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수필 읽기

채롱 / 이효석

부흐고비 2021. 5. 1. 18:15


이효석(1907~1942)
소설가. 호는 가산.

강원도 평창 출생. 경성 제대 법문학부 졸업. 숭실 전문 학교 교수 역임.

한국적인 자연의 아름다움을 배경으로 주옥같은 단편 소설을 썼던 이효석은 수필에도 여러 작품을 남겼다. 간결체 문장의 전형을 볼 수 있다.


 

시골

우거진 여름 나무 그림자가 아니라 잎이 떨어지고 가지만이 앙상하게 남은 겨울나무의 그림자라는 것을 사람들은 그다지 생각해 본 적이 없을 듯하다.

우거진 나무 그림자라는 것은 으슥한 낮잠의 터는 되어도 겨울나무 그림자의 외롭고 아름다움은 없다. 겨울나무가 푸른 그림자를 처녀설의 흰 막 위에 던지고 있는 그림은 쓸쓸하면서도 깨끗하고 아름다운 것이다.

그런 아름다운 그림을 나는 겨울에 함경선을 지난 때에 가장 흔히 본다.

과수원이나 혹은 낙엽송림에 눈이 쌓여 아직 밟히지 않은 그 백지 위에 나뭇가지 혹은 수풀의 그림자가 푸른 목판화같이 또렷하게 밝혀져 있는 풍경은 아무리 상 주어도 오히려 부족하다. 차창에서 눈을 떼지 않고 지나가는 그 한 폭을 아깝게 여기며 다음 것을 기대하는 수밖에는 없다. 조촐하면서도 쓸쓸한 나무 그림자를 볼 때 나는 시골의 생활이라는 것을 생각하게 된다.

차가 한적한 역에 머물러 눈에 싸인 마을을 바라보면서 고요한 길을 걷노라면 대체 마을에는 사람이 살고 있는가 없는가 그 속에도 생활이 있나... 의심하게 된다. 별것 아니라 나무 그림자 같은 생활이 그 속에 있음을 깨닫게 되고 이상한 것은 그런 생활에 곧 또 익어져 감이다. 화려한 곳에서와 마찬가지로 지극히 쓸쓸한 곳에서도 사람은 살 수 있는 것이요, 살라는 마련인 듯하다.

무료한 속에서 나는 C의원을 찾는 날이 많았다. 응접실에서 난로를 쪼이면서 한가할 때의 닥터 B와 이야기를 하며 시간을 지운다. 밤이면 나로가 달아서 한구석이 과실같이 새빨갛게 익은 것을 둘러싸고 앨범을 뒤적거리고 '우울한 일요일'의 레코드를 듣다가 이웃방에 준비되어 있는 늦은 만찬을 시작한다.

식탁의 진미는 인읍에서 주인이 손수 사 온 도미, 굴과 식혜, 수정과, 부인이 손수 만든 아이스크림, 더운 온돌방에서는 이 이상의 선미는 없다. 식사가 끝나면 윷놀이를 하고 상품을 나눈다.

그러나, 시골의 살림은 나무 그림자같이도 호적하고 쓸쓸하다. 난로를 끼고 창으로 눈을 내다보고--너무도 단조하면 젊은 B박사는 인읍으로 영화 구경을 종용한다. 30 몇 년 형인지의 조금 낡은 자가용 차를 손수 운전해 가지고 집 앞까지 맞으러 온다. 같이 타고 몇 마일권 채 못 가서 발동이 머물고 속력이 없어진다.

간신히 몰아 가지고 온 길을 되돌아 어디로 가는가 하고 의아해하노라면 차는 도로 병원으로 들어가 차고 앞에 선다. 여러 날 쓰지 않았던 차에 물을 넣은 지가 오래 된 까닭에 어느 결엔지 얼어 버려서 발동에 지장이 있다는 것이다.

하는 수 없이 굳은 눈이 구두 밑에서 빠작빠작 울리는 밤거리를 걸어가서 차부에서 버스를 타면 아무래도 인읍까지는 10분이 넘어 걸린다. 늦은 영화관에 들어가면 이어 케이블과 콜베엘의 '어느 날 밤에 생긴 일' 시작된다. 낡고 망측한 토키를 끝까지 듣고 나면 골이 띵하다.

