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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모원려(深謀遠慮)

부흐고비 2020. 12. 9. 14:16
번 역 문


의주 변경 멀고 아득하니/ 나라의 서쪽 국경이라
백성들 채무로 곤궁하여/ 물에 빠진 듯 불에 타는 듯하였도다
공이 그 장부 불태워/ 재물 버리고 사람 구하니
우리 백성 재앙의 구덩이에서 건져내고/ 우리 백성 이익의 근원 넓혀주었도다
옛날에는 구렁텅이에 떨어져 있었는데/ 지금은 전원에서 편하게 지내니
들에는 뽕과 삼이 있고/ 울짱에는 닭과 돼지 있도다
이에 배불리 먹고 노래하며/ 자식을 먹이고 손자와 장난치니
어찌 공의 덕이라 하랴/ 어지신 성군 덕이로다

灣塞遙遙 만새요요/ 國之西門 국지서문
民困于貨 민곤우화/ 如墊如焚 여점여분
公火其籍 공화기적/ 以財易人 이재역인
脫我禍穽 탈아화정/ 弘我利源 홍아리원
昔阽溝壑 석점구학/ 今安田園 금안전원
野有桑麻 야유상마/ 柵有鷄豚 책유계돈
載飽載歌 재포재가/ 哺子弄孫 포자롱손
豈曰公德 기왈공덕/ 聖后之仁 성후지인

- 홍양호(洪良浩, 1724~1802), 『이계집(耳溪集)』 권7 「오천 이상국 용만 기혜비(梧川李相國龍灣紀惠碑)」 명문(銘文)

 

해 설


이 글은 영ㆍ정조 시기 문신으로 평안도 관찰사, 대제학 등을 지냈던 이계(耳溪) 홍양호(洪良浩)가 평안도 관찰사 이종성(李宗城)의 공적을 칭송한 비문(碑文)의 명(銘)이다.

국가의 정책은 거시적이어야 하고 당장의 칭찬과 비방에 흔들리지 말아야 한다. 이는 고금의 철칙이다. 의주는 조선 시대 서쪽의 변경 고을이다. 고을은 작으나 사행을 접대하고 청(淸)과의 교역을 담당하여 업무가 과중했다. 그에 따른 재정 부담이 극심하여 의주 백성들의 원성과 요구가 비등했음은 물론이다. 나라의 중한 업무가 변경의 작은 고을에 일임되었던 탓에 조정에서 여러 정책과 지원책이 뒤따랐다. 당시 조선 조정이 취한 정책 가운데 하나가 자금 지원이다. 중앙 정부와 평안도 감영에서 의주부로 지원한 예산 중 일부를 의주 백성들에게 대출해 주고, 대출 받은 백성들은 이를 밑천으로 청나라와 무역하여 이익을 남겼다. 그리고 얼마간의 이자를 붙여 의주부에 상환하면 의주부는 다시 이 돈을 재정으로 충당하였다. 백성이라고 하지만 기실 의주의 주 생업은 상업이었으므로 이때 백성은 곧 만상(灣商)이라 불리던 의주 상인이다. 이는 17~18세기 의주만의 독특한 상황이다. 쉽게 말하면 조정에서 식리(殖利) 사업을 벌여 한편으로는 백성에게 당근을 주어 달래고 한편으로는 막대한 소요 재정을 충당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는 유동적인 환율과 국제 경제 상황을 거시적으로 판단하지 않고 목금(目今)의 이익과 안정만 생각한 조치였다. 얼마 안가 청나라 경제 상황이 바뀌어 화폐인 은(銀) 가격이 요동치자 그동안 과도한 대출을 해왔던 의주 백성들은 시장과 환율의 변화를 감당하지 못하고 막대한 부채를 떠안는다. 이 부채가 영조(英祖) 당시 무려 70만 민전(緡錢)에 이르렀다. 그런데 관에서 내놓은 해결책은 손실액을 가호(家戶)와 인구(人口)마다 부과하여 징수하는 것이었다. 백성들은 부채를 피해 뿔뿔이 흩어지고 관아에는 주인 없는 장부만 덜렁 남는다. 상환의 책임은 친족과 이웃에게 연좌된다. 이를 견디지 못해 다시 달아나는 악순환이다. 경작지의 절대 부족으로 백성들이 거주할 만한 입지가 못 되는 의주에서 재정 파탄과 호구 감소는 고을 존속은 물론 변경 업무를 의주에 일임한 국가로서도 치명적이었다. 민관이 함께 피폐하는 사태가 초래되고 만 것이다.

