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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석비 / 서예원

부흐고비 2020. 11. 3. 15:01

2020 경북문화체험 전국수필대전 입선

구름이 지구를 수백만 번 감고 돌았으리라, 헤아리지 못할 정도로. 사계절은 또 몇 번이나 오고 갔을지 모르겠다. 시간이라는 감각이 없어지고 주변의 풍광이 생경할 정도로 바뀌어갈 즈음, 낯선 두려움에 얼굴이 사색이 되어도 꿋꿋이 돌 위의 글씨를 붙잡고 버텨온 것이었다.

깊은 땅에 거꾸로 처박혀 있어서 숨이 안 쉬어질 때면, 차분히 호흡을 고르고 예전 기억을 떠올렸으리라. 본인의 몸통에 아로새겨진 그때의 기록을 품고, 다시 빛 볼 날을 기다렸을 것이다. 1988년 추운 겨울에서야 땅속 어둠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고 하니, 잘 견뎌냈다고 혼잣말을 내뱉어보았다.

처음 만난 세상은 참으로 이질적인 시공간이었을 터. 기뻐할 새도 없이 포클레인으로 온몸이 들려져 길옆 개울에 무참히 버려지는 수모를 겪었다고 했다. 그러나 영겁의 세월 동안 돌 몸통에 끝까지 붙들어두어 잃지 않았던 글씨들 덕분에, 마침내 그 가치를 증명해 내기에 이르렀다.

석비는 모든 수고로움을 의연히 견뎌내어, 새로운 시대에 빛을 보았다. 당대에는 이름 없는 비석이었을지 모르나, 현대에는 과거 신라의 역사와 발자취를 좇는 사람들에게 ‘울진 봉평리 신라비’라는 새 이름을 부여받았다. 신라 법흥왕 시대에서 21세기 대한민국으로, 그렇게 새 삶을 살게 되었다. 새겨진 기록은 단순하지만 그 기록이 말해주는 당시 시대상 덕분에, 이 석비는 국보 제242호로 지정되었다.

비석에 관심을 갖게 된 건 신라시대 비석들을 공부하면서부터였다. 그중에는 영토를 넓히는 과정에서 세운 비석들이 많았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는 그 시대의 평범한 사람들이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모든 사람이 진흥왕이나 법흥왕처럼 왕으로 태어나 특별한 업적을 세우며 살진 않았을 테니.

울진 봉평리 신라비도 그 관심의 일부였다. 석비 발견 계기를 읽고 그 보존도 단순하게 되어 있을 거라고 상상했었는데, 방문해보니 생각보다 큰 규모의 전시관이 있었다. 울진 봉평리 신라비 전시관 안에는 고비(告碑)와 함께, 울진 봉평리 신라비 발견을 특종으로 다룬 옛 신문기사도 전시되어 있었다. 획기적 사료라는 헤드라인에서 당시 사람들의 흥분과 떨림이 전해져왔다.

신라 법흥왕 때 울진 지역 주민들의 반란을 진압한 후, 이들에 대한 처리와 형벌에 대해 회의하고 형벌을 집행한 내용이다. 현대로 치면 평범한 사람들이 사는 소소한 이야기를 기록해둔 것이나 다름없다. 그러나 나는 석비를 통해 그 시대의 그 삶을 본다. 그 시절에도 제도를 갖추고 법을 집행하면서 온전한 나라의 모습을 하고 있었음을 본다. 다시 돌 위에 간신히 남아 매달려 있는 글자들을 보았다. 바람과 물과 시간이 앗아가려 한 과거의 삶이 명을 유지하고 있는 걸 보니, 새삼스럽게 엄숙해졌다.

전시관 안 중앙에 보존되어 서 있는 그 위용을 한참 바라보았다. 발견된 날짜를 생일로 하면, 나보다 10개월 늦게 태어난 석비였다. 4면의 모양이 일정하지 않아 땅 위에 제힘으로 온전히 발붙이고 서 있기 힘들어 보이긴 했으나, 중심은 잘 유지하고 있었다.

감탄이 나왔다. 종이는 찢어지고 물에 젖고 불에 타서 영속성이 떨어진다. 돌은 다르다. 엄청난 충격으로 산산조각 나지 않는 이상, 제 모양을 유지한다. 오죽하면 바람도, 물도, 아주 오랜 세월 동안 조금씩 천천히 돌의 표면에 흠집만을 내지 않던가.

천년의 세월을 이겨낸 비석도, 문명도, 참으로 위대하다. 천 년 전의 사람들이 글자라는 도구로 천 년 후의 사람들과 대화하고 있는 까닭이다.

‘우리가 살던 세상은 이런 모습이었어. 거기는 어때?’

바람은 불고, 물은 흘러갔다. 사람은 생과 사를 반복하고, 시대는 변해왔다. 높이 204㎝의 공간에 거벌모라의 숨결을 그대로 담은 채, 비석은 그 오랜 생을 달려온 것이다. 아주 오래전에 우리와 같은 모습을 한 사람들이,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땅에서, 우리와 비슷한 삶을 살았음을.

우리 사이에는 긴 시간이 있지만, 그 시간도 바로 앞의 일처럼 생생하게 느낄 수 있는 건, 1천500년을 살아낸 이 비석 덕분이다. 현재는 과거의 연장선상에 놓인 결과이며, 결국 역사는 하나로 이어져 있다. 신라인들도 우리보다 조금 일찍 이 세상에 태어난 것일 뿐. 결국 우리는 사는 모습이 크게 다르지 않고 삶과 애환을 공유하는 같은‘인간’임을, 이 석비(石碑)를 통해 안다.

 

수 상 소 감


서울 광화문과 종로 일대를 돌아다니다 보면 글씨가 새겨진 표석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표석들은 대개 한국 역사의 주요 순간과 인물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지방에서 서울로 올라와 생활하기 시작했을 때, 그 표석들을 처음 마주하고 묘한 감정에 압도됐습니다. 교과서로만 배우고 익혀 먼 과거로 느껴지던 역사를, 사람들이 표석을 세워 기억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번 공모전에 참가하면서 비석을 주목한 이유도, 표석을 향한 관심의 연장이었습니다. 역사가 좋고 문화재가 좋아서 경북문화체험 수필대전에 응모했습니다. 개인적으로 경북 문화재 종류가 다양한데다 그 수도 많아서 놀랐습니다. 앞으로 제가 주목한 비석 외에 다른 경북 문화재들도 천천히 알아가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알아가면서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널리 알리고 싶은 경북 문화재가 생기면, 내년에 다시 응모해 보고 싶습니다.
입선 문자를 받았을 때 기뻤습니다. 결실의 계절인 가을인데, 잘했다고 미리 상을 받은 기분입니다. 부족한 수필이었는데 입선이라는 귀한 상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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