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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바람과 시냇물 / 최원현

부흐고비 2021. 3. 12. 09:06

눈에 보이는 것은 마음에 얼마나 크게 영향을 미칠까요. 지금은 공사중인 건물에 가려져 버렸지만 얼마 전까지는 방에 누워서도 창만 향하면 하늘과 산이 그대로 한 폭 그림이 되어주곤 했습니다. 창에 하나 가득 안겨오는, 그림같이 펼쳐진 산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왠지 마음이 넉넉해지고 편안해 졌습니다. 나의 소유와는 아무런 관계도 없는 산이건만 내 것처럼 바라볼 수 있다는 것, 아니 그 어떤 생각도 없이 그저 산을 바라본다는 것만으로도 알 수 없는 행복감에 젖을 수 있는 것은 욕심을 내지 않음에서 얻어지는 편안함이 아니었을까싶습니다. 내 소유가 아니기에 오히려 맘껏 바라보고 즐길 수 있다는 말은 바꿔 말하면 내 것이었으면 하고 욕심을 내게 되는 순간 누리고 있던 잔잔한 기쁨과 넉넉한 여유를 빼앗기고 만다는 것이 아닌가요.

어쩌다 잠결에 눈을 뜨고 차창에 어리는 새벽 달빛의 은은함과 만날 때가 있습니다. 그 때 들려오는 우주의 숨소리와 살아있음의 맥박소리가 만나는 청청함은 내 안에 깃들거나 담겨있던 온갖 욕심의 찌끼까지 남김없이 씻어내 버리는 것 같은 상쾌함을 맛보게 했습니다. 이내 잠을 떨쳐내고 나면 새벽 별빛처럼 또렷해진 맑은 정신으로 하루가 축복으로 열리는 걸 온 몸으로 느낍니다.

누군가 '인생은 목표나 완성이 아니라 끊임없는 실험이요 시도'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 실험과 시도도 내 것을 채우기 위한 것의 수단이 되면 그 때부터 모든 바라보이는 것도 들리는 것도 달라지게 됩니다. 욕심을 버린 빈 마음, 새벽 달빛 같은 청청함의 맑음으로 아지 못할, 나 아닌 누군가를 위해 무언가 주고자 하는 마음으로 수고하고 애쓴다면 삶은 더욱 윤기날 것 같습니다.

말없이 서있는 나무를 보면 내 마음 속 뜰에도 맑은 수액이 흐르고, 향기로운 꽃이 피어날 것 같습니다. 그런 한 그루 정정한 나무처럼 아무 생각 없이 빈 마음으로 자연을 대하며 더 넉넉하고 충만한 것들로 가득 채워지길 바라는 것도 삶을 살아가는 하나의 방법이 아닐까요. 뿐입니까. 어쩌다 하루 스물 네 시간 중에서 얻어내는 잠시의 맑고 잔잔한 여백 같은 쉼의 시간은 삶을 보다 탄력있고 활기차게 해주는 힘이 되어줄 것입니다.

어느 날은 내리는 빗소리를 듣고 있으니 마음이 평안해 지고 맑아졌습니다. 내리는 빗줄기가 막혀있던 내 가슴 속 내면의 통로를 뚫어주는 것 같았습니다. 그리고 메말라 있던 내 마음의 밭을 촉촉이 적셔주는 것을 느꼈습니다.

삶을 바람(風)이라고 한 이가 있습니다. 느끼면 있고(有), 못 느끼면 없는(無) 것처럼 요즘 내 마음이 바로 그런 바람만 같습니다. 없는 듯 하나 사실은 꽉 차 있는 것들 속에서 보이지는 않지만 움직이다 들키는 것이 바람 아닌가요.

멀리 바라보이는 풍경을 가슴에 안아보는 일이나, 새벽 달빛의 은은함에 정신을 빼앗겨 보는 일이나, 청청한 나무를 바라보면서 은밀히 그가 내게로 보내는 그의 은어를 알아듣는 일, 그리고 내리는 비로 내 가슴 속 통로를 여는 것들은 하나같이 내가 할 수 있는 것들이라기보단 자연이 주는 선물이요 은혜요 축복들입니다.

바람이 어디론가 가다가 시냇물을 만나면 퐁당 뛰어들어 멱을 감고, 시냇물은 그걸 모르는 채 내버려두는 자연의 무관과 방심이야말로 사람과 사람이 어떻게 정의 물꼬를 터야 하는지를 교훈 하는 것이 아닐까요.

삶은 바람이고 시냇물입니다. 없는 듯 있고, 있는 듯 없는 바람처럼 살고, 누가 보아주건 그렇지 않건 거슬림 없이 아래로아래로 흘러가기만을 쉬지 않는 시냇물처럼 욕심 내지 않는 빈 마음으로 살 일입니다. 고요한 은은함으로 살 일입니다.

소리가 너무 많아 정작 들어야 할 소리는 들을 수가 없는 세상, 어떻게든 귀를 닦고 마음도 열어 들어야 할 소리를 듣게 해야지 않을까요. 저마다 드러내기만을 경쟁하다 보니 오히려 특별함도 없고, 본래의 자연스러움도 잃어버린 이 시대, 그렇다면 나는 있는 듯 없는 듯한 바람일까요, 마냥 흘러가기만 하는 시냇물일까요.

아침에 메일로 보내온 시원한 바람, 맑은 시냇물 같은 시 한 편이 그 대답처럼 가슴에 안깁니다.

바람이고 싶어라/나무숲을 흐르는 바람이고 싶어라/네 부드러운 머리칼 스치며/항상 지날 수 있는 바람이고 싶어라/
사람은 무언가를 기다리며 사는 것이라지만/사람은 그리움을 가지며 사는 것이라지만/이젠 기다림도 그리움도 버리고 싶어라./
바람처럼 쓸쓸한 눈빛이 되어/계절의 향기를 맡으며/하늘을 거니는 나그네가 되고 싶어라/
<소중한 이름이고 싶어라>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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