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기생충> 앤딩크래딧의 검은 바탕에 하얀 찔레꽃이 겹쳐보였다.

찔레꽃 향기가 슬프다고, 그래서 울었다고 절규하는 노래가 있다. 처음에는 조용히 남정네 혼자서 찔레꽃 향기가 슬프다고 읊조린다. 그러다 점점 톤을 높인다. 혼자로는 성에 안 차는지 대규모 합창단과 함께 찔레꽃 향기가 너무 슬프다고, 그래서 울었다고, 목 놓아 울었다고 울부짖는다. 왜 슬픈지에 대해서는 구체적인 언질이 없었다. 오래 전 그 노래를 들으며 그런 정서를 가지고 있는 남정네의 현재와 미래를 염려 했었다. 비극적 전설을 차용했다거나 배고픈 민중의 한을 노래했을 거라는 문제는 크게 염두에 두지도 않았다. 그저 시적 화자의 지나친 감성을 탓하던 내가 찔레꽃 향기가 왜 그리 슬프다고 울었는지 이해하게 된 건 다행인가?

내가 살던 아파트 울타리는 봄이면 찔레꽃이 만발했다. 해 질 녘이면 조경이 잘 된 아파트 단지를 산책하며 먹을 만한지 찔레꽃을 따 입에 넣기도 했다. 이걸 얼마나 따먹어야 배고픔을 덜 수 있을까를 잠시 생각했던 거 같기는 하다. 하얀 꽃이 만발한 꽃담을 따라 걷다보면 찔레꽃 향기에 취해 기분 좋게 어지러웠다. 그 시절 찔레꽃 향기는 슬프기는커녕 한 치의 의심도 없이 향기롭고 달콤했다. 그러므로 찔레꽃 향기가 슬픈 심사를 헤아리지 못했다.

조짐은 있었지만 어느날 갑자기 9층에서 땅으로 수직 하강했다. 그래도 산책은 열심히 다녔다. 이전의 산책은 소요요 배회였지만 그때는 살 길이었다. 잘 걷는다고, 오래 걷는다고 누가 동전 한 닢 보태주지 않았지만 걷고 또 걸으며 속을 비워냈다.

그 동네에도 찔레꽃으로 담장을 두른 집이 있었다. 천 평은 족히 되는 대지에 잘 지은 2층 벽돌집이 보기 좋게 들어앉은 장원이었다. 각종 관상수와 유실수로 채워진 저택 담장에 찔레꽃이 하얗게 피어 있었다. 그런데 무슨 조화인지 그 향기가 참 슬펐다.

아, 냄새가 슬플 수도 있구나. 고개를 끄덕이다 찔레꽃 향기가 아니라 내가 슬픈 거라는 걸 알았다. 믿을 수 없는 영락이, 불확실한 미래가, 지금 여기 서서 장원을 흘끔거리고 있는 내 꼴이 슬픈 거라는 걸. 뒤이어 ‘비참함 속에서 행복했던 때를 회상하는 것 보다 더 큰 슬픔은 없다’는 단테의 신곡 한 구절이 찔레 가시가 되어 몸 구석구석을 찔러댔다.

후에 장사익 콘서트에서 ‘찔레꽃’을 다시 들었을 때 노래가 진정으로 이해됐다. 노래의 시적 자아는 아마 작은 가시에 찔려도 피 흘리며 오래 아파할 것이며, 쓸데 없이 예민할 것이고, 그런 그를 돈과 출세가 멀리할 것이며, 그래서 가난할 것이고, 가난의 죄 없음과 불편함과 자존심 상함 사이에서 괴로워할 것이라고 자의적 해석을 했다. 그리고 대장부가 어찌 힘들다고, 울고 싶다고 소리 내어 말할 수 있겠는가. 마침 찔레꽃이 피었으니 저놈에게 덮어씌우자. 그래서 죽자고 찔레꽃을 물고 늘어진 거다. 찔레꽃 향기가 슬프다고. 그래서 울었다고 말이다. 찔레꽃은 그저 핑계였다.

<기생충>은 훌륭한 텍스트는 다양한 해석을 이끌어낸다는 걸 증명하려고 작정한 듯 했다. 수석, 냄새, 인디언, 모스부호, 계단, 비, 물, 선線 등, 달리의 영화 <안달루시아의 개> 못지 않은 메타포가 넘쳐난다. 하지만 내게 <기생충>은 오로지 ‘대만카스테라’로 통칭 할 수 있는 수많은 ‘망한’ 사람들의 애환을 담은 영화다.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벼락을 맞고 줄줄이 도산한 대만카스테라 점주들 대부분의 처지는 비틀림과 과장을 걷어내면 살고자 몸부림치는 기택 가족이나 가정부 부부와 별반 다를 것 같지 않다.

기택 가족이 폭우를 맞으며 내려온 무수한 계단이 내가 내려온 계단과 오버랩 되면서 찔레꽃 냄새가 되살아났다.

“아버지 제가 돈을 많이 벌어 그 집을 꼭 사겠습니다. 그때 아버지는 그냥 계단만 올라오시면 됩니다.”

이 대사가 충격적 공포와 전율에 역점을 둔 호러이면서 결국은 피가 틔는 스플래터 무비 (splatter movie)인 블랙코미디의 절정이다. 영화 통틀어 가장 슬픈 대사가 너무 허무맹랑해 웃고 말았다.

한 번 추락하면 이전 상태로의 복귀가 거의 불가능한 공고한 시스템 속에서 아들이 아버지를 구해 내겠다는 건 그저 허황된 계획일 뿐이다. 모든 예술 작품에게 미래에 대한 핑크빛 전망을 바라거나 정신적 위안을 구할 만큼 순진하지는 않다. 하지만 아들의 마지막 독백이 현실이 되는 기적급의 반전이 마련되기를 간절히 기구할 정도로 픽션에 몰입했다.

그런데 거처가 공중이든 지상이든 지하이든 아무리 급을 나누어도 인간의 삶의 방식도 본질적으로 기생이 아닌가. 자식은 부모에게, 또 부모는 자식에게, 부부는 배우자에게. 작은 권력은 큰 권력에게. 기업은 대중에게…. 거칠게 말하자면 깜냥껏 재주껏 숙주에 빨대를 꽂고 삶을 영위한다는 점에서 상층부든 하층민이든 모두 기생충이다. 결국 같은 처지의 벌레 끼리 서로 궁휼히 여기며 공생하며 상생해야 지당하거늘, 인간 대부분은 그럴 능력이 없다는 걸 다시 한 번 확인했다.

어두컴컴한 극장을 나오자 초여름의 햇살이 무차별적으로 쏟아졌다. 찔레꽃 향기가 너무 슬펐던 그 봄날이, 바닥이었던 자존감을 끌어올리는데 걸렸던 세월이 떠올라서일까. 눈이 시큰거렸다.

'수필 읽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은행나무 / 김잠복  (0) 2020.11.10
인(仁)을 밟다 / 이능수  (0) 2020.11.10
구멍 / 엄옥례  (0) 2020.11.09
규곤시의 방 / 양태순  (0) 2020.11.04
도다리 쑥국 / 김은주  (0) 2020.11.03
공지사항
최근에 올라온 글
최근에 달린 댓글
Total
Today
Yesterda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