이것이 이 명문의 배경이 되는 조선 후기 의주부의 특수한 처지이다. 당시 평안도 관찰사로 부임한 이종성은 이 문제의 타개를 위해 파격적 조치를 취했다. 바로 명문에 언급한 것처럼 장부를 불태우는 일이다. 비문에 그 내용이 자세한데, 이종성은 관찰사로 부임해 도내를 순시하면서 의주에 당도하자마자 모든 채권을 거두어 오게 하였다. 상환 독촉을 위한 것이라 짐작한 의주 부윤 권일형(權一衡)은 이 일로 죽어나갈 사람이 많을 것이라며 몹시 안절부절 했는데 막상 벌어진 일은 더 기절초풍할 일이었다. 불을 가져오게 하여 그 자리에서 채권을 불살라 버린 것이다. 어차피 돈을 받아내기 어렵고 백성들의 이산(離散)만 불러오는 상황에서 채권이 한낱 종이조각에 불과하다지만 독단적으로 나라의 채무와 관련된 증서를 불태우는 것은 죄를 받을 수도 있는 일이다. 그러나 이종성은 요즘 하는 말로 다 계획이 있던 모양이었다. 그는 청나라에서 돌아오는 사행을 맞이하러 수백 필의 말을 끌고 나가는 만상(灣商) 편에 조선에는 남아돌지만 청나라에서는 필요로 하는 피혁(皮革) 제품을 교역하여 부족한 은의 세수를 메꾸는 대안을 마련해 조정에 보고해서 인가를 받았다. 결과는 성공적이었다. 교역이 이루어진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열 배 내지 다섯 배의 이익을 거두게 되고, 떠돌아다니는 신세였던 백성들은 다시 돌아오고 채무에 시달리던 백성들은 짐을 벗게 되었다.

한 번 위기가 벌어지고 그 위기가 눈덩이처럼 불어나 누구도 손 쓸 수 없는 상황이 되면 모두가 그 일에 발을 담그고 싶어 하지 않는다. 관원의 복지부동과 명철보신은 어찌 보면 자기 생존의 발로이다. 해결을 해봐야 큰 공은 되지 못하고 잘못하면 비난과 처벌이 뒤따를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관원은 생민의 안녕과 생사를 부탁받은 이가 아니던가. 이종성의 처결은 결과적으로는 잘 된 일이지만 결행은 매우 어렵다. 어떤 관원이 감히 죄를 받을지도 모를 큰 처결을 내릴 수 있겠는가. 그러나 작은 일에는 작은 지혜와 작은 결단이, 큰 일에는 비상한 큰 지혜와 큰 결단이 필요한 법이다. 바야흐로 큰 재난의 시대를 살고 있다. 이러한 때 큰 일을 맡은 사람이 심모원려하지 않고 당장의 미봉에만 급급한다면 지난날의 의주가 오늘날에 펼쳐 지지 않을 줄 누가 알겠는가. 생민의 안녕과 생사를 부탁받은 이들이 비상한 지혜와 결단으로 이 혼란을 잘 이겨나가기를 바랄 뿐이다.

더불어 지금은 공화(共和)의 시대이다. 일인의 영웅을 바라면서 문제의 해결을 기다리고 있기에는 우리가 구축한 시스템이 그에 걸맞지 않다. 배불리 먹고 노래하며 자식을 먹이고 손자와 장난치는 일이 어찌 한 사람의 능력에만 달린 일이겠는가. 또한 공화하는 우리 모두의 심모원려에 달려 있지 않겠는가.

글쓴이 : 이승현(성균관대학교 대동문화연구원 권역별거점번역연구소 책임연구원)

* 심모원려(深謀遠慮)

 ‘깊이 고려하는 사고와 멀리까지 내다보는 생각’이라는 뜻.

무경십서(武經十書, 중국의 고대 병법서)에 나오는 말. 무경십서는 《손자병법》 《오자병법》 《사마법》 《울료자》 《당리문대》 《육도》 《삼략》 무경칠서에 《손빈병법》 《장원》 《삼십육계》를 합한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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