잎을 납작하게 펼치고 검게 고인 물을 덮었다. 분홍 메꽃과 태극 문양 흙길 따라가니 또 하나 둥근 해자가 펼쳐진다.

성 둘레길을 따라 걷는다. 거대한 돌, 작은 돌, 잘생긴 돌, 못생긴 돌덩이로 쌓은 성벽이 끝 간 데 없이 펼쳐졌다. 돌과 돌 틈에 작고 납작한 돌이 균형을 잡아 울퉁불퉁한 성 벽면을 자로 잰 듯 평평하다. 내가 서 있는 눈높이에 네모난 돌은 모퉁이가 부드러운 곡선을 띤다. 그 위에 각이 진 반듯한 인공 돌이 층층 놓였다. 오목하고 볼록한 직선으로 번갈아 길게 이어졌다. 검버섯이 핀 큰 돌들로 반룡의 몸통이 꿈틀거리는 듯하다.

청도 읍성은 남북으로 길게 누웠다. 북쪽에는 여덟 명이 모이지 않고는 넘을 수 없다는 팔조령이 끼었다. 남으로는 우뚝 솟은 겹겹의 남산 산맥이 계곡 따라 읍성으로 굽이친다. 남산과 마주한 건너편 산봉우리 은왕봉이 가만히 내려다본다. 한때 작은 이서국의 왕성이던 백곡토성이 신라에 무너지고 고려 때에 성을 짓고 민과 관이 지켜 온 읍성이다.

땅에서 불뚝 솟아난 산이 있다. 산줄기로 바람을 막고 그 산을 타고 내려온 기운으로 한때는 더 생기가 넘쳤을 것이다. 팔조령의 기운이 너무 세었던 것일까. 좋은 기운이 산 너머 나라로 가버렸던 것일까. 바람에 흩어져 버린 것일까. 역사(役事)의 주인공들은 사라지고 돌들만이 옛사람의 역사(歷史)를 말없이 웅변한다.

시절은 흉흉했다. 남자들은 나라를 구한다고 많은 살생을 하고, 전장에 나가 돌아오지 않았다. 여자들은 승자들 겁탈에 짓밟혀 무서움에 떨다 강물에 가라앉거나, 숨탄것들 먹이가 되고, 조각난 뼈는 어두운 땅속에 서렸다. 아기가 살아남아도 마땅히 키워줄 사람이 없었던 것일까. 한 부족이 얼마나 한이 맺혔으면 세기를 지낸 이곳 땅에 사는 감나무에조차 씨가 없는 것일까.

많은 사람이 다쳤다. 모를 심다가 끌려온 농부들, 수행하다 징발된 승려들은 청 도끼 하나로 큰 돌을 깨고 거대한 돌을 옮겼다. 돌을 깨고 베고 다듬어 포개 쌓느라 살갗이 찢어지고 손발이 부르터져 피멍이 들었다. 시지푸스처럼 엄청나게 큰 돌을 가파른 언덕 위로 굴려야 했다. 부역에 시달리고 전쟁에 시달리고 전염병에 시달리면서도 돌을 다듬어갔다.

맞을 때마다 자연에 순응하며 살던 때를 그렸다. 연둣빛 모를 심어 황금 들녘으로 물들면 산천이 들썩이게 징을 치고 북을 두드리고 꽹과리 치며 음악에 맞춰 어깨춤을 추었다. 푸짐한 음식과 술을 마시며 다 같이 즐기던 때를 떠올렸다. 옛사람들이 가을바람에 떨어지는 이파리처럼 쓰러지고 우박처럼 흩어진 아픔을 헛되지 않게 버텼다.

사람뿐만 아니다. 큰 돌 작은 돌도 평지에서 실려 오고 구릉지와 산기슭에서 잡혀 왔다. 원석과 떨어져 잘리는 고통에도 참았다. 채석공이 내리치는 망치질에 제 살 깎아 모서리를 둥글게 다듬었다. 뜨거운 땅속 열에서 태어나 산에서 싸우고 물에서 싸우고 바람에 닳고 비에 씻기며 세월에 몸을 맡겼다. 사라진 나라의 돌은 왕조가 바뀔 때마다 서로를 부둥켜안고 성을 지켰다.

