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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서서 흐르는 강 / 최원현

부흐고비 2021. 3. 15. 08:46

미명의 새벽이었다. 그러나 그냥 누워 있을 수가 없다. 더구나 어디선가 자꾸만 나를 부르는 것만 같다. 아내를 깨워 호텔 문을 나섰다. 2월의 싸아한 새벽 공기가 채 맑아지지 못한 내 정신을 씻겨 준다. 어둠 속의 공기는 차갑기보다 상쾌하게 느껴졌다.

문을 열자 들려오는 하늘을 울리는 소리, 어둠 속이건만 큰 울림의 실체로 하얀 물보라를 일으키는 물줄이 보이는 듯 했다. 소리가 나는 쪽으로 발걸음을 향했다. 불켜진 가로등 하나가 너무 이르지 않느냐고 걱정스런 눈길을 보내온다.

녹지 못한 눈이 가로등 불빛에 반사되어 어둠을 밝히는 마른 잔디밭을 가로질러 100여 미터쯤을 내려가니 어둠을 뚫고 더욱 귀가 멍멍해지게 소리가 커진다. 조금씩 어둠이 옅어지고 있는 강가인데 물소리는 더 커져 가는 것만 같다. 헌데 그 엄청난 물소리는 흘러가고 있는 강물소리가 아니라 바로 가까이 폭포에서 나는 소리였다.

나는 미국 쪽 나이아가라시의 호텔에서 묵었던 것이다. 그리고 지금 폭포로 떨어지기 바로 전의 강가에 서있는 것이다. 그러나 폭포의 장관을 제대로 보기 위해선 건너편 캐나다 쪽 나이아가라로 가야 한단다. 참 아이러니컬하다. 폭포는 미국 것이라 할 수 있는데 폭포를 보러 오는 관광객은 캐나다에서 돈을 쓴다. 마치 이름은 내 것이지만 정작 내 이름은 남이 주로 부르고 쓰는 것과도 같다고나 할까. 여하튼 나와 아내는 그 거대한 폭포를 이루는 원류 앞에 서 있는 셈이다.

캐나다와 미국의 국경을 흐르는 이 나이아가라 강은 큰 나라에 비해 길이가 45킬로미터밖에 안 되는 아주 작은 강이라고 한다. 그러나 거대한 나이아가라 폭포가 강 중간지점에 있기 때문에 이곳이 세계적으로 유명해 진 것 같다.

나이아가라 강은 미국 오대호인 이리 호와 온타리오 호를 이어주는 강인데, 평균 매초 3,679톤에 이르는 엄청난 강물을 흘러보낸다고 한다. 5대호의 하나인 이리 호에서 발원한 나이아가라 강은 온타리오 호수로 흘러가는 중간에서 50m의 낙차로 떨어져 내리게 되는데 이것이 나이아가라 폭포가 된다는 것이다.

지난 밤 어둠 속에서 조명을 받고 있는 폭포를 캐나다 쪽에서 잠시 맛보기로 보았던 것으로도 탄성이 나왔었지만 그래도 밝은 낮에 제대로 보지 못한 때문인지 감동이 그리 오래 가진 않았었다. 허나 지금은 눈으로 보진 못 하나 굉음을 내며 떨어지는 거대한 폭포 소리가 거대한 폭포를 상상시키며 오늘 낮의 장관을 더욱 기대케 해주고 있다.

옛날에 이곳에 살았던 인디언들은 '천둥소리를 내는 물'이란 뜻으로 이 폭포를 '니아가르'라고 불렀다 한다. 그도 그럴 것이 이 곳의 물 떨어지는 소리는 7만 6천 개의 트럼펫을 동시에 불어대는 것과 맞먹는 소리라고 하니 가히 짐작이 되지 않는가. 거기다 한 시간에 떨어지는 물의 양만도 우리나라 서울 시민이 이틀 동안 소비하는 수돗물의 양이 되는 1억 6천 리터가 된다니 얼마나 어마어마한가. 그러나 폭포가 가까워지건만 금새 낭떠러지로 떨어지는 것도 모르고 여유롭고 한가롭게 흘러가는 강물을 보고 있노라니 한 치 앞도 바라보지 못하고 사는 우리 인생을 보는 것만 같다.