거리의 찻집 '동'에서 이것도 망측한 커피를 마시며 한 시간쯤 쉬다가 이번에는 택시를 세내서 고개를 넘어 집으로 돌아온다.

이튿날 한낮은 되어서 B씨를 찾으면 그는 조반이 끝났다고 하면서 피곤의 빛을 띠고 나타난다. 들어 보면 놀라운 곡절이다. 새벽 네 시는 되어서 초에서 난산의 급한 환자가 있다고 사람이 뛰어온 까닭에 십리나 되는 원수대까지 차를 몰고 가, 사경의 산부를 수술하고 태아를 조각조각 오려서 낸 후 집에 와서 잠깐 잠이 들었다가 늦은 조반을 먹고 나니 그 때라는 것이다.

아무렇거나 간에 단조를 깨뜨린 셈이기는 하지만 그러한 병원의 흥분은 지나쳐 처참하다. 중요한 것은 산부의 뒷소식인데 며칠 후에 들으니 참혹하게 세상을 떠났다는 것이다. 18세의 애잔한 소부가 마을의 젊은이와 눈이 맞아 만주에까지 뛰었다가 다시 마을에 돌아와 살림을 시작했으나, 마을 사람들의 눈에 나서 그가 위독할 때에 누구 한 사람 위문 오는 사람도 없고 수술을 시작할 때에는 물 끓여 부는 사람조차 아쉬워서 곤란이었다는 것이다.

말하는 B씨의 낯에도 피곤의 빛이 없다고는 말할 수 없다. 쓸쓸하고 외로울 뿐만 아니라 비참한 이야기다.

시골의 생활이 겨울 무 그림자같이 적적하고 외로운 것이기는 하나 그러나 나무 그림자의 푸르고 아름다운 점만은 이 산부의 이야기와 인연을 붙여서 말하고 싶지는 않다.

 


소설

B씨에게서 나는 여러 차례나 만찬의 대접을 받고 어간유의 선물을 받고 했으나 그가 거리의 내 집을 찾아오기 전에는 똑같은 형식으로 갚아 줄 도리는 없다. 찻집에서 마시는 차가 아니라 집에서 손수 만든 차를 낼 수 있으며 손수 요리한 도미와 굴과 아이스크림을 대접할 수 있는 것이다. 비록 자가용차는 없어도 구경만은 부자유스럽지 않게 동행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도 그가 직접 나를 찾기 전에는 어쩌는 수 없는 것이며 옷가지나 과자 상자쯤을 소포로 보낸댔자 별로 신통한 것이 아닐 것이요, 차라리 그렇다면 소설책을 보냄이 더 뜻있는 일이 아닐까 생각한다.

B씨는 소설을 유난히 좋아한다. 난로 전을 싸고 앉아 늦도록 이야기한 것도 말하자면 대부분이 소설 이야기와 문학 이야기였다. 광범한 그의 소설 지식에는 놀랄 만한 것이 있으며 신문 소설을 등한히 보는 나로서 부끄러울 때가 많다.

그 대신 나는 고전으로 그를 이기며 그의 지식에 그 무엇을 첨가하여 줌을 기뻐한다.

소설책이라고 하여도 자신의 것은 초라하니 훌륭한 책, 가령 해외의 것이라면 맨스필드의 단편집쯤이 적당할 듯하다. 이와나미판쯤으로는 체재가 너무도 빈약하니 좀 더 고가의 호화판이나 나오면 한 부 보내리라.

그의 단편집은 확실히 B씨의 시골 살림에는 윤택과 위안을 줄 것이며 특히 "행복" 같은 걸작은 기어이 추천하고 싶은 일편이다. 물론 그 내용보다도 예술적 향기를 그에게 띄워 주고 싶은 것이다.

