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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다시 시작 / 김은주

부흐고비 2021. 5. 6. 09:06

목화가 툭 하고 고개를 꺾었다. 경주어 얻어 온 씨앗이 되 피우고 다시 살아나 여러 해 나의 뜰에서 산다. 솜이 칭칭 감긴 씨앗 몇 알을 누구에게 받아 왔는지 통 기억에 없다. 백련이 지고만 어느 논둑에서 받은 기억은 아련한데 누구였는지 무슨 일로 연 밭에서 목화씨를 건넸는지 아득하기만 하다. 마른 기억은 바람에 사라졌지만 해마다 야무진 검은 씨앗을 쓰다만 종이에 싸 확독에 보관해 둔다. 옹기에서 겨울을 난 씨앗은 봄이 되면 다른 일년초와 함꼐 뜰 여기저기 뿌려지는데 그 위치는 꽃 피는 여름이나 되어야 정확히 알게 된다. 마당 귀퉁이에 있는 듯 없는 듯 그렇게 꽃 피우고 지다가 초록이 쓰러지는 이맘때쯤 흰 솜꽃을 피워 존재를 드러낸다. 집 비운 사이 된서리가 다녀간 모양이다. 온통 뜰에 데쳐놓은 나물처럼 풀이 죽었는데 그 사이를 뚫고 목화, 희디흰 낯빛으로 볕을 쬐고 섰다. 쏟아져 부서지는 가을볕 탓인지 어인 일로 마른 꽃이 물오른 꽃보다 더 곱다.

배롱나무 아래 하얗게 핀 목화를 소쿠리에 따 모은다. 진즉에 펴 흰 속을 다 드러내고 있는 송이도 있고 이제 막 딱딱한 껍질을 열고 있는 송이도 있다. 그도 저도 두고 볼 것 없이 다 딴다. 이미 잎은 서리에 축 처져 더는 두고 볼 수 없고 몇 송이는 송이 그대로 보관하고 다른 것은 솜을 빼고 씨를 발라 둔다. 담장 아래 감국도 덜 핀 송이로 따 모아 마루에 널어놓는다. 놀란 벌레들이 꽃술에서 얼구 기어나가면 달군 솥에 국화를 덖는다. 아찔한 향기가 코를 찌르며 서서히 수분이 날아간다. 몸속 수분이 다 거둬지면 다시 한지 위로 옮겨 마지막 남은 한 점 물기조차 사라지기를 기다리며 잠을 재운다. 따뜻한 곳에서 한숨 푹 자고 나야 국화의 향 매김도 이루어지고 오래 보관이 가능해진다. 토닥토닥 등 두드려 꽃을 재우며 아픈 아이와 힘겹게 건너온 지난 일 년을 기억해 본다.

천길 벼랑 끝에서 계절이 딱 한 바퀴 돌았다. 글도 쉬고 음식도 잠시 접고 아이만 들여다보는 시간이었다. 싫어서 아니 한 것이 아니라 할 수 없는 처지라 잠시 쉬었다. 죽고 못 살던 두 가지 일을 손에서 놓고 막막함 앞에 서 있던 시간이 무던히 지나갔다. 예전에는 철철이 산을 오르고 꽃을 따고 다시 곡식을 팔아 음식을 만들기까지​ 오가는 계절을 잊고 산 적도 많았다. 하지만 눈만 뜨면 하던 일을 잠시 놓고 오롯이 아픈 아이와 보낸 일 년이 내게는 길고도 더딘 시간이었다. 글쓰기야 잠시 쉬면 또 다른 물이 차오르겠거니 여기며 기다렸지만, 음식은 손 놓은 내내 계절의 흐름 따라 저절로 움직여지는 몸을 주저앉히기에 여념이 없었다. 몸이 기억하고 있는 계절이 따로 있었다. 봄꽃이 피면 차를 덖어야 할 것 같고, 붉은 홍옥이 나오면 꽃을 접어야 하며 풋대추가 살이 오르면 정과를 집어야 할 것 같아 애를 태웠다. 꽃 피고 질 때마다 울렁증을 겪었고 곡식이 익어 갈 때마다 들판을 기웃거렸다. 일 할 떄의 고단함은 지금 생각하니 양반이었고 계절을 그냥 떠나보내는 시간이 너울너울 나를 더 힘들게 했다.

우리네 삶이 천둥 번개면 어디 단 하루라도 온전히 살아낼까. 비 그치고 구름 걷히면 볕이 나게 마련이고 볕이 나니 또 바람 분다. 도대체 마르지 않을 것 같았던 마음도 불어오는 바람에 가벼워지고 하늘은 다시 높아졌다. 푸르게 처마를 감싸던 덩굴손도 붉게 물들었고 씨 없는 감은 올해도 등불을 내걸었다. 찌그러진 그릇에 감을 따 모은다. 미리 익어 저절로 터진 것도 있고 아직 덜 익은 것도 눈에 띈다. 한 몸에 매달린 감도 제각각 여무는 속도가 다르다 성급하게 계절을 앞서 간 것도 있고 느긋하니 홀로 뒤척이는 것도 있다. 빠르다 하여 좋을 것도 없고 늦다 하여 애탈 것도 없다. 제 몸속의 생체 시계대로 흘러가면 그뿐이다. 계절은 언제나 오고 하루치 햇살은 누구에게나 공평하니까.

다시 찹쌀을 불려 고두밥을 찌고 서릿발이 내린 마당에 내다 말린다. 서걱서걱 얼음 알갱이가 쌀을 뚫고 들어가야 볶을 때 제대로 꽃이 핀다. 얼었다 녹았다 하며 균열이 간 틈 사이로 강정 꽃이 하얗게 이는 것이다. 덖은 꽃은 유리병에 갈무리하고는 늙은 호박은 푹 삭혀 넉넉히 조청을 달여 놓는다. 대추채를 썰고 사과는 곱게 꽃을 접어 쟁여둔다. 익숙하던 일이 종일 손에서 떠나지 않으니 이제야 비로소 고요해지는 마음. 겨울이 깊었는지 혿우개 산 그림자가 마당 깊이 들어왔다. 멀리 잎 떨군 미루나무의 가벼운 모습을 보며 잠시 숨을 고른다. 다시 시작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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