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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감자꽃 / 허영자

부흐고비 2021. 6. 1. 13:19

'저게 뭘까?' 베란다에 있는 상자 위로 빼꼼이 고개를 내밀고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연필에 달린 지우개보다 작은 게 연한 자줏빛이다, 그것의 정체를 알기 위해 뚜껑을 열었더니 쪼글쪼글한 감자가 가녀린 싹에 꽃을 피우고 있었다. 지난 해 친정에서 감자를 가져와 상자 째 놓고 먹다가 몇 개 남은 걸 깜빡 잊고 있었던 것이다,

온몸의 에너지를 한군데 쏟아 꽃망울까지 맺느라 힘겨운 시간을 보내고 있는 감자가 나는 신기하기만 했다. 감자에 난 싹은 많이 봤지만 흙이 없는 곳에서 꽃을 피우는 건 처음 보기 때문이다.

친정집은 내가 어릴 때부터 감자 농사를 지었다. 봄이 되면 할머니와 어머니는 양지쪽에 앉아 감자 눈이 있는 곳을 도려내 밭에 심었다, 도려낸 씨감자는 스스로를 썩혀 꽃을 피우고 땅속 가득 새로운 생명을 주렁주렁 키웠다, 갓 캔 감자를 찌면 행복한 냄새가 났다.

감자는 알뜰하게 먹을 수 있는 작물이다, 얼거나 썩어도 가루를 내어 떡을 만들 수 있다. 어머니는 여름에 썩은 감자에서 얻은 녹말을 뚝뚝 떼어 말렸고, 겨울에는 언 감자를 손질해 디딜방아에 찧어 가루를 만들었다, 그걸 만들기 위해 종종걸음을 쳐야했다. 농사짓는 모든 것이 그렇듯이 감자가루도 어머니 손이 수없이 닿아야 얻을 수 있었다, 언 감자가루로 만든 떡은 새까맣다, 그래서 우리는 햇볕에 탄 얼굴을 감자떡이라 했다. 하얀 감자 송편은 떡집에서 사 먹을 수 있지만 언 감자떡은 어머니 돌아가신 후로는 먹을 수가 없다.

어머니는 '당신을 따르겠다'는 감자꽃 꽃말처럼 오로지 아버지와 우리형제를 위한 삶을 사셨다, 할머니와 성격이 너무 다르고 외가와 문화차이도 많아 고부간의 갈등이 심했다, 그럴 때마다 할머니는 아버지께 어머니의 잘못을 얘기했고 아버지는 어머니를 심하게 나무라셨다. 외아들인 아버지는 동네에서 내노라는 효자였기에 항상 할머니 편이었다. 때문에 어머니는 늘 혼자였고 마음고생도 많이 하셨다.

경제적인 집안살림도 할머니와 아버지가 맡아 하셨기 때문에 밖에 나갈 기회가 적었다. 농사를 지어 곡식을 파는 것도 시장에서 필요한 생활필수품을 사오는 것도 모두 아버지와 할머니가 하셨다. 그러니 어머니는 일만 하고 돈은 만져볼 수 없었다. 어머니가 필요한 것을 사야 할 때도 할머니나 아버지가 사다 주시거나 돈을 타서 써야 했다. 그러다 보니 어머니는 세상물정에 점점 어두워지게 되었다. 그럴수록 할머니는 어머니를 탓하게 되는 일이 잦아지고 이는 악순환이 되었다.

내가 초등학교 다닐 때 어머니와 할머니께서 심하게 다투신 적이 있다. 먹는 것을 유난히 참지 못하는 어린 동생이 동네 장사한테 복숭아를 사달라고 한 것이다. 할머니와 아버지는 계시지 않았고 어머니는 돈이 없어 못 사준다고 했지만 동생은 울고불고 막무가내였다. 어머니는 처음으로 보리쌀 한 되를 퍼다 주고 동생이 먹고 싶어하는 복숭아를 샀다. 그것을 안 할머니는 노발대발하셨고 , 어머니의 자초지종 말씀에도 화가 누그러지지 않았다. 오히려 집안 살림 다 팔아먹겠다며 역정을 냈다. 참다못한 어머니가 한마디 했다가 아버지까지 큰 소리를 치게 되었다. 돌아가시기 몇 해 전 어머니는 하루에도 몇 번씩 도망가고 싶었다고 속내를 털어놓았다. 그러나 우리들이 개밥에 도토리 될까봐 참았다고 했다. 나는 우리가 어머니의 올가미였다는 생각을 했다.