남편 해리와 미스 팰튼, 아내 영과 에디워렌의 두 쌍의 미묘한 관계를 나는 즐겨하지 않는다. 다만 해리와 영 부처의 행복스러운 가정적 윤곽, 집뜰 앞에 선 한 포기의 만발한 배꽃으로 상징되는 아내의 행복감, 그것이 그들에게 들려주고 싶은 주제이다.

배꽃이라는 것이 그렇게 아름다운 것임을 사실 나는 이 작품에서 처음 알았고 그것의 행복감의 상징이 이 작품에서같이 여실하게 울려 온 적은 없다.

'...저 쪽편 담으로 향해 한 포기의 밋밋한 배나무가 가지가지에 그득 꽃을 달고 있었다. 마치 구슬같이 푸른 하늘에 고요하고 화려하게 뻗치고 있다. 아직 피지 않은 봉오리가 한 개나 있을까. 시들어 버린 송이가 한 송이나 있을까--한창 깨끗하고 흐뭇하게 활짝 피어 있는 것이 멀리 서 있는 피어사에세 완연히 보여 왔다--'

'...그 나무는 고요하게 그러나 타는 촛불의 불꽃과도 같이 하늘에 뻗치고는 아름답게 떨리고 있다. 볼 동안에 자꾸만 높아져서 금시에 하늘 위 둥근 달에 채일 듯하다...'

봉실한 꽃송이가 바로 행복감 그것이다. 능금꽃과는 달라서 배꽃은 일률로 희다는 점에 작자가 특별히 배꽃을 든 비유와 암시가 있지 않은가 생각한다. 만발했을 때의 능금꽃이라는 것도 물론 아름다운 것도 물론 아름다운 것이기는 하나 지금까지에 능금꽃의 아름다움만이 눈에 뜨이고 배꽃의 미를 등한시했음은 무슨 까닭이었던가 의심한다.

어떻든, 나는 배꽃을 맨스필드의 단편에서 처음으로 발견한 셈이다. 하기는 맨스필드만이 아니라 이 곳의 젊은 시인 중에도 배꽃을 노래한 사람은 이미 있으니 그의 시구가 나의 배꽃의 인상을 도와주었을 것도 사실이다.

돌배꽃 필 때면 뻐꾸기 울고
뻐꾸기 울면 하늘이 파아랗나니
배나무 그늘이 가슴에 푸르고
연두색 잎새 햇볕에 손뼉치고
우거진 가지마다 쫙 펴진 가지마다 웃음 또 웃음...

 


영화

수업 제한에서 오는 양화 결핍으로 말미암아 요사이 거의 어느 상설관에서나 한 번 상영했던 영화의 재상영을 번번이 본다. 여간한 예술품이 아니고는 두 번 이상 감상하고 싶은 흥이 솟지 않는 것이나 영화의 감상은 짧은 시간을 요하는 것이라 한 번 기억에 남았던 일편에는 식욕이 동하지 않는 바도 아니어서 두 번째 보러 간다.

그러나, 세상에 좋은 영화라는 것은 그다지 흔한 것이 아니다. 대개는 처음에 느꼈던 감흥이 반감되고 품고 있던 아름다운 환상까지 도리어 부서져 버리고 마는 것이 통례다. 한절 한절의 컷의 구성에는 간혹 치밀한 수법과 자연스러운 연기가 보여 그 이상의 표현 방법은 없으리라고 감탄되는 대목도 있으나 전체로 흠이 보여 오고 결함이 드러나게 되어 겨우 이 정도의 영화였던가 하고 환멸을 느끼게 된다.

감독과 연기자들이 인생을 여실히 그려 내겠다고 땀을 뻘뻘 흘리며 눈물겨운 노력을 하나 나타나는 화면이--불과 몇 센티 평방의 셀룰로이드 딱지가 종시 말 안 듣는 것이다.

연기의 부족으로 허덕거리는 장면을 대할 때는 꾸며 놓은 세트 장치 앞에서 상을 찡그린 감독이 메가폰으로 고함을 치며 삼군이 아니라 삼문 배우들을 질타하는 목소리가 가엾게도 귀에 들려오는 듯하다. 그러나 문제는 배우뿐만 아니다. 참으로 감독자 자신의 두뇌와 천분에 더 많이 달렸으니 그가 가장 옳다고 생각하고 연기자에게 가르쳐 주는 표정과 동작이 과연 진실을 포착한 것이어서 만인을 똑같이 감동시켜 줄 수 있는가 없는가--에 달려 있다.

