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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12월에 대한 경배 / 정목일

부흐고비 2020. 12. 17. 08:37

12월의 달력을 보면 문득 경배하고 싶어진다.
촛불을 켜놓고 고요의 한 가운데 앉아 기도하고 싶다.

오, 일 년의 마지막 이 순간까지 무탈하게 지내온 것은 얼마나 큰 축복인가. 12월의 달력을 보면 4백M 계주 경기 모습이 떠오른다. 초등학교 운동회의 마지막은 400M 계주로 장식되곤 했다. 운동장에선 환호와 박소소리가 터져 나오고 신바람은 절정에 달했다. 승패를 좌우하는 마지막 게임이며 바턴 터치에 따라 희비가 엇갈리기도 하여, 마지막까지 마음을 놓을 수가 없다. 응원자들도 선수들과 함께 마음으로 마지막 골인선으로 있는 힘을 다하여 달려가는 400M 계주-. 12월은 4계절을 달려 골인선으로 달려가는 모습을 떠올리게 한다.

12월은 연말이고 연시를 앞두고 있어서일까, 일 년을 성찰하고 정신을 차리기도 전에 지나가버리고 만다. 크리스마스가 있고 송년회가 잇달아 열린다. 크리스마스와 새해를 축하하는 엽서를 산다. 만남의 인연을 생각하고 감사와 은혜를 되새긴다. 또한 한해를 보내는 흥분과 후회, 실의와 기대가 뒤섞이는 묘한 감정에 빠지기도 한다. 전율과 흥분에 휩싸이기도 하고 허탈, 공허, 후회가 짓누르기도 한다.

12월엔 명상의 한 가운데에 촛불을 켜놓고 싶어진다. 내가 보낸 일 년에 감사하고 기억하며 전송하고 싶다. 한 동안 세상으로부터 버림받은 듯한 소외감을 느낄 때도 있었다. 망각의 뒤편으로 내몰려 잊혀져가는 존재처럼 가련하게 여겨지기도 했다. 아이들 손에 더듬이를 떼인 곤충처럼 방향감각을 잃어버린 듯했다. 허무 속에 허둥거리며 세월을 보낸 때도 있었다.

지난 여름, 한 미술전시회에 관람하러 갔다. 미술의 영역은 종전의 장르개념을 초월하여 새로운 세계로 확대되고 있다. 한 작가의 설치물에서 깊은 생각에 빠져들었다. 사람이 살지 않는 빈 아파트 내부를 보여주고 있었다. 침실, 거실, 목욕탕 등이 보이고 실내엔 먼지만이 수북히 내려앉아 있는 망각과 버림의 비어 있는 공간이었다. 침대와 책 위에 내려앉은 먼지-. 이것은 죽음과 망각, 소멸의 조짐과 표정을 말해주었다. 생명과 삶의 흔적은 한동안 시. 공간을 차지하다가 사라지고 말며 망각의 먼지들만이 자욱하게 남는다는 것을 말하고 있었다. 삶의 흔적 위에 남아있는 것은 먼지뿐이었다.

문득 이 망각의 집, 먼지의 집안에 들어서서 촛불을 켜놓고 싶었다. 어쩌면 인간은 모두 이 망각의 집에 살다가 먼지를 남기며 사라지는 존재들이 아닌지 모른다. 나이가 들면서 가슴을 짓누르는 것은 보이지 않는 시간의 압박이었다. 젊었을 땐 시간에 따르기만 하면 하루가 지나갔으나, 나이가 들면서 자신이 시간을 운영해야 한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시간에 대해 수동적인 자세를 취해오던 삶의 관행에서 벗어나 능동적인 자세가 돼야 한다는 걸 알게 된다.

주어진 오늘이 있음은 은혜롭다. 하루와 눈맞춤하고 호흡을 맞추면서 행복감을 얻게 되었다. 무료도 좋았고 심심해도 괜찮았다. 심심풀이로 글을 쓰는 것도 좋기만 했다. 원대한 꿈을 꾸지 않고, 거창한 소망도 없었으며 권력이나 금력도 바라지 않았다. 무턱대고 희망에 기대고 행운에 추파를 던질 필요가 없어졌다. 오늘 할 일을 찾아 성실을 다하고 후회없이 살기만 하면 내일에 의지하고 기댈 필요도 없어진다.

어떻게 마음을 맑게 할 수 있을까. 마음이 가벼워지기위해서 집착, 이기, 욕망을 들어내고 깨끗이 씻어낼 수 있을까. 마음을 텅 비워야 자유로워질 수 있지 않겠는가.

떠오르는 해를 보고 경건하게 하루를 맞으며, 지는 해를 보며 하루를 장식하고 싶다. 하루를 거룩한 눈으로 지켜보며 정성을 다하여 맞고 싶다. 신이 주신 귀중한 시간들에 순간마다 최선을 다하고 감사로 맞고 싶다. 의미 있는 하루를 어떻게 만드나 하는 것은 자신에게 달려있다.

12월의 달력을 보면 끓어앉아 경배를 드리고 싶다. 일 년을 무사히 보내게 해 준 것에 감사하면서 남은 날들을 의미의 노래로 가득 채우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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