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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이 자리에서 말씀드릴 자존심은 일상적인 의미로 말하는 자존심, 예컨대 "내가 이런 지위인데 어디에 가서 이런 대접을 못 받았다, 그래서 자존심이 상한다"라는 차원이 아니라 '자기에 대한 존중'이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자기를 존중하는 사람은 자기가 사회적 지위가 어떻든 그래서 어디서 낮게 평가를 받든 이른바 자존심이 상하지 않거든요.

자존심을 다루는 철학을 자기를 배려하는 미학적 윤리학 곧 존재미학이라고 할 수 있는데 존재미학이라는 것은 원래대로 번역하면 실존미학이라고 해야 됩니다. 철학에서는 '존재'와 '실존'을 구별하는데 존재는 그냥 있는 상태고, 실존은 어떤 것이 자기 규정에 맞게 참되게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인간으로 또 생물학적 종으로 있는 것은 존재에 지나지 않고, 인간이 정말 인간답게 사는 것을 흔히 실존이라고 합니다.

실존미학의 가장 큰 바탕이 바로 자기에 대한 존중입니다. 자기에 대한 존중은 자기에 대한 배려겠죠. 자기를 존중하면 자기 삶을 내팽개치는 게 아니라 될 수 있으면 자기 삶을 윤리적으로 또는 미적으로 아름답게 가꾸려는 욕구가 생기고 그것을 삶에서 최고 목표로 삼게 되죠. 그래서 자존심이라는 것은 결국 구체적으로 자기에 대한 배려, 자기 삶에 대한 배려로 나타나고요.

우리가 흔히 주체라고 부르는 것은 사실 인간관계 망에 의해 만들어지거든요. 또 내가 갖고 있는 의식이라고 하는 것은 내가 직접 생각한 것이 아니라 많은 경우에 사회적으로 거론되는 이야기들이 내 안에 들어와서 조합된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거죠. 이 이야기를 멋있는 말로 하면 주체라는 것은 권력의 효과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어떤 사회든 자기 코드에 맞게, 자기 사회 필요에 맞게 인간들을 뜯어 고쳐요. 그래서 벗어나면 처벌하고요.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흔히 '자율적 주체'라고 이야기하는 것이 사실 한때는 타율이던 것이 내재화된 것에 지나지 않거든요....자율이라고 하는 것이 얼마나 자율인가 하는 것이죠. 흔히 말하는 자율이란 게 사실은 내면화된 타율에 지나지 않고 바깥에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권력이 내 안에 들어와서 체화된 상태입니다.

마찬가지로 내가 갖고 있는 의견, 내가 갖고 있는 견해, 내가 갖고 있는 생각들 이것들도 가만히 보면 바깥에서 떠드는 겁니다...그런 방식으로 한 사람이 자기가 원하는 대로 못하도록 가로막는 굉장히 많은 권력의 망들이 존재합니다. 그런데 그걸 뚫고 자기 자신을 관철시키려면 굉장히 힘들죠. 그렇기 때문에 살아남기 위해서 또는 그야말로 존재를 위해서 자기의 진짜 존재 곧 실존을 포기해야 하는 상황들이 벌어지곤 합니다.

어떤 사람의 존재미학이 가장 잘 드러나는 순간은 위험할 때, 어려울 때 그 사람이 어떤 선택을 하느냐입니다. 여유 있을 때 그렇게 하는 것은 하나도 멋있는 게 아니예요. 전혀 여유가 없고 정말 힘든데 어떤 어려운 결정을 했을 때 그것이 멋있는 것입니다. 원한을 갚기보다는 오히려 그런 상황에 놓인 자기 삶 자체를 작품으로 끌어올릴 굉장히 중요한 결정적 계기로 여기는 유희정신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그런 주인의 도덕의식을 갖고 있는 사람은 사회적 지위가 아무리 낮더라도 자기 삶 속에서 자기가 하는 일에 늘 보람을 느끼고 자기 상태가 늘 그저 그렇다 하더라도 전혀 열등의식 같은 것을 느끼지 않고 오히려 그런 상황 속에서 훨씬 더 주인의식을 느낍니다.

진짜 자존심 있는 사람들은 흔히 우리가 말하는 범상한 의미에서 그런 쓸데없는 자존심을 부리지 않습니다. 누가 지적하더라도 받아들이고 그것을 평가해줍니다. 아무리 자기에게 적이라고 해도 훌륭한 점에 대해서는 훌륭하다고 평가하는 그런 여유가 있다는 것은 바로 그만큼 그 사람의 존재가 풍부하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요만한 일에도 흥분하고 요만한 일에도 인정하지 않고 고집부리는 것이야말로 자기를 배려하지 못하고 자기를 존중하지 못하는 태도라고 생각합니다. 존재미학이라는 것은 결국은 자기 자신을 배려하고 자기를 존중하는 마음에서 출발하는 게 아닌가 하고 생각해 봤습니다.

 

내가 돈이 없지, ‘가오’(얼굴을 뜻하는 일본어로 체면, 자존심을 뜻함)가 없나. 이젠 자유다!(2019.12.19. 페이스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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