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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월영교의 약속 / 이윤재

부흐고비 2020. 11. 12. 06:27

2020 경북문화체험 전국수필대전 입선

“여보, 우리 함께 누우면 언제나 나는 당신에게 말하곤 했지요. 여보, 다른 사람들도 울이처럼 서로 어여삐 여기고 사랑할까요?”

이렇게 속삭이며 당신 가슴팍으로 파고들면 언제나 당신은 나에게 둘이 머리 희어지도록 살다가 함께 죽자고 하셨지요.

“그런데 어찌 나를 두고 당신 먼저 가십니까? 나와 어린 자식은 누구의 말을 듣고 어떻게 살라고 다 버리고 당신 먼저 가십니까?”

어린아이를 두고, 또 둘째를 임신 중인 아내를 남기고 31살의 젊디젊은 남편이 죽었다. 편지를 쓴 여자는 이응태의 부인인 원이 엄마였다.

구구절절 남편을 사랑한다는 원이 엄마의 편지가 460여 년을 잠자다가 남편 무덤에서 나왔다. 옆의 원이 엄마 무덤에서는 생전에 병중인 남편의 건강을 비는 마음으로 만든 미투리가 발견되었다. 이 미투리는 놀랍게도 원이 엄마의 머리카락을 잘라 만든 것이었다. 우리는 흔히 상대방에게 일편단심을 전할 때 머리를 잘라 신을 삼으며 남편의 쾌유를 빌던 바로 그 여자였다. 여필종부로 살면서 백년해로하겠다는 원이 엄마의 구구절절한 편지는 내 마음에 전율로 다가왔다.

안동의 낙동강 상류에 가면 월영교를 볼 수 있고 거기에는 세월의 시공을 뛰어넘은 원이 엄마의 사랑이 숨 쉬고 있다. 월영교란 명칭은 댐 건설로 수몰된 월영대가 이곳으로 옮겨온 인연으로 지어진 이름이라 한다. 낙동강을 감싸듯 안은 산세와 댐으로 이루어진 울타리 같은 지형은 밤하늘에 뜬 달을 마음속에 파고들게 한다. 천공으로부터 내려온 달을 강물에 띄우니 바로 가슴에 스며든다. 아린 달빛은 꿈을 일깨우고 다시 호수의 달빛이 되어 아름다운 기억으로 남으려 한다. 월영교는 이런 자연풍광을 드러내는 조형물이지만, 그보다 이 지역에 살았던 이응태 부부의 아름답고 숭고한 사랑을 오래도록 기억하고자 만들었다고 한다. 먼저 간 남편을 위해 아내의 머리카락으로 만든 한 켤레 미투리 모양을 이 다리 모습에 담았다. 또 그들 부부의 아름답고 애절한 사랑을 영원히 이어주고자 오늘 우리는 월영교를 만들었다고 한다. 세월을 뛰어넘은 우리는 다리 위에 올라 이들 부부의 숭고한 사랑을 달빛에 담아 모두의 사랑과 꿈으로 연결하여 승화시키고자 한다.

예나 지금이나 가는 말이 고와야 오는 말이 곱듯, 사랑도 가는 사랑이 있어야 오는 사랑이 있는 것 아니던가? 그런데 우리는 흔히 부부간에도 서로 나한테 잘해주기만을 바란다. 나는 평생을 살아오면서 아내에게 따뜻한 말 한마디 건네지 않았다. 그러면서 아내한테 오는 사랑만 바라며 살았으니 이 얼마나 이기적이었던가? 우리는 여행을 하면서 남겨진 유적과 유물에만 그 값어치를 매기곤 한다. 바탕에 깔린 무형의 문화인 정신세계는 등한시하고 있으니 자신을 변화시킬 양식을 얻지 못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우리는 우연한 인연으로 남자와 여자가 만나 가정을 이룬다. 연애를 할 때는 흔히 콩깍지가 씌어 온통 좋은 것만 보인다. 그런데 막상 결혼을 하면 온갖 허점이 다 보이니 이젠 반품할 수도 없다. 예전 시골에 살 때 농사를 짓자면 농부는 우시장에서 농우를 사 오는 때가 있다.

