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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어영부영하다가 / 김상립

부흐고비 2021. 5. 3. 09:17

흔히 찰나를 누적시키면 겁이 되고, 겁을 세분하면 찰나가 된다고 말한다. 찰나 속에도 영원성이 포함되어 있고, 영원의 내면은 찰나의 속성으로 채워져 있다는 뜻이기도 할 게다. 잠깐도 계속 이어지면 영원이라 불릴 것이고, 영원이라는 시간을 나누고 또 나누면 순간이 되리라는 것을 짐작하기는 어렵지 않다. 하여 순간을 잘 써야 바람직한 일생이 꾸며질 것이고, 훌륭한 삶은 최선을 다한 순간순간의 모임일 터이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짧은 인생길도 지루하다고 스스로 목숨을 끊기도 하고, 돈벌이에 정신이 팔려 주어진 시간을 돈돈하며 모두 써버리기도 한다. 권력투쟁에 일생을 바치는 사람도 있지만, 막강한 지금의 권력이 계속 이어지기를 바라며 몸부림치는 사람도 있다. 부모 잘 만나 호의호식하며 인생이 꿈속인 듯 사는 사람도 있고, 남에게 아부하여 덕 좀 보려고 이래저래 바쁜 사람도 적지 않다. 매일같이 새로운 여자를 탐하여 인생을 낭비하는 자도 있고, 술이나 노름에 파묻혀 시간 가는 줄 모르는 딱한 이도 드물지 않다.

하지만 사정이 어려워 제때 밥을 먹지 못하는 사람들이 안타까워 그들의 밥을 짓는다고 시간을 대폭 할애하는 사람도 있고, 아예 오지로 들어가 병들고 가난한 사람들에게 일생을 통째로 바친 위인偉人도 있다. 평생 고생고생하며 모은 재산을 아무 대가도 없이 사회에 환원하는 놀라운 분도 있고, 살아생전에는 도저히 끝날 과제가 아닌 줄 뻔히 알면서도 인류를 위해 연구를 포기하지 않는 과학자도 있다. 또 장애의 몸을 이끌고 천신만고 끝에 대단한 성과를 이루어 만인의 귀감이 된 사람도, 암으로 죽음을 선고받고도 생이 끝나는 날까지 열정적인 강의를 계속하여 주변 사람들을 뜨겁게 울린 어떤 여자 교수도 있다.

사람이 과욕에 얽매여 초조하게 살면 시간이 늘 부족할 터이고, 저 자신을 깊이 바라보며 느긋하게 살면 여유가 생길 것이다. 또 자기만을 위해 한 생을 살면 시간 가는 게 안타까울 것이고, 봉사하는 삶을 살면 주어진 시간에 감사하게 될 것이다. 이처럼 시간이란 그 사람이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 같은 길이의 시간이라도 짧아지기도 하고 길어지기도 하니, 어찌 시간의 가치가 모두에게 동일한 것이라 말할 수 있으랴.

평소 나는 시간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며 지냈기에 내 나름으로는 시간 관리를 비교적 잘해 왔다고 생각했고, 또 자투리 시간까지 소중하게 여겼기에 시간과는 꽤 친숙하게 지내왔다고 믿었다. 하지만 막상 내가 황혼 길 한 가운데에 깊숙이 들어와 보니 내 눈앞에는 전혀 낯선 시간이 버티고 있었다. 그는 내가 여태껏 함께해 왔던 익숙한 모습이 아니고, 엄격하며 냉철할 뿐만 아니라, 나라는 인간은 안중에도 없이 막무가내로 제 갈 길만 가는 고집불통의 무서운 존재였다. 말하자면 오직 나만을 위한 시간이란 애당초 없었던 것이다.

나는 그것도 모르고 그가 다정하고 온유하며 변함없이 내 곁을 잘 지켜주는 관대한 상대인 줄 믿고, 마치 어린애가 장난치듯 그의 잔등에 올라 신나게 놀았던 셈이었다. 그래서 오늘 해야 할 일을 내일로 미루기도 했고, 행복이 찾아와도 좀 더 큰 것을 바라며 시큰둥하기 일쑤였다. 또 곧장 찾아가서 사과할 일도 언젠가는 좋은 기회가 오겠지 하며 망설였고, 감사를 드려야 할 일도 형편이 좀 나아지면 찾아가야지 하며 뒤로 미루기만 했다. 앞장서서 남을 도와야 할 일에도 뒤편에서 미적거리기는 마찬가지였다.

나는 힘든 일이 닥치면 시간이 빨리 지나가서 내가 곤경에서 쉽게 벗어나게 되기를 희망했고, 좋은 일이 닥치면 그 상태대로 딱 멈추어 주어 오랫동안 흡족할 수 있기를 바랐다. 그러나 이제 보니 시간을 두고는 욕심을 드러내는 게 아니었다. 오히려 겸손과 인내로 정중하게 대했어야 옳았다. 더구나 훤히 나를 꿰뚫어보는 시간 앞에서 나는 늘 바쁜 척해 가며 삶에 덧칠하기 바빴으니, 겉으로는 멀쩡해 보여도 막상 속은 텅텅 비어 알맹이라고는 없는 삶이 되고 말았다.

어느 유명인사가 자신의 무덤 앞에 ‘우물쭈물하다가 내 그럴 줄 알았지’라는 묘비명을 남겼다기에, 참 웃기는 사람도 있구나! 여겼었는데, 세월이 가고 나이를 먹으니 그 말의 숨은 뜻을 진즉 알아채지 못한 게 후회스럽다. 나는 열심히 살아간다는 핑계 아래 실상은 어영부영 지내다 보니, 그 많던 시간 어느새 다 흘러가 버리고 벌써 이 나이가 되어버렸다. 마음속으로야 훤히 알고 있으면서도 늘 실행에 인색했던 엄중한 결과가 바로 지금의 내 모습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이렇게 보면, 분명 나는 시간 앞에서 인생 낙제생임에 틀림이 없다. 하지만 암만 사람이 시간을 거슬러서는 살 수 없다 할지라도, 숫제 손들고 인생 성적을 낙제로 마감하기에는 너무 억울하다는 생각이 든다. 죽어서 염라대왕 앞에 서면 시간을 낭비한 죄가 제일 크다는데, 그럼 나는 어찌한단 말인가? 적어도 C 학점은 들고 가야 마음이라도 놓일 터인데…, 도대체 나에게 남은 시간이 얼마나 될까? 내 노년의 절실한 과제가 시간 쓰기가 될 줄을 예전엔 미처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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