슈탄벅이나 크레엘이나 듀비베가 아무리 능청맞다고 하더라도 그들 역시 각각 한 개의 형이 있는 것이요, 결국 자기류의 발휘에 지나지 못하는 것이다.

예술이란 개성의 조작이니 그것으로 족할지 모르나 문제는 그 자기류로서 어느 정도 리얼리티를 잡았고 보다 더 많은 사람을 감동시키는가 하는 것이다.

참으로 여간한 천재를 가지지 않고는 벌써 현대인의 눈을 속일 수는 없게 되었다.

한다하는 천재도 까딱하다가는 일개 무명의 관객에게 뜀을 받고 계발을 입게 될는지 모른다. 거리의 구석구석에 할거하고 있는 군웅은 말할 것도 없고 누가 그래도 가장 많은 사람을 속여 왔을 것인가. 폐데일까 루놜일까 채플린일까.

'제7천국'을 보려니 성탄제 때의 아동 연극의 정도 밖에는 못 되어서 는적거리는 남배우의 낯짝에다 정신이 번쩍 들게 물을 끼얹고 싶은 충동이 났다. '장군 새벽에 죽다'도 두 번째는 지루하고, '유령 서로 가다'는 장난과 꾀가 너무나 드러나 보였다. '미모사관', '춘희', '다드워스', '대지' 등이 아무리 힘을 들였다고 해도 이 역 두 번 본다면 같은 느낌을 받을 것이며 비교적 솔직하게 감상할 수 있는 것은 '마라, 샵드레드', '야성의 부르짖음'이었다.

제작들이 교묘한 꾀를 피웠다 하더라도 그것은 다 작품의 품격에서 받는 감동 속에 숨어 버려서 순진한 눈으로 끝까지 볼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 두 편의 영화보다는 원작인 소설편이 한층 우수함은 웬일일까. 훌륭한 영화라고 하여도 그것이 소설의 풍미와 암시를 항상 덜어 버리는 것은 일단 시각화된 화면은 아무리 우수한 한 폭이라고 하여도 벌써 결정적 운명의 옷을 입고 나타나는 까닭에 소설이 주는 풍부한 환상을 옹색하게 한 까닭으로 규정해 버리고 이지러뜨리는 까닭이다.

그러기에 영화란 아주 잘 된 영화가 영화이지 섣불리 되었을 때는 가장 졸렬한 소설보다도 더욱 졸렬한 운명에 놓이게 된다.

소설은 그래도 참을 수 있는 것이다. 영화난은 이 점에도 있다. 차라리 '미완성 교향악'이나 '악성 베토벤'을 허물없이 본 것은 음악의 덕이었고 '모던 타임스'에서 끝까지 진진한 흥미를 느낀 것을 풍자보다도 웃음의 덕이었다.(이 작품의 풍자란 너무도 진부하고 상식적이다. 채플린의 독창적인 교태와 거기서 솟아나오는 웃음이야말로 마땅한 듯하다.) 섣불리 본격적으로 겨루다가 실패라는 편보다는 차라리 웃음과 음악으로 대독시키는 곳에 영화의 다른 길이 암시된다. 근대의 걸작은 '아부일족'이었고 앞으로 기대되는 것은 봐이에 주연의 '마이아링크'다. 하기는 봐이에의 연기도 벌써 코에 냄새가 미칠 지경으로 되고 말았다.

대체 배우의 생명이 그다지 긴 것이 못 되어서 아무리 명우라고 해도 작품을 4,5편 거듭하면 연기의 형이 결정되어 버린다. 아리볼이나 풀무니, 가르보나 다류가 아무리 차례차례로 연기를 보인다고 하여도 신축자재한 애교가 아니고 사람인 이상 어느 정도에 이르러 고정해 버림은 하는 수 없는 노릇이다.

