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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하필이면 하필오고 / 김상립

부흐고비 2021. 6. 1. 17:32

내 전자우편(E-mail) 주소를 만들어야 했다. 뭐라고 하면 좋을까? 내 이름의 영문 약자를 쓸까, 회사명이나 관련 산업을 활용할까, 아니면 내게 의미 있는 숫자를 배열시킬까 하고 며칠을 두고 생각했었다. 드디어 찾은 이름이 바로 ‘hapilo’이다.

아이들이 어렸을 때, 나는 자주 이사를 다녔다. 내 뜻과는 달리 순전히 직장 때문에 옮겨 다닌 것이었지만, 가족들에게 미안할 정도로 이리 저리 끌고 다녔다. 살았던 도시만 봐도 서울과 인천, 광주(光州)와 대전, 지금은 대구에서 산다. 같은 시내에서 주소지를 옮겼던 것까지 모두 합하면 주민등록증 주소란이 한참은 모자랄 것이다. 더구나 내 주소가 바뀔 때 마다 00아파트 00동 0000호라는 암호 같은 숫자로 불려지게 된 세월이 아득하니, 주소지란 게 마치 퍼즐게임 빈칸에 써넣을 미지의 숫자처럼 여겨지기도 했다.

그래서 나는 다시는 바뀌지 않을 주소, 의미가 있는 주소, 아름다운 주소를 갖고 싶었다. 남들은 용하게도 살고 싶은 자리를 찾아 아담한 집을 짓고 잘 살기도 하더니만, 나는 내가 원하는 곳에 단 한 번도 살아 보지 못했으니 이 억울한 심사를 어이하리. 하지만 언젠가는 마음에 드는 거주지를 만나서 살게 되겠지 하는 희망을 아직은 버리지 않고 있다. 그러다가 나도 E-mail을 사용하게 되었고, 그 주소만이라도 평소에 내가 꼭 갖고 싶었던 것으로 하고 싶었다.

사람들은 하나같이 행복하기를 바라고 행복을 지켜가고 싶어 하지만 그게 마음대로 되는 게 아니다. 천신만고 끝에 겨우 행복이 찾아왔나 싶으면, 어느새 불행이란 놈이 행복을 밀치고 그 자리에 떡 버티고 앉아 버린다. 이렇게 찾아온 불행이란 놈은 여간해서 물러가지 않는다. 더욱이 사회환경이 도와주지 않으면 더 고전을 하게 마련이다. 그런데 우리 나라 형편을 보면, 설령 개인적으로는 ‘나는 행복하다’고 말하는 사람이 많을지 모르나 사회적 행복지수는 다른 나라에 비해서 월등히 낮을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의 정치적 여건이나, 사회 경제적 환경들이 하나같이 우울한 내용뿐이고, 어려운 처지의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려고 애쓰는 흔적들이 잘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또 제 가족에 대한 사랑은 극성스러울 정도지만 타인에 대해서는 놀랄 만치 냉담한 게 사실이다. 이기적인 사랑은 흘러 넘쳐도 이타적인 사랑은 찾아보기가 어려운 사회라는 지적이 아프게 와 닫는 대목이다.

비록 가난했었지만 여유와 정이 흘렀던 과거와는 달리 왜 이렇게 삭막하게 되어 버렸을까?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그 중에서도 너, 나 할 것 없이 마음으로부터 ‘연민의 정’을 많이 잃어버린 것이 중요한 이유가 되지 싶다. 그렇다면 내가 말하는 연민의 정은 무엇인가? ‘연민’의 사전적 의미는 ‘불쌍하고 딱함’으로 되어 있지만, 단순히 측은해 하는 마음만으로는 연민의 정에 이를 수 없다는 게 내 판단이다. 연민의 정이란 지극히 인간적인 자기반성으로부터 출발하는 마음 씀이라 본다. 남의 아픔이나 불행을 자기의 것으로 느끼는 차원을 넘어, 그러한 일이 생긴 원인이 마치 자기에게도 있는 것처럼 생각하는 착한 인간 정신이 바로 연민의 정이다. 참으로 딱해 보이는 일을 당한 사람에 대해 가지는 순수한 연민의 정은 세상을 한층 더 따뜻하게 만들어 갈 것이다.

