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수필 읽기

만년 과도기萬年過渡期 / 윤재천

by 부흐고비 2021. 2. 11.

중국의 황하(黃河)는 백년하청(百年河淸)이라했다. 강물이 맑고 푸른 날이 없다는 뜻이다. 강물이 맑고 푸름은 인간의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기후와 풍토가 그 강물을 푸르고 맑게 두질 않으니 아무리 맑은 강을 기다리며 백년을 보내도 푸를 수가 없는 것이다.

해방 후, 지금까지 우리 국민은 크고 많은 일을 거쳐 왔다. 한일합방 이후 36년간, 일제 치하의 굴욕되고 자유가 없던 세월을 지나 아무 준비 없이 맞은 해방은 우리에게 너무 많은 자유의 기쁨을 주었고 그 기쁨을 내 것으로 만들려는 순간에 6·25의 민족적 수난을 겪어야 했다.

사변의 참해를 씻고 휴전이란 푯말 앞에서 부흥과 복구에 집념하면서 집념이 차츰 타성과 나태로 변했다. 사리사욕만을 일삼던 아집스런 집권에 대한 반발로 학생의 분노는 4·19의거를 맞았다. 정치적으로 혼란스럽고 국민이 갈피를 잡지 못해 우왕좌왕하면서 또 한번의 혁명을 맞아야만 했다.

분단된 국토에 헤어진 민족의 비극은 커다란 불행을 자초했고, 그 불행은 우리에게 시시각각 육박해 오고 있다. 이렇듯 우리 민족의 역사는 수난과 고난이 점철되어 엮어진 것이다.

커다란 역사적인 사실이 이 땅 위를 지날 때는 그때마다 크고 무서운 소용돌이가 생긴다. 자칫 그 와중으로 휩쓸리기도 하고, 한 발 잘못 디뎌 거센 소용돌이에 말리기도 한다.

소용돌이쳐 쏟아져 흐르는 힘은 참으로 무서운 것이다. 흐르고 난 다음에는 또 여울이 진다. 잔잔하든, 거세든 한번 여울이 지면 이 여울을 건너듯 우리 국민은 늘 소용돌이를 무서워하고 거센 여울을 건너기가 힘들었다. 이러한 잦은 횟수는 습관을 만들고 구실을 만들었다.

과도기― 이런 시기를 이름해서 과도기라 불러왔다.

급변하는 사태는 맞이하는 사람을 항상 어리둥절하게 한다. 혼돈 속에서 안정을 찾기 전에 다른 사태가 생기면 혼돈의 와중으로 말려 가고, 과도기는 연속되어 길어진다.

오늘에서 내일까지, 아니면 어제와 오늘 사이에 발전이 있고, 달라지는 게 있어야 할 것은 사실이다. 오늘이 어제와 같고, 내일이 오늘과 같다면 우리 사회는 침체되고 정지된 상태에 머물게 된다.

이렇게 되면 보다 잘살 수 있는 가능성은 무너지고 말는지도 모른다.

어제와 오늘은 달라져야 한다. 어제와 오늘이 달라질 때는 보다 바람직한 뱡향으로 전환되어야 한다.

우리에게는 시정되어야 할 낡은 유습, 그릇된 전통과 현대 사회에 잘못된 모순이 도사리고 있어 사회 발전을 지체시키고 있다.

세대 사이의 갈등이라 할까, 낡은 유습과 새로운 사조가 충돌되는 것을 흔히 볼 수 있다. 여기에서 또 하나의 소용돌이가 생기고, 이 소용돌이 속을 지나가자니 과도기 운운이 대두된다.

하루하루 평온한 사태의 진전에 갑자기 홍수가 지고, 큰 변혁이 올 때 거대한 진통의 전환기에 처해진다.

해방 이후 벌써 몇 년인가. 20여 년이 지났다. 말대로 성년 한국이다.

그 사이 숱한 혼란이 거듭되었어도 이젠 20년 성년의 나이에 든 우리나라, 우리의 조국이다.

가끔, 우리는 조국이 주는 환경을 잘못된 변병으로 삼으려 한다. 탓에는 조상 탓과 과도기 탓의 두 가지로 분류할 수 있다. 하다가 안 되면 조상 탓이요, 하다 못 하겠으면 과도기 탓이다. 20년의 세월을 부끄러워할 줄 알아야지 걸핏하면 이를 구실로 눈앞에 닥친 일들을 변명하려고만 할 수는 없다.

이제 여울물이 말끔히 빠지고 질펀하던 흙탕도 말금히 굳어졌다. 물 고인 땅이 굳어진다는 경구(警句)를 되새겨 볼 때이다.

걸핏하면 내휘둘던 ‘과도기’란 어휘는 이제 영원히 잊어버려도 좋을 것이다. 과도기에 처해진 국민임이 자랑일 수는 없다.

비록 과도기에 처해 있어도 아중에 휩쓸리지 않고 과도기를 넘길 수 있는 의지와 신념이 요구된다. 흙탕지고 거세던 물결이 빠져야 한다.

항하가 푸르러지길 바라기는 불가능한 것이다.

황하는 원래부터 황하였기 때문이다. 황하는 백년하청이지만 우리 현실의 만난 과도기는 흘려버려야 한다.

황하의 백년하청과 우리의 만년 과도기가 결코 같은 의미일 수는 없지 않은가.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