데아나다빈이 첫 작품에서 벌써 싫증이 남은 웬일일까.

가령 애수가 얼굴에 잔뜩 서리어, 보기만 해도 눈물이 뚝뚝 떨어지는 특이한 종류의 배우는 나타나지 않는가. 국외자의 욕심이란 한량이 없는 것인 듯하다.

 


우유

'모던 타임스'에서 채플린이 고따드와 가정생활을 공상하는 대목이 있다. 물론 집이 교외에 있는 탓도 있겠지만 바로 문 밖에 열린 포도를 따먹고 우유는 문간에 매어 둔 소에게 직접 짜서 그 자리에서 마신다.

이 목가적 취미는 아마도 현대인의 누구나가 환상하는 것일 듯하다. 목가적 취미의 사치한 치장은 그만두고 그저라도 우유를 풍족히 먹고 싶다는 원부터가 우선 급하다.

나날의 곡량은 물론이거니와 시민마다가 우유를 풍족히 마실 수 있다면 얼마나 행복된 사회일까. 만반 문제의 출처인 요점을 이렇게 간단히 말해 버린다면 어리석은 잠꼬대가 될는지 모르나 여기에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어떻든 우유를 중요한 양식으로 삼고 그것을 때마다 흡족하게 마시는 습관과 처지에 있는 서방인이 확실히 우리보다는 행복된다는 것이다.

우리가 우유를 마시는 풍습은 물론 근래의 것, 적어도 피유리가 흑선으로 동방에 시항해 온 이후에 속한다. 그 이전에는 그것을 대신할 만한 것이 없었던 것이 사실이면 그만큼 불행하였던 것도 사실이다.

어떤 극동인이 인도에 여행하였을 때에 간디는 인도의 서민층의 생활을 생각하고 두부 만드는 법을 물었다고 한다. 영웅으로서 오히려 이러한 세밀한 배려가 있음은 하찮은 식물 한 가지의 보통화가 족히 백성 전부에게 큰 복지를 가져오는 까닭이다. 백성 전체가 우유를 흡족하게 마시는 나라야말로 두말할 것 없이 이상 사회일 것이다.

학교 농장에서 아침저녁으로 배달해 오던 우유를 흔하게 마실 때에는 아무 걱정 없던 것이 농장의 우유가 끊어진 이후로는 크게 공황을 느끼게 되었다. 질과 값으로 거리의 우유가 도저히 농장의 것을 감당할 수 없을 것이다.

아침에 일어나 현관문을 열면 그 어느 날이나 반기는 법 없이 마치 성탄옹의 선물과도 같이 어림없이 듬직한 5흡들이 콜병이 유회색 문등 아래편 시멘트 바닥 위에 놓여 있었다. 로이드 영화에 나오는 커다란 그 병이다. 여름에는 담쟁이의 이슬을 맞고 겨울에는 언 채로 오뚝 놓여 있는 그 풍모부터가 우선 상 줄만하다. 물론 새벽에 갓 짠 생우유다.

냄비에 붓고 표면에 얇은 유막이 앉을 때까지 끓여서 식후에 숭늉을 대신으로 벌떡벌떡 켜는 것이다. 겨우 한 잔의 우유로 혀를 댈까 봐 고양이같이 홀짝홀짝 핥는 것과는 운치와 격이 다르다.

특히 겨울에 얼어서 살얼음이 잡힌 것을 끓여서 흡사 풋옥수수 삶은 냄새 나는 눅진한 액체를 입안에 그득 머금었을 때 우유의 진미는 그 한 모금에 있다.

해외를 돌아온 학자가 스위스에서 먹었다는 우유 자랑을 하나 농장에서 오는 우유가 결코 그에 밑지지 않을 듯하다. 한 홉에 실비로 3전, 한 콜에 15전, 하루에 두 콜이라도 30전, 한 달에 서 말의 우유를 위 속에 부어도 9원이면 족하다. 그것이 요사이 와서는 사정이 너무도 달라졌다. 농장이 없어진 까닭에 당장에 우유 기근을 만난 셈이다. 한 홉 7전의 거리의 우유를 하루에 한 되를 마시려면 한 달에 20원을 넘는다. 미곡과 신탄대를 합한 액수보다도 많다.

