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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인생 배우의 독백 / 김상립

by 부흐고비 2021. 5. 13.

내가 언제, 어느 곳에서 태어나고, 부모는 누구를 만날 것이며, 윗대로부터 물려받은 유전적 소질은 무엇이고, 타고난 약점은 어떤 것인가? 그것은 전혀 나의 선택이 아니었다. 또 내가 처했던 어릴 적 생활환경이나 교육내용도 내 마음대로는 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내 의지와 관계없이 주어졌던 그런 요소들이 중요한 자재(資材)가 되어 인생의 초기 무대가 만들어 졌고 꼼짝없이 그 무대 위에서 나름으로 삶이란 연기를 펼쳐갈 수 밖에 없었다.

나에게 주어졌던 초기 무대가 이런 식으로 진행되었듯, 다른 사람들도 마찬 가지였을 것이다. 그래서 시작부터 똑 같은 삶은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가 없었다. 사람들은 각자에게 부여된 자기만의 개성과 능력으로 연극을 끌고 갔고, 이런 무수한 독립된 연극들이 모여 비로소 사회라는 큰 무대를 이루고 함께 공연하도록 설계되었던 것이 인생이었다. 나는 나이 20세에 고향인 먼 남쪽바다를 떠나 서울로 자리를 옮겼고, 오직 내 혼자 힘으로 무대를 꾸며야 하는 현실 앞에 마주섰다. 도와줄 사람 하나 없는 낯선 곳에서 벽돌 한 개, 송판 한 장, 못 한 움큼씩을 구해 벽을 쌓고 바닥을 만들어 나갔다.

그런데 내 주위에는 부모의 덕으로 일찍부터 크고, 튼튼하고, 화려한 무대를 얻어 마음껏 날개 짓 하는 또래들이 있었다. 사회생활을 제대로 하려면 더러는 나와 관련 없는 이들의 공연도 긍정적으로 바라보고 힘껏 응원의 박수를 보냈어야 옳았다. 그런데도 나로서는 꿈도 꾸지 못할 무대에, 너무 쉽게 올라있는 그들을 보며 속상했다. 불공정과 불평등함이 나를 화나게 했던 게다. 나에게는 왜 그런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는지 원망스러웠고, 그들과 일부러 맞서 싸우느라 자신의 연극에도 깊이 몰입하지 못하고 말았다. 심지어는 무대를 던져버리고 마냥 좋아 보이는 그들의 무대를 뺏어서 연기하고 싶은 욕망을 달래느라 애를 먹기도 했다.

나는 조급한 김에, 작은 재주만을 믿고, 새롭고 멋진 무대를 만들려고 몇 번이나 과감한 시도를 했다. 그러나 그때마다 보이지 않는 커다란 손이 막아서듯, 예상외의 동티가 생기는 바람에 일은 생각대로 풀려가지 않았다. 절망한 나는 티베트 어딘가로 가서 중이 될까 하기도 했고, 태평양을 누비는 원양어선을 타고자 한동안 방황하기도 했다. 서울 생활 20년, 드디어 무대를 지방으로 옮기기로 결심하고 대전을 거쳐 대구에 정착하게 되었다. 내가 서울에 갔을 때도 생판 첫걸음이었고, 지방으로 무대를 옮겼어도 역시 아무 인연도 없는 낯선 곳이었으니 그 고초를 이루 다 설명할 수가 없다.

운명적으로 내게 주어진 무대가 나를 제한할수록, 쓰여진 대본이 미미한 내용일수록, 한 눈 팔지 말고 혼신의 힘을 쏟아 더 좋은 연기를 펼쳤어야 했었는데, 차오르는 감정을 쫓아 정신 없이 달리는 일이 잦아졌다. 비록 내가 선택하지는 않았다 할지라도, 현실이라는 무대는 당시의 삶에서는 최선의 무대였고, 배역이었던 사실을 나중에 가서야 아프게 깨달았다. 아무도 눈여겨보지 않는 단역(端役)이라도 신의 눈에는 더없이 귀하고 소중한 역할이 될 수도 있었던 것을. 이렇게 지난 날의 내 연기란 것이 입으로는 그럴듯한 대사를 줄줄 외우면서도, 속으로는 불평만을 계속 읊어 댄 꼴에 지나지 않았으니 어떻게 잘 풀려갔겠는가? 그 결과 나를 위한 연극도, 대중을 위한 무대도 제대로 펼쳐보지도 못한 채, 잊혀져 가는 무명배우처럼 허전하고 쓸쓸한 심사를 한 아름 안았다.

퇴직한 후, 나는 평생 하던 일에서 아주 손을 떼버리고 수필문학과 한국화란 두 개 분야를 주로 연기하고 있다. 이런 대단찮은 이력이니 누가 나에게 새삼 의미 있는 배역을 주겠냐 만은, 설령 새로운 일을 맡겨준다 해도 부족함이 적지 않을 것이라 여기고 욕심을 내려놓고 산다. 하지만 오늘 당장 내 앞에 놓여진 무대만이 진짜로 내가 갈 길이라는 사실을 인정하고, 오직 한 사람 변치 않을 관객인, 내 자신을 위해서라도 끝까지 의미 있는 연기를 펼쳐볼 각오를 다지고 있다. 생각해보면 어느 인생인들 힘들지 않고, 어느 인생인들 아프지 않을 수 있으랴! 나는 나이 들어가며 그 어떤 것을 향한 집착이나 욕망으로부터 보다 자유로워지기 위해 무던히도 애써왔다. 세상에 부대끼고 사람에게 치여가면서도 부끄럽지 않게 살려고 몸부림을 쳤다. 다행히도 그런 연극의 진행과정을 나름의 예술 작품으로 만들어 낼 수가 있었으니, 그것만으로도 나는 행복하다.

코로나 사태가 덮친 후, 나의 무대는 1년넘게 닫혀있고, 지금은 혼자만의 간이 무대에서 시간을 보내고 있다. 무대래야 고작 6평 남짓한데 장치도 책이 대부분이고, 한 쪽은 이젤과 화구(畵具)들이 차지하고, 벽에는 의상을 위한 붙박이 장이 부동자세로 서 있다. 아침에 눈을 뜨면 오늘은 어떤 역할을 해야 할지를 확인하고, 그에 맞는 대사(臺詞)와 몸짓을 구상한다. 비록 머리칼은 백발이고 늙고 쪼거라 들었지만, 오랜만에 배역을 받는 노(老) 배우처럼 늘 감사한 마음으로 하루를 맞는다. 찾아오는 사람은 하나 없어도 나는 자신을 홀로 객석에 앉혀놓고 연기를 시작한다. 이제는 과거와는 달리 감정을 실어 토해내는 대사보다는 독백이 대부분이다. 조용히 나를 향해 물음을 던진다. ‘문학과 내 인생은 어떤 관계일까?’ ‘나는 왜 하필 이 땅에 태어났으며, 아직도 남은 사명이 있다면 그것은 또 무엇인가?’ 설령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다 해도, 남은 삶 앞에서 보다 당당하게 무대에 서고 싶다. 나는 어쩔 수 없는 인생배우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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