성 밖의 돌이 검다. 평화롭던 한때 부족국가를 지켜보았던 돌들의 적개심일까. 한 번 잃어버린 왕국을 두 번 세 번 잃을 수 있으랴. 왕국이 무너지고 새로운 나라에 통합하는 동안 쪼개지고 나누어지길 거듭하는 틈에 안에서 커지는 목소리가 먹구름을 불렸다. 나라 밖 동쪽 섬나라 침략은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어 돌은 더 단단해졌다. 터전과 멸망 속에 읍성의 돌은 검게 그을린 상처로 잃어버린 왕국의 설움을 간직하고 있다.

웅장하게 끝없이 펼쳐진 읍성의 성곽을 바라본다. 말에게 밟히고 칼싸움하는 병사들의 보랏빛 함성, 검붉은 눈물방울, 가뭄 때 단비를 기도하고 고마움에 가축을 바치며 제를 올리던 왕과 가족이 눈앞에 보인다. 옛사람들의 얼룩진 피와 푸른 눈물 같은 성이다. 피를 보지 않을 수 없었던 전쟁으로 산과 들판에 너무 많은 사람이 땅속으로 사라졌다.

돌은 어떤 자취로 남을지 잘 알고 있는 듯하다. 이제 숨 쉬는 땅에서 승천을 꿈꾼다. 돌의 몸을 빌리고 둥근 연못의 연꽃 여의주를 가졌다. 헤게모니를 가져간 산 너머 나라 보란 듯 꼬리를 흔들며 긴 읍성이 산맥 따라 꿈틀거리며 창공을 향해 곧 오를 듯하다. 사라졌던 이서국, 왕국의 끊어진 대를 청도가 이어가고 읍성의 성돌은 그날의 소리를 침묵으로 말한다.

다시 연지를 본다. 땅을 지키려던 사람, 땅을 빼앗은 사람들이 성돌 아래 깊은 잠을 자는 동안 청도는 거듭난다. 왕국의 주인은 사라졌지만, 왕국의 성장통에 쏟은 그들 눈물이 연지에 고이고 그 얼이 연꽃으로 피어났다.

옛사람들 숨결 같은 흙을 밟으며 성곽 위를 거닌다. 역사를 기억해달라는 옛사람 목소리가 바람결에 들리는 것 같다. 뒤를 돌아보니 북쪽 멀리 보이는 산맥이 웃는 듯하다.

 

수 상 소 감

 

나는 현대 수필의 여백의 미를 사랑한다. 짧은 아포리즘 수필도 좋아한다. 산천을 산보하거나 강둑을 걷거나 바닷가 모래에 앉아 하염없이 쳐다보는 것을 즐긴다. 수필은 마음 가는 대로 개성 껏 생각을 이어간다. 사람마다 제 인생의 보폭대로 걸어가면서 보는 풍경이자, 생활의 지혜 같은 행간이 숨어있다. 형식에 구애받지 않은 것 같으면서도 갖추어진 형식이 더 매력적인 장르가 수필이다. 삶의 경험과 생활을 억지로 꾸미지 않는 소통과 공감의 문학이 깃들어 수필의 행간을 따라가다 보면 ‘아! 하고, 무릎을 치거나, 나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게’ 한다. 수필은 손에 가깝다. 손이 만지는 모든 곳은 인간적이다. 수필을 개성의 문학이라고 지목하는 것도, 그것을 두고 한 말인지도 모르겠다. 셰프의 미학적 코스요리가 시라면, 수필은 비빔밥에 가깝다. 골목에서 주워 담은 자잘한 이야기에서부터, 저 먼 우주까지 끌고 와 몽땅 글의 그릇에 넣어, 느낌과 짜임으로 비벼 자유롭게 떠먹는 것이 수필이다. 누구나 수필을 쓸 수 있지만, 오랫동안 행간을 다듬어 고치고, 의미를 여물게 하여야만 좋은 수필이다.
상은 늘 나를 기쁘게 한다. 이번 수필은 바람의 느낌으로 풍경을 보려고 했다. 청도 읍성에 올라 저 멀리 흘러가는 구름의 허리를 만져보려고 했다. 생을 지나가면서, 좋은 수필 한 편을 쓰고 싶은 소망은 간절하다. 심사위원님들께 감사의 인사드린다.
△2018년 마중문학 수필등단 △대구수필가협회 회원 △수필사랑문학회 회원 △텃밭 시인학교 동인 △제10회 경북문화체험 전국수필대전 장려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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