어느 새 미명의 새벽은 간 곳 없고 아침이 되어 있었다. 폭포를 향해 흘러가는 물줄이 점점 바빠지는 것 같다. 폭풍 전야의 고요 같은 숨막힐 두려움이 저 흘러가는 물들에게도 있을까. 나는 창조자의 위대한 솜씨 앞에서 나도 모르게 소리 높여 감사의 기도를 드렸다. 날이 밝아지면서 물소리도 따라 커지는지 나는 더욱 소리를 높인다고 하는데도 내 목소리는 더욱 잦아들고 말지만 그래도 참으로 경건하고 뜨거운 감격으로 기도를 했다. 조물주 앞에서 인간의 보잘것없음을 절절이 느끼는 순간이었다. 발 아래로 흘러가고 있는 물을 내려다 봤다. 이 물이 조금 후엔 거대한 폭포를 이룰 것이라 생각하니 그냥 갈 수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내의 만류를 뿌리치고 물가의 바위를 조심스레 붙들고 내려가 가까스로 물을 한 줌 움켰다. 차가움이 전신을 떨게 한다. 물의 차가움보다도 거대한 폭포를 이룰 원류라는 감격이 물에 손이 닿는 순간 나를 더 떨게 했을 것 같다. 움킨 물로 눈을 씻어봤다. 오염되지 않았을 것 같은 물로 온갖 더러움으로 때가 절은 눈부터 씻고 싶었다. 아니 공해에 시달려오며 내 갖은 욕망을 불러일으키는 창이었던 눈을 신의 가까이 있을 법한 이 정갈한 물로 조금이라도 씻어내고 싶었다. 그런데 눈이 밝아지는 것이 아니라 역시 그 차가움으로 정신이 더 번쩍 든다.

일행은 아직도 밖으로 나오지 않고 있다. 나만이 만끽하는 이 비밀한 조우가 감격스럽기까지 하다. 내 물 묻은 손을 아내가 잡는 것도 못 느낄 만큼 폭포를 향하여 흘러가고 있는 강물을 나는 넋을 잃고 바라보고 있었다. 까딱 까딱 폭포 쪽으로 뭔가가 떠내려가고 있는 것만 같다. 문득 언젠가 들었던 나이아가라에 얽힌 전설이 생각난다.

콜럼버스가 신대륙을 발견하기 전, 나이아가라 폭포의 상류에는 한 인디언 부족이 살고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이 부족은 폭포를 신이라 믿고 1년의 중심이 되는 달의 보름날을 기하여 매년 폭포 신에게 부락의 소녀중 한 명을 산채로 강물에 떠내려보내는 제사를 지냈다고 한다. 그런 어느 해, 그 해도 제물로 바칠 소녀를 제비뽑기로 가리게 되었고, 추장은 공정을 기하기 위해 자신의 딸도 참여시켰는데 공교롭게도 그만 추장의 딸이 제비에 뽑혀 제물로 바쳐지게 되었다는 것이다.

일찍 어머니를 잃었던 외동딸이기에 온갖 정성과 사랑을 쏟으며 이만큼까지 키워왔는데 하나밖에 없는 그 딸을 저 거대한 폭포 속으로 밀어 넣어 보내야만 하는 추장의 심정은 어떠했겠는가. 그러나 제물은 공정한 방법으로 선발되었던 것이고 추장으로써 부락민들에게 자신도 전과 같이 그것을 보여주어야만 하는 것이었다.

마침내 사랑하는 딸을 바쳐야 하는 날이 왔다. 온갖 꽃으로 치장한 배에는 자신의 딸인 어린 소녀가 태워져 울고 있었다. 배는 노도 없이 그냥 물결에 흘러가게끔 만든 배였는데 이윽고 배가 강에 띄워졌고 소녀는 아버지를 애타게 불러댔지만 어린 소녀의 소리가 어찌 거대한 폭포소리를 뚫을 수 있으랴. 배는 점점 폭포의 낭떠러지를 향해 흘러갔다.

그때 강가 숲 속에서 한 남자가 배를 띄우더니 노를 저어 소녀의 배로 다가갔다. 추장이었다. 추장은 소녀가 탄 배로 올라가 어린 딸의 손을 꽉 쥐었다. 소녀도 울고 추장도 울었다. 그러나 추장은 이내 딸을 향해 엷은 미소를 지었다. 그러자 소녀는 아버지의 품에 안기고 소녀와 아버지가 탄 배는 마침내 거대한 폭포의 물줄기 속으로 떨어져 버렸다. 폭포는 두 부녀를 삼켜버렸으나 언제 그런 일이 있었느냐는 듯 거대한 굉음만을 내고 있었다.

