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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인생은 산책이다 / 김잠복

부흐고비 2021. 2. 13. 00:08

저는 요즈음 산책을 즐깁니다. 매일 근처 강변길을 따라 한두 시간을 걷다가 돌아옵니다. 하얗게 피어오르는 새벽 물안개, 앙증맞은 노랑머리 유채꽃, 평화롭게 노니는 오리 떼의 아침 나들이를 함께하고 나면 몸이 새털처럼 가볍고 맑아집니다.

저녁나절 산책길은 주로 운동하는 사람들로 부산합니다. 주변 아파트에서 나온 어린아이부터, 노약자까지, 연령대가 다양합니다. 사람들 중에는 이제 가정과 사회에서 할 일을 얼추 마친 중년 부부들이 많습니다. 한정된 시멘트 상자 안에서만 살아가는 이들이 이렇게라도 자연에 몸과 마음을 비비며 호흡을 늦출 수 있다는 것은 여간한 다행이 아닙니다. 몇 해 전까지만 해도 자갈밭이었던 강변을 미끈한 산책로로 닦은 것은 참 잘된 일입니다.

거기서 만나는 사람들 걸음걸이는 참 다양합니다. 몸에 착 달라붙은 운동복을 입고 가볍게 달려가는 이, 양손에다 작은 아령을 쥐고 사색을 하며 천천히 걸어가는 젊은 남자, 귀에다 이어폰을 걸치고 가벼운 걸음걸이로 스치는 젊고 예쁜 여자를 어렵잖게 만납니다. 그러나 그들 중 대부분은 나처럼 산책하듯 쉬엄쉬엄 걸어갑니다. 나름대로 보기가 다 괜찮습니다.

산책은 그다지 운동이 되지 않습니다. 운동으로 치면 달리기만 한 것도 없겠지만, 거기에는 여유가 없습니다. 달리기는 경쟁의 연속으로 비유됩니다. 아무한테나 달리기나 빠른 걸음을 채근한다면 금방 지칠 수 있습니다. 산책은 육체와 정신 운동을 병행합니다. 젊을 때는 젊음의 분발심을 위해 그렇다 할 수 있겠지만, 이순의 중늙은이한테 경쟁자의 삶을 우격다짐한다면 금방 피곤해서 지치고 말 것입니다. 이제 제 몸은 달리기를 거부합니다.

제가 이렇게 걷는 이야기를 하는 것은 걸음걸이와 인생을 비유하기 위해서입니다.

사람들은 흔히 ‘인생은 마라톤이다.’라는 말을 합니다. 인생을 마라톤에 비유하는 것이 적합한가를 곰곰 생각해 봅니다. 마라톤은 달리기이니까 곧 ‘인생은 달리는 것이다’라는 말과 같습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달리면서 어찌 풍광을 제대로 감상할 수가 있겠습니까. 가령 요즈음 같이 볼거리가 다양한 강변 산책로를 달리기로 지나친다면 너무 아쉬울 것 같습니다. 노란 유채꽃고 오리들의 평화로운 나들이를 감상할 겨를 없이 어찌 스칠 수가 있겠습니까. 언제 사러져 버릴 지도 모를 새벽 물안개는 또 어찌하겠습니까.

겨울만치 아름다운 변화를 보여주는 것도 없습니다. 기화요초가 만발하는 봄날을 지나 푸른 물을 뚝뚝 흘리는 갈맷빛 숲, 각혈하는 단풍의 임종 앞에서 가슴앓이를 지나 나목에 내려앉은 새하얀 눈꽃이 전하는 말을 보고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계절마다 펼치는 신의 붓놀림을 오감으로 읽는 방법을 익히며 살 일입니다. 그런 잔치에 내 이웃과 친구를 동반하고 산책할 수 있는 것은 축복입니다. ‘네가 달려가니 나도 달린다.’라는 생각은 자신에게 가하는 가혹한 형벌입니다.

이제 저는 달리기를 거부합니다. 젊어서는 젊음의 꿈을 이루기 위해 그렇다손 치더라도, 나이가 들어가면서까지 달리기를 고집한다는 것은 피곤하고 지치기를 자청하는 일이라 스스로 파괴되고 말 것이니까요.

인생은 산책입니다. 달리지 말고 걸어야 합니다. 걷는다는 것은 주변에 시선을 중다는 여유를 말합니다. 언제 물안개가 피었다가 사라지는지, 오리는 물속에서 얼마나 재주를 부리는지, 요즈음 같은 봄날에는 어떤 꽃향기가 더 멀리까지 날아가는지 보고 사색할 여유를 가져야 합니다. 여유는 자신에게 주는 가장 큰 선물이니까요.

집 앞 학교운동장에는 요즘 보랏빛 등나무 꽃이 한창입니다. 내가 며칠 한눈을 판 사이 잔뜩 꽃망울을 부풀리고 기다린 모양입니다. 보랏빛 원피스를 길게 드리운 등나무꽃이 거꾸로 매달려 봄바람에 엉덩이를 살랑대는 자태는 눈과 가슴을 꼼짝없이 붙들어 놓습니다.

산책에서 돌아오는 길은 등나무꽃 그늘 아래서 잠시 쉬었다가 오는 재미가 쏠쏠합니다. 햇살은 내 머리와 보랏빛 꽃 사이로 은 화살을 마구 뿌립니다. 이런 봄날이 조금은 더디 갔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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