어머니는 항상 입버릇처럼 '에미 몸은 무쇠'라고 했다. 그리고 무쇠처럼 일을 했다. 새벽부터 시작한 일은 저녁이 되면 쓰러지듯 잠자리에 들었다가 아침이면 다시 일어나기를 반복했다. 외롭고 아픈 가슴앓이를 힘들게 일을 하며 잊은 듯 했다. 아니 생각날 겨를을 만들지 않으려고 애썼는지 모른다. 밭에서 일을 하다가 동생이 먹고 싶다는 산딸기를 따기 위해 맨발로 가시넝쿨 속을 다니기도 했다. 그때 처음으로 어머니 발바닥의 굳은살 두께를 알 수 있었다.

평생 일만 하고 병원문턱을 넘은 일이 없어 단단한 줄만 알았던 어머니가 병원을 가게 되었다. 입맛이 없어지고 속이 아프다하여 찾은 시골병원은 큰 병원에 가길 권했고 큰 병원에서 췌장암 진단을 받았다. 하늘이 무너졌다. 착한 사람은 복을 받는다는 말이 다 거짓말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어머니 앞에서 슬픈 모습을 보일 수 없었다. 누구보다 마음이 여리신 분이기에 사실대로 말씀드리면 정신을 놓으실 것 같았다. 그래서 몸속에 염증이 있다고만 했다.

어머니는 당신의 몸속에 무엇이 자라는지 모른 채 집 걱정만 했다. 할일이 많은데 왜 이리 염증이 낫지 않느냐고 성화셨다. 집에 가서 일하다 보면 저절로 나을 거라고도 했다. 몸은 병실에 있지만 마음은 시골 밭에 가 있었다. 농사 걱정과 아버지 걱정을 하던 어머니가 하루는 "오늘은 왜 이리 느그 아버지가 보고 잡냐."고 했다. 너무하다 싶을 정도로 어머니를 홀대하던 아버지다. 그 아버지가 어머니가 보고 싶어 한다고 하자 다음날 바로 병원에 오셨다. 어머니는 아버지를 보자마자 힘들게 무엇 하러 왔느냐며 당신의 아픈 몸보다 손수 새벽밥 지어 잡숫고 병원까지 오신 어버지 걱정이 컸다.

병원에 계시는 동안 어머니 얼굴은 예전과 달랐다. 틈만 나면 밭에서 시간을 보내 늘 감자떡처럼 검던 얼굴이 감자꽃처럼 희고 예뻤다. 얼굴에 크림을 바르지 않아도 화장한 얼굴만큼 피부가 고왔다. 병문안 오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어머니가 이렇게 예쁜 줄 몰랐다고 했다. 그 예쁜 모습으로 어머니는 다음 해 봄이 오는 길목에서 세상을 뜨셨고 당신이 원하던 감자밭에 누우셨다. 동네 사람들이 엄마한테 잘해드려야 한다고 수없이 했던 말을 어렴풋이 알게 되었을 때 어머니는 우리 겉을 영원히 떠나셨던 것이다.

상자 안에는 보들보들한 감자꽃 몽우리가 몇 개 더 있다. 언제 어디서도 금방 알아볼 감자꽃이다. 그런데 너무 작고 생각하지 못했던 곳에 있다고 알아보지 못했다. 어려운 환경에서 힘들게 핀 감자꽃을 보니 친정어머니가 생각났다. 평생을 마음속에 한을 간직하고 살았다. 자식을 다섯이나 키우면서 학용품이나 옷가지도 손수 사 주신 적이 없다. 늘 뒤에서 지켜보기만 했다. 소풍 갈 때도 입학식이나 졸업식에도 한 번 참석하지 못했다. 오로지 일만 하는 며느리였지만 자상하신 어머니셨디. 어쩌면 어머니께 친정집은 감자가 싹을 키우는 상자 속 같은 곳을 아니었을지 모른다. 오늘은 문득 김이 모락모락 나는 감자떡이 담긴 박바가지를 들고 산골길을 달려 어머니 심부름을 가고 싶다.



▲허영자 수필가: 충북 단양 출생. 복사골문학회 수주 시동인, 하우고개 수필동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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