“이 농우는 일도 잘하고 1년에 한 번씩 새끼도 잘 낳습니다.”

우시장에서 상인의 말에 현혹된 농부는 농우를 사 와 쟁기를 채우고 밭을 갈려면 상인의 말은 딴판이었다. 일을 잘하기는커녕 농부의 리듬과 맞지 않고 성질은 왜 그리 괴팍한지…. 농부가 얼마 동안 참으며 논과 밭을 가는 일을 시키려고 해도 도대체 말을 듣지 않는다. 참다못한 농부는 소를 끌고 시장에 나간다. 다른 사람을 속여 농우를 팔고 일 잘하는 소와 바꾸려고…. 우리는 흔히 이런 행동을 개비라고 한다.

그런데 농부와 농우의 만남에는 개비가 적용이 되지만 사람과 사람의 만남에 개비를 적용할 수는 없는 것이 아니던가? 그러니 사람과 사람의 만남으로 부부가 되었음은 오로지 서로 참고 사는 것이 바로 인생인 것이다. 그런데 요즘 사람들은 인내심이 부족해 참으려고 하지 않는다. 그러다 보니 서로에게 손가락질을 하며 단점을 캐다 못해 개비를 하려고 한다. 이것이 바로 이혼인 것이다. 거기다 한술 더 떠서 이제는 농부가 소를 개비하는 것이 아니라 소가 농부를 개비하고 있으니 요지경 세상이다. 조선 500년 남존여비의 유교적 사상이 근간을 이루었던 시대는 여자에게 무조건 희생을 강요했지만 시대가 변한 지금은 아니다. 그런데도 남자는 여자에게 유교적 사상을 강요하고 때문에 다툼이 잦고 이혼율이 높은 것이다. 양성평등을 부르짖는 현시대에 나는 평생토록 아내를 하대하며 살았으니 과연 내게 무엇이 돌아올 수 있었겠는가? 우리가 흔히 하는 말이 있다.

‘여우하고는 살아도 소하고는 못산다.’

그러나 날이면 날마다 여자가 여우짓을 할 수는 없는 것이다. 아내가 시도 때도 없이 남편의 가슴팍에 파고들 수도 없는 일이다. 때론 여자도 소와 같이 우직할 때가 있다. 그럴 때는 남편이 여우가 될 수도 있는 것이 지금의 세상이다. 이렇게 부부가 정과 사랑을 주고받을 때 이응태 부부가 될 수 있고 원이 엄마의 애절한 사랑을 맛볼 수 있는 것이다.

원이 엄마의 테마공원을 돌아 월영교를 지나자니 하루 3번 가동된다는 분수가 시원하게 물줄기를 뿌린다. 그 물이 혹시나 원이 엄마의 한이 아닐까 하여 마다치 않고 맞아봤다. 그리고 아내 손을 꼭 잡았다.

“앞으로 내가 잘할 테니, 우리 앓지 말고 올애도록 살다 함께 갑시다.”

일흔을 바라보는 나이에 아내 손을 처음 잡았으니 쑥스러웠지만 죽음이 갈라놓기 전에는 절대 손을 놓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수 상 소 감


안동의 월영교를 둘러보고 쓴 글을 뽑아줘서 고마운 마음이 든다. 내가 돌아본 경북의 문화를 소개할 수 있어 기쁜 마음이다. 우리나라의 문화 중 경북만큼 다양한 문화는 없다고 생각한다. 불교와 유교 문화가 가장 발달했던 곳이 바로 경북이 아니던가? 또 조선시대 가장 유명한 유학자는 경북에서 나오지 않았던가? 그런 경북을 돌아볼 수 있는 기회를 준 대구일보에 감사드린다.
△1974년 공주교육대학 졸업 후 서산에 교사생활 △1988년 대전으로 전입 △2005년 대전에서 교장 승진 △2013년 퇴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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