농장에 있는 배달부가 K목장으로 고용을 간 날로 구면이라고 즉시 주문을 맡으러 왔다. 하는 수 없이 하루 아침에 세 홉씩을 부탁해서 식구들과 나누게 되었으나 당초에 부족한 양일 뿐 아니라, 아무래도 협잡물이 든 것 같아서 농도가 옅고 맛이 덜하다.

아침에 일어나 현관문을 열면 전과는 달리 아치형의 좁은 홍예문 아래편 시멘트 바닥 위에 가느다란 한 홉 병이 세 개 나란히 늘어서 있는 것이 콜병의 위용과는 엄청나게 빈약하게 보인다. 겨울보다 체중이 반 관이나 준 것을 우유 부족의 탓으로 돌린대도 과장을 아닐 듯싶다.

어떻든 농장의 우유는 생각할수록에 행복스런 선물이었고 지금 우유는 그래도 나으나 더 못한 악질의 우유를 찾는다면 함경선 식당차에서 파는 바로 그것이다. 세상에 우유치고 이보다 더 못한 것을 구하려면 지옥으로 가야 할 수밖에는 없을 것이다. 우유를 넉넉히 먹을 수 있는 세상이 지금에 있어서는 가장 원하는 세상이며 바라건대 거리의 복판마다 냉장의 우유 탱크를 세우고 오고 가는 시민에게 자유로 마시게 하거나 혹은 수도와 마찬가지로 지하에 우유를 묻고 각 가정에서 나사만 틀면 적량의 신선한 우유가 언제든지 졸졸 쏟아지게 하는 설비가 국가 경영으로서 하루바삐 생겨질 날을 공상--이 아니라 충심으로 원하는 바이다.

 


향연

일각이 천금의 값이 간다는 봄날 저녁, 거리의 향연에 감은 옛날 아가톤의 집 축하연에 모여 가는 기쁨보다 못할 것은 없다. 모이는 사람들이 반드시 희랍 시대의 철학자들일 필요는 없는 것이나, 그러나 일단 가서 모여든 면면에 접하였을 때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80여 명의 소위 거리의 지명의 사를 망라한 대연이었으니 80여 명에서 겨우 80분지 34명밖에는 구면이 없음이다.

60옹 50객 40줄 30대의 각 연대에 뻗쳤고, 종교가, 교육가, 법률가, 도규가, 조고가들이 쓸어 왔으니 희랍 시대의 초대객보다는 확실히 색채인 셈이다. 물론 그들의 지혜가 아가톤의 집에 모였던 옛 사람들에게 미치는지 못 미치는지 그들에게 비겨 자라격에나 갈는지 못 갈는지는 별문제다. 그들에 의해

서 반드시 거리가 운전된다고도 할 수 없으나 그 얼굴들이 별로 신통할 것은 없는 것이요, 어떻든 이것도 저것 같고 저것도 이것 같아서 아물아물 그 수가 퍽도 많은 것이다.

도회의원도 많거니와 의사도 퍽은 많다. 인사 받은 몇 사람을 구면의 분에게 조용히 물어 볼 때 "그 사람은 상당한 지식인이오." "그 사람은 그다지 좋지 못한 사람이오." 대답하고는 좌석을 군데군데 짚어서 설명한다. "저건 돈푼이나 있죠." "저건 고리 대금 업자요." "저건 술주정꾼이오..." 잡동사니다.

오월동주이기는 하나 잔치가 되었을 때에는 준연한 식욕으로 향해서 화기 준연하게 통일되었고 술이 돌았을 때에는 운명의 배멀미에 취한 듯 흐느적거리며 당 안이 낭자하였다. 10여 명의 명기가 틈틈에 끼어서 술시중뿐만이 아니라 이야기 사중에 여념이 없다. 청초한 맑은 자태들이 점홍이 아니라 점백의 정취를 나타냈다. 사람은 항상 무슨 말들이 그렇게 많을까.

