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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힘 / 신재기

부흐고비 2021. 5. 5. 08:32

종잡기 어려운 상념에 빠졌다.

러닝머신에 오르더니 주저 없이 달리기 시작했다. 광야를 질주하는 말 같았다. 쿵쾅쿵쾅! 발판을 딛는 소리에 힘이 넘쳤다. 힐끗 곁눈질로 내 오른쪽 옆자리의 그를 훔쳐보았다. 건장한 청년이었다.

나는 러닝머신의 양손잡이를 잡다 말다 하면서 보통 걸음으로 걷고 있었다. 시선은 앞에 켜놓은 텔레비전을 향했다. 다른 사람이 봤으면 운동을 하는지 텔레비전을 시청하는지 분간이 가지 않을 정도의 그런 모양새였다.

옆자리에서 달리는 그 청년을 의식하기 시작하면서 내 마음과 몸이 힘없이 허물어지는 것 같았다. 그럴수록 마음속에서 이상한 오기 같은 것이 스멀스멀 일었다.

“힘자랑하지 마. 왕년에 나도 너 못잖았어. 나뭇짐 지고 산길을 거침없이 달렸지. 무시하지 마. 알았어.”라고 괜스레 자격지심과 적개심 사이를 왔다 갔다 했다.

그날 헬스를 하면서 힘과 무력, 젊음과 늙음, 순응과 저항 등 종잡기 어려운 상념에 빠졌다. 몸보다는 마음 운동을 톡톡히 한 셈이다.

헬스를 마치고 아파트 구내에 들어서자마자 우연히도 초등학교때 은사님을 만났다. 그분은 초등학교 대선배님이기도 했다. 같은 아파트 이웃 동에 살다 보니 가끔 마주칠 때가 있었다. 그때마다 선생님은 나에 대한 엇비슷한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언제나 나를 ‘신 교수’라고 호칭했다. 그날도 마찬가지였다.

“오! 신 교수 잘 지내는가? 고향 형님도 잘 있고. 아직 정년퇴임이 좀 남았지.”

나에게 대답할 겨를도 주지 않고 말을 이어갔다.

“선생님, 안녕하십니까. 건강하시죠. 고향에는 자주 들르십니까?”

나는 겨우 비집고 들어가 정중하게 인사를 올렸다. 선생님과 나의 고향 마을은 십 리밖에 떨어지지 않았다. “참, 보기 좋네. 걸음도 똑바르고 아직 힘이 넘쳐 보여! 우리 신 교수는 언제 보아도 잘생겼어.”

초등학교 교장으로 퇴임하신 선생님은 지금 여든 나이에 접어들었는데, 매일 새벽 동네 뒷산에 오르고 낮에는 거의 빠지지 않고 서실에 나간다고 했다. 그날 헬스장에서 청년의 넘치는 힘에 위축되었던 나는 한 시간 후에 힘이 넘치는 사람으로 부활했다.

그 이후 이 글을 쓰기까지 ‘젊음과 힘’이라는 화두가 오랫동안 내 의식의 한구석을 차지했다. 젊음과 힘은 때로는 절대적인 가치로, 때로는 상대적인 가치로 적용된다. 20킬로의 쌀자루를 한 손으로들 수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의 구별은 분명하다.

하지만 그 힘이 물리적 차원에서 정신적이고 형이상학적인 차원으로 넘어가면 그것은 단순하지 않다. 나는 이미 60대 초로에 접어들었다. 늙음과 노쇠의 징후가 곳곳 에서 동시다발적으로 포착된다. 분명 늙었고 힘이 떨어졌다.

이는 거스를 수 없는 자연스러운 순리다. 인간 삶의 과정을 집약적으로 표현한 말이 ‘생로병사’가 아니던가. 이는 숙명이다. 늙어 힘이 떨어지는 과정은 존재가 소멸해가는 피할 수 없는 길이다. 사람은 누구나 그 길 위를 걷는다.

그런데 인간 삶과 그 의미를 어떤 시간의 경과 속에서 일관된 것으로 파악하는 것은 하나의 관념이고 허위일 수 있다. 존재는 관념 이전에 실존이다. ‘나이 듦과 힘없음’의 표지는 객관적인 것 같지만 주관적 관념에 의해 조작된 것에 불과하다.

힘은 무엇인가. 힘은 어디에 있는가. 물론 살아있음 그 자체가 힘이다. 하지만 진정한 힘은 자신을 한곳에 가두지 않고 변화를 도모 하는 데서 생기는 것이 아닐까. 힘은 자기 갱신이고 변화이다.

변화의 낯섦과 위험을 피해 현재 자리에 안주하면 편안함을 얻을 수 있지만, 힘없음과 늙음이란 통념의 동굴에 갇히고 말 것이다. 자기 변화를 꾀하는 용기가 힘의 본질이 아니겠는가.

 



◘ 프로필
- 1990년 매일신문 신춘문예에 당선(문학평론)

- 현재 《수필미학》(계간) 주간

- 수필집: 《기억의 윤리》 外

- 평론집: 《형상과 교술 사이》, 《기억과 해석의 힘》 《수필의 자폐성을 넘어서》, 《수필의 기본 개념들》 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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