저 엄청난 소리며 감히 대적해 볼 엄두도 못 낼 폭포의 힘 앞에서 어찌 인디언들이라고 두렵지 않았으랴. 그 두려움이 폭포를 신으로 만들었고, 두려움에서 벗어나 보고자 했던 것이 그리 슬픈 전설을 낳지 않았던가. 나는 그 거대한 폭포 앞에 서있는 것도 아니고 저만치서 들려오는 폭포소리만으로도 이리 가슴을 조이고 있으니 신비롭고 큰 것이면 다 두려움의 대상이 되었을 저들에게 폭포는 얼마나 두려운 존재가 되었을 것인가.

아버지와 어린 딸의 이런 슬픈 전설이 있는지를 아는 지 모르는 지 강물은 폭포를 향해 속도를 빨리 하며 그러나 평화롭게 흘러가고 있다.

아내를 바라봤다. 어느덧 반 백년의 삶을 지쳐온 흔적이 드러나고 있었다. 어쩌면 우리도 저 흘러가고 있는 강물처럼 그저 마냥 앞으로 가기만 했던 것 같다. 앞에 무엇이 있을지,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지 그걸 생각할 수도 없었다.

부모랍시고 의지하는 어린 남매를 데리고 삶의 의미 한 번 제대로 생각해 볼 여유도 없이 허겁지겁 달려만 왔던 것 같다. 그리고 지금 이렇게 얼마나 더 흘러갈지 모르는 인생의 강가에 서있는 것이다. 하지만 지금 이 강처럼 강이라고 알고 있는 것이 사실은 폭포인 것을 모르고 있으니 어쩌랴. 강은 흐르는 것만이 아니라는 사실을 지천명을 넘기고서야 그것도 이국 하늘 밑 낯선 강가에서 알아챈다. 내 삶의 강은 얼마나 흘러가다가 폭포가 되어 추락하는 강으로 변할까. 아니다. 추락하는 게 아니라 어느 시점에서는 일어서서 흘러야 하는 것이다. 서서 흐르는 강, 우리는 그냥 흐르다가 떨어지는 것으로만 생각했지 서서 흐른다고는 생각하지 않았쟎은가. 우리 삶은 대나무의 마디 같은 단락의 삶으로 1막, 2막, 3막의 구분된 삶을 사는 것 아닌가. 지금 내가 맞이한 이 단락으로 내 생도 끝나게 될지, 아니면 다시 한 삶이 이어질지 알 수는 없지만 유유히 흘러만 가는 것이 강이라는 생각을 일단 수정해야겠다.

어둠이 물러가고 밝아진 강가에서 맞이하는 새 날, 아버지와 어린 딸이 한 가닥 물줄 되어 스며들던 폭포의 강, 어쩌면 산다는 것은 강처럼 흐르는 것이 아니라 폭포처럼 떨어지는 순간을 기다리는 것이기도 하고, 일어서서 흘러야 하는 것도 아닐까.

저 멀리서부터 흘러오는 강물을 바라본다. 그리고 곧 낭떠러지로 떨어질 폭포 쪽도 본다. 나는 어느 쪽을 더 많이 남겨놓고 있을까. 아무래도 폭포에 가까워졌으리라는 생각을 하니 살아온 날들이 참으로 감사했다.

아내의 손을 잡았다. 아무래도 오후에 캐나다 쪽 나이아가라에서 바라볼 폭포는 제대로 바라볼 수 없을 것 같다. 폭포는 강의 추락이었다. 그러나 폭포가 끝이 아니라 폭포로부터 온타리오 호수로 이어지는 더 긴 여정이 새롭게 만들어지고 있다는 것이 큰 위안이 된다. 그러고 보니 어젯밤 보았던 폭포도 강의 추락이 아니라 서서 흐르는 강이었던 것 같다. 그렇다. 강도 아래로 흐르다가 이렇게 서서 흐름으로 폭포를 만들어 주는 것이었다. 그래, 떨어지는 것과 서있는 것이 보기엔 같아 보일지 몰라도 내 인생의 강엔 큰 의미의 차이가 있음이다.

고개를 드니 안개 자욱한 강 위로 이름 모를 새들이 힘차게 날아올랐다 내려오는 비행을 하고 있다. 새들도 추락하는 강 위에서 추락하는 연습을 하고있는 것이 아니라 서서 흐르는 강 앞에서 더 높이 날아오르는 연습을 하고 있는 것이다.

지금까지는 그냥 흐르는 강이었을지 모를 내 삶도 이만큼 세상을 살았으니 서서도 흐를 수 있는 강이 될 수 있지 않을까.

내 삶의 강도 서서 흐르는 강으로 멋진 폭포를 이뤄보고 싶다. 흐르다 서서 흐르다 다시 흘러가는 나이아가라 강가에서 나는 서서 흐르는 강, 폭포를 꿈꿔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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