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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구월 / 정목일

부흐고비 2020. 12. 16. 13:32

구월은 뜨거운 땡볕이 물러가고 하늘이 창을 열고 얼굴을 내 보이는 계절…….

하늘은 맑은 표정을 보이고 비로소 마음을 연다. 어느새 선선해진 바람도 들국화나 코스모스 꽃향기를 실어 오고, 열린 하늘을 향해 피리를 불면 가장 멀리까지 퍼져나갈 듯싶다.

구월은 그리움의 심연에 조약돌이 풍덩 날아들어 잔잔히 물이랑을 이루며 마음 언저리에 밀려오는 듯하다. 맑은 하늘을 보고, 햇볕을 편안하게 맞아들이며 가을의 속삭임에 귀 기울일 수 있는 계절이다.

구월은 야단스럽지 않다. 맑음과 그리움을 안고 다가온다. 초록으로 덮인 산과 들판이 조금씩 가을 색감으로 채색돼 간다. 하늘이 열려서 무한 공간과 만날 수 있는 달이다. 가슴을 펴고 푸른 하늘을 바라볼 수 있어야 마음이 넓어진다. 영혼은 점점 깊어지고 사색에 잠겨보기도 한다. 고독과 사색은 교감과 소통을 위한 다리가 아닐까. 구월이면 초목들도 성숙과 사색의 시간을 갖는다.

오곡백화가 제 모양 제 빛깔로 튼실하게 여물어가는 계절이다. 가을의 초입, 가을의 문이 열리고 이제 한해살이를 성찰하고 남은 기간에 결실을 어떻게 이뤄야할지, 자문자답(自問自答)하는 시간 앞에 선다.

자신이 서 있는 삶의 좌표는 어디이며, 일 년의 주제와 삶의 의미는 무엇인지를 점검하는 순간이다. 9월은 아쉬움과 미숙으로 남는 인생길에서 하늘을 우러러 영원을 바라보며 기도를 바치고 싶은 달이다.

길가에 가을맞이 코스모스 꽃이 갸날픈 얼굴로 미소 짓고, 매미는 판소리 마지막 대목의 절창을 뽑아 댄다. 십 수 년간 땅속의 어둠 속에 굼벵이로 살다가 십 일도 못 된 삶을 마쳐야 하는 매미의 열창이 짜르르 가슴을 파고든다. 낮게 뜨는 붉은 고추잠자리는 맑은 하늘을 유유히 헤엄치고 있다.

구월이면 산, 들판이나 강가에 나가보고 싶다. 구절초 꽃, 쑥부쟁이 꽃 등 온갖 풀꽃들이 피어 햇살 속에 향기를 내는 모습을 본다. 구월이 되면 이제는 무엇이든 익어가고 성숙해지고 있음을 볼 수 있다. 무언지 그리워지고 눈물겹고 마음이 깊어지고 있다.

구월은 하늘과 함께 마음도 열리는 계절이다. 마음 거울에 자신의 영혼을 비춰볼 수 있는 달이다. 들판 길을 걸어보라. 아직 추수 때가 되진 않았지만, 농작물들은 농부들의 땀과 정성에 고개 숙이며 마지막 결실기를 맞아 기도를 올리고 있다. 구만리 먼 하늘을 날아서 겨울 철새들은 지금 어디쯤 오고 있을까.

구월이면 저절로 그리움의 가슴과 귀가 열린다. 들리지 않던 풀벌레소리가 베개 맡에 들려오고 달빛이 창문을 물들이고 있다. 불현듯 벗님의 안부를 묻고 싶고 육필 편지를 보내고 싶은 충동을 일으킨다.

구월쯤이면 일 년의 한해살이를 뒤돌아보며 삶의 의미를 짚어보아야 할 때이다. 마음이 왠지 경건하고 겸허해진다. 푸르던 들녘이 차차 황금빛으로 물들어 가고, 나무들은 일 년의 삶을 압축하여 한 줄씩 아름다운 목리문(木理紋)을 아로새기는데, 나는 어떤 의미의 연보(年譜)를 작성할 것인가.

구월이면 깨닫곤 한다. 모든 식물들의 삶은 열정과 충일로 가득 차 있다. 언제나 떠오르는 해처럼 경건하게 하루를 시작하고 지는 해처럼 장엄하게 하루를 장식한다. 해를 바라보고 하늘과 대화하면서 일생을 꽃피우고 결실을 맺는다.

구월이면 무명의 풀이 되어 온전히 맺은 풀씨를 대지에 뿌리고 싶다. 구월은 날마다 깊어지고 성숙해지는 계절의 모습을 보여준다. 영원의 시·공간에서 그리움의 선율이 들려올 듯 한 달이다. 묵혀 둔 만년필에 넣어 잉크를 넣어 편지를 써 보내고 싶은 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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