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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겨울의 기침 소리 / 이어령

부흐고비 2021. 2. 3. 08:54

겨울의 시인들은 모두 감기에 걸려 있다. 그래서 그들이 시를 쓰는 것은 바로 그들의 기침 소리이기도 한 것이다.

겨울밤에는 문풍지를 울리는 바람 소리나 강에서 얼음 죄는 소리만이 들려오는 것은 아니다. 가만히 엿듣고 있으면, 어디에선가 기침 소리가 들려온다. 기침 소리는 허파의 가장 깊숙한 밑바닥에서 울려 나오는 소리이다.

그 소리는 아직도 허파 속에 생명이 숨 쉬고 있다는 선언이며, 겨울잠에서 깨어나라는 경고의 목소리이다. 기침 소리는 무슨 음악처럼 박자나 화음이나 음계 같은 것으로 울려 오지 않지만, 혹은 언어처럼 명사와 동사 그리고 그것을 수식하는 형용사와 부사 같은 문법(文法)으로 이야기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러나 어떤 미열과 고통 그리고 미세한 바이러스를 거부하는 분노 같은 힘들이 묘하게 어울려 번져 가는 생명의 리듬이 있다.

겨울밤에 기침 소리를 듣고 있으면 어느 병원에서였던가, 석회벽(石灰壁)에 걸려 있던 원색의 인체 해부도가 떠오른다. 심장과 가장 가까운 거리에 있는 두 개의 허파는 마치 이른 봄에 피어나는 떡이파리와도 같다. 강이 흐르듯 빨갛고 파란 혈맥들이 막 피어나는 그 이파리들을 따뜻하게 감싸주고 있다.

겨울밤에 기침 소리를 듣고 있으면, 옛날 어린 시절, 음악 교실에서 울려 오던 풍금 소리가 생각난다. 허파는 폐달처럼 움직이고, 하나 가득 바람을 불어넣고 또 불어넣어 여러 색채의 소리를 만들어낸다. 가장 나지막한, 저음부 기호로 울려 오던 풍금 소리가.

당신이 기침을 할 때, 우리는 눈이 내리고 있는 숲속의 외딴집을 생각한다. 춥고 긴 그 겨울 동안 길은 막히고 의사를 부르러 간 썰매만 돌아오지 않는다. 도시의 문들은 모두 닫혀 있고 의사는 어디에선가 추위를 견디기 위해 위스키를 마시고 있을 것이다.

용서하라, 내가 지금 당신의 기침 소리를 듣고 도와줄 수 있는 것은 이마의 열을 식히기 위해 단지 물수건을 갈아 주는일 뿐이다. 그리고 당신의 기침 소리에 전염되어 가슴이 찢어지도록 헛기침이라도 해보는 일이다.

그러나 안심하라, 우리는 기침 소리를 듣고 있다. 생명의 절규와도 같고 근엄한 경고와도 같은 그 소리에서 봄의 떡이파리처럼 피어나는 허파, 풍금 소리처럼 울리는 그 허파를 생각한다. 아! 지금 우리는 살아있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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