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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고목(古木) / 윤오영

부흐고비 2020. 11. 3. 15:09

산비탈 공지에 큰 느티나무 고목이 한 그루 서 있었다. 속은 텅 비고 썩어, 죽은 등걸 같은데, 위의 가지들을 꽤 번성해서 넓게 녹음(綠陰)을 짓고 있었다. 어느 날 나는 그 나무 밑에 앉아서 책을 보다가, 슬그머니 졸음이 와서 책을 덮었다. 머리 위에서 쏴! 하고 시원한 바람 소리가 스쳐왔다. 비가 오다가 뚝 그친 뒤에 쏴 하고 일제히 우는 매미 소리를 연상케 한다. 잔 휘초리들이 바람에 씰리는 소리다.

위를 쳐다보니, 파란 하늘 아래 나무잎들이 물 속의 피라미 새끼들같이 나부끼고 있었다. 파들파들 떨며 나부끼는 잎 사이에서 은은히 울려오는, 뭇 새소리와도 같은 소란한 소리가 들렸다. 그것은 빽빽한 잎과 잎, 가는 휘초리와 휘초리 사이로 바람이 새는 소리인 듯했다. 가만히 귀 모아 들으면 바람 소리도 참 복잡하고 신비스럽구나 했다. 바람이 다시, 더 크게 쏴! 하고 불어 왔다. 이번에는 파도 소리같이 들렸다. 이윽고 바람은 잤다. 나는 책을 들고 맞은편 사랑 툇마루로 왔다. 저만치 보이는 古木에서는 아무 소리도 없었다. 정적(靜寂)만이 깃들어 있다. 수백 년 동안 그 자리를 지키고, 움직이지 않고, 묵묵히 서 있는 저 교목(喬木)의 암석(岩石) 같은 자세.

그날 밤에는 달이 유난히 밝았다. 달빛을 받은 나무 끝의 잎들은 마치 봄빛을 받은 어린 잎과 같이 선연하고 고왔으나, 나무는 금실(金絲) 같은 달빛이 가지 사이로 새어나오는 데도 불구하고 검고 어두웠다. 등걸은 썩어서 패어들어간 안쪽이나, 누렇게 달빛을 받은 겉쪽이나, 다 늙은 고목의 마른 등걸이 있었다. 땅바닥은 넓은 터전이 그림자에 젖어 있었다.

세찬 강풍(强風)이 휘몰아쳐 왔다. 우우, 웅장하고 우렁찬 소리가 길게 울려왔다. 나는 이것이 그 古木에서 나는 소리인 것을 알았다. 넓은 천지를 휘돌아 오는 그 강한 바람이 썩고 팬 속으로 들어가서 그 위로 몰려 나오는 소리인 것이다. 한껏 웅장하고 비장하기도 하고, 또 화평하고 그윽한 소리 같기도 하다. 깊은 밤, 빈 뜰에 울려오는 태고(太古)의 음향(音響).

매미는 여름마다 찾아와서 가지마다 울고 갔다. 몇 백번을. 철새는 철따라 앉아 노래하다 갔다. 몇 백번을. 높으면 먼 데 것도 들린다. 풍랑이 일면, 먼 해변의 파도 소리도 들렸을 것이다. 지난날의 그 소리들이 몸에 스며들고 배어들어 古木은 복잡한 소리를 지니고 있는지 모른다. 그 밑에 모여서 재깔대며 술래잡기를 하던 동네 조무래기들도 어느듯 자라서 제각각 헤어지고, 또 딴 어린이들이 왔다갔고, 그 밑에서 담배를 피우고 바둑을 두던 노인들도 저세상에 가서 지금 어디 태어났는지 모른다.

책을 보다가 조름을 안고 가던 그 사나이의 모습도 이제 없지 아니한가. 한 번 찾아왔다 가는 무리는 다시 오지 않고, 또 다른 무리가 오가건만, 가끔 휘몰아 오는 바람은 우주(宇宙)의 소식을 안아다 준다. 늙은 저 古木은 이것을 안고, 크게 휘파람 분 것이다. 절해고도(絶海孤島)에 천년(千年) 묵은 자고동(自枯桐)으로 만든 거문고가 천하(天下)의 신품(神品)이라 한다. 나는 툇마루에 우두커니 앉아서 방에 들어갈 것을 잊고 있었다. 외로운 古木! 그러나 일년초(一年草)가 아닌 위대(偉大)한 古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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