아가톤의 집 연회에서는 연애를 논의하고 사랑의 원리를 이야기들 하였다. 잔치 마당에서는 그것이 가장 격에 맞는지도 모른다.

나도 이 날 밤의 한 구석의 회화를 비역해 본다. 연애론이 아니고 치정론이라면 결국 현대인의 그만큼 고대의 희랍인보다 타락했다는 증명뿐이요 내 허물은 아닌 것이다.

"요새 까딱 안 오실 젠 신문사 일이 바쁜신 모양이죠?"

"바빠서 안 가는 줄 아나?"

"그럼 아직두 그걸 노여워하고 계시나요? 내 곡절을 얘기한다 하면서 못 했군요. 오늘 밤에는 기어이 얘기해 드리죠."

"발명은 왜, 뻔히 아는 노릇을 이제 새삼스럽게 발명할 테야?"

"세상 소문이란 대개 사실과는 다르거든요. 말이란 양편 말 다 들어야지, 왼편 말만 가지군 아나요."

"암만 그래 보지, 곧이듣나."

"그 날 밤같이 우리집까지 오셨던 건 아시죠. 얘기는 게서부터 시작되는데 선생이 가신 뒤 군이 자꾸 쉬구만 가겠다는군요. 손님 대접이라 하는 수 없이 이불을 펴 주구 전 어머니방에 가 잤죠. 그뿐이에요."

"그 군의 말과 다르거든."

"그건 그렇죠. 아침에 일어나 그 방에 갔을 때 노여노여하면서 내 겨드랑이를 들추겠지요. 변태인가 봐요. 보이는 건 그뿐이에요."

"흥 그걸루 설명이 다 됐다구 생각하나."

"그럼요. 그 이상 아무것두 없는 걸 어떡해요. 그 뒤에 다시 시골서 왔을 때엔 아침부터 허덕거리고 와선 보구 싶어 왔다는구먼요. 문제는 그 날 밤인데 여기저기 불리면서 늦도록 놀다가 좋은 사람과 같이 돌아가서 자리에 누웠죠..."

"요것 봐, 새롱새롱 말 막 한다."

"이렇게 된 바에야 막 하지 않구 어떡해요. 그래두 믿지 않으시면서. 대문 거는 것 깜빡 잊었던 것이 불찰이었죠. 별안간 문소리와 발소리가 나더니 주추 앞에서 부르는 목소리가 바로 그이의 목소리겠지요. 벌써 자리에 누웠구 하는 수 있어야죠. 불을 탁 끄구 시침을 떼면서 몸이 고달프니 가라구만 졸랐죠. 들어 줘야 말이죠. 이러쿵저러쿵 실랑이를 치던 끝에 기어이 마루에 뛰어올라 문을 열라는군요. 그래서 결국 터지구 말았죠. 방 안의 군이 이불을 홱 차구 일어나더니 고래 같은 소리루 누구냐구 고함을 쳤던 거죠. 그 한 마디에 밖이 별안간 조용해지구 그뿐이었어요. 생각하면 미안두 하구 부끄럽기두 하구"

"천연스럽게 말하는 품이 영웅인가 요물인가?"

"자, 이젠 오해 다 풀어 주세요... 어쩌나 사람들이 벌써 어느새 이렇게 헤졌네. 이 길루 우리집에 가시지 않겠어요? 오래간만에..."

"...글쎄 가 볼까. 요것봐. 웃긴 왜 웃어."

사내라는 게 다 만만하단 말인가. 나도 실상 사내면서도 사내 맘 모르겠다.

'수필 읽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나의 고향 / 전광용  (0) 2021.05.01
가을의 여정 / 전광용  (0) 2021.05.01
장모님과 끽연(喫煙)을 / 목성균  (0) 2021.04.30
예수 부처님 / 반숙자  (0) 2021.04.30
고양이 발톱 / 반숙자  (0) 2021.04.30
공지사항
최근에 올라온 글
최근에 달린 댓글
Total
Today
Yesterda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