만일 이런 마음씨 위에서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들이 많아진다면 자연 행복한 사회가 될 것이고, 그 속에 사는 개인 역시 행복한 삶을 누릴 수가 있을 것이다. 흔히 동정으로 시작된 사랑은 언제나 동정으로 돌아가기 마련이라는 말들을 자주 하지만, 진정한 연민의 마음이야 말로 이타적 사랑의 출발점이 된다고 나는 믿고 있다. 세상을 안타깝게 바라보는 따뜻한 마음씨가 모여 우리 모두를 행복하게 만든다는 사실을 그 누가 의심하리요. 그래서 나는 ‘사람이 행복해 지려면 연민의 정으로 세상을 사랑해 보자’란 글귀를 만들어 두었었다. ‘옳지 이번 기회에 이것을 주소로 이용하면 되겠구나’ 하여 행복, 연민, 사랑이란 각 영문 단어의 앞 두 글자씩을 취하여 그것을 합성어로 만들었더니 ‘hapilo’ 가 되었다. 나는 하루에도 몇 번씩 이 단어를 자판기로 두드리며, 덕분에 내 삶이 좀 나아지면 좋겠다고 기원해 본다.

이런 나에게 ‘당신 메일 주소가 이상하다. 그 내용이 뭐냐’고 간혹 물어오기도 한다. 다행이 형편이 닿으면 설명을 하지만 대개의 경우 ‘그냥 합성어로 만든 것’이라 말하고 만다. 그런 어느 날, 고향에 있는 내 동창생 하나가 느닷없이 전화를 했다. ‘야! 상엽이냐? 나 ㅂ이다. 내가 아들 놈한테서 컴퓨터를 배워 자네에게 편지를 보내려고 하는데 주소가 이상해서 전화했다. 이 사람아! 필명을 지은 모양인데, 그래도 성은 바꾸지 말아야지. 이름이 하필이면 하필오(何必吾)가 뭐꼬’ 하는 것이다. 내가 어떤 뜻으로 주소를 만들었던 내 옛 친구가 나를 빗대어 기발한 소리를 해대니 할 말이 없다. ‘내가 hapilo 라고 썼으면 그냥 그러려니 하면 될 것을 하필이면 필명으로 읽을게 뭐람’ 하는 불만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이게 다 내 부덕의 소치라 여기고 참을 수 밖에. 연예인들은 예명을 잘 지어 톡톡히 덕도 본다는 데, 나는 메일 주소 하나 잘못 만들어 쓰다가 도리어 큰 불효를 범한 결과로 되었으니 씁쓸하기만 하다. 이렇게 보면 메일 뿐만 아니라 아호(雅號) 같은 것도 무조건 제 좋아서 일방적으로 지어서 사용할 것이 아니고 자기 특징이나 하는 일, 아니면 제 인품에 걸 맞는 것으로 정하는 게 합당할 것이라는 생각까지 든다.

그래 기왕지사 이렇게 된 것, 굳이 내 주소를 바꿀 필요야 있겠는가. 대신 이 주소가 내 자신에게 더욱 유용하도록 마음을 다져야 겠다. 이번 기회에 그렇지 않아도 내 주제로는 좀 과하다 싶었던 행복, 연민, 사랑 같은 의미 대신, 하필오(何必吾)를 나름대로 풀어서 ‘하필 왜 나이어야 하는가?’라는 ‘스스로를 향한 물음’으로 재해석하려 한다. 그동안, 어떤 궂은일이 내게 돌아오면 극구 항변하여 이를 피하려 애썼고, 내가 꼭 앞장서야 할 일에서도 몸을 던져 해결하기는커녕 눈치를 보며 인색하게 굴었던 날들을 아프도록 되짚어 보아야겠다. 이제는 설령 내게 억울하거나 어이없는 일이 찾아와도 남 원망하는 마음 좀 줄이고 ‘내가 뿌린 씨앗 때문 이겠거니’ 하며 순리로 받아 들이려 애쓸 참이다. 그리하여 내 남은 삶에 있어서 하필오를 새로운 화두(話頭)로 삼으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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