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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인생꽃 / 차하린

부흐고비 2021. 6. 22. 15:20

날마다 천변을 산책하면서 저녁노을을 마주한다. 해를 품은 노을이 오늘도 서쪽 하늘을 능소화 꽃빛으로 물들인다. 연방 숨이 넘어가는 다홍빛 해는 오늘따라 한낮 동안 하늘에 떠 있을 때보다 훨씬 크고 웅장하다.

장엄한 일몰 풍경이 인생의 노년기 같아 보여서 마음이 애잔해진다. 노년은 나이든 사람만의 문제가 아니다. 젊은 세대도 결국에는 노년에 다다르니 전세대가 고민해야 할 숙제다. 어떻게 해야 후회 없는 노년을 맞이하게 될까.

노년기는 6070세대와 8090세대로 나눌 수 있다. 8090세대는 일제강점기 때 태어나서 나라 잃은 설움과 핍박을 받다가 광복 후에는 6.25 전쟁까지 겪는 격랑의 세월을 살았다. 6070세대는 6.25 전쟁 전과 후에 태어나서 과밀 교실에서 다다귀다다귀 엉겨 붙어서 공부를 하면서 자랐다. 더러는 월남 파병 가서 목숨과 맞바꾼 돈을 벌었고 일자리를 찾아 광부와 간호사가 되어 독일로 떠났다. 또 많은 사람이 뜨거운 모래바람이 부는 중동의 건설 현장으로 달려갔다. 척박한 환경에서 고군분투했던 그들의 부지런한 근성과 맞바꾼 고귀한 돈이 경제개발의 밑거름이 되었고 나라를 부흥시켰다. 그런데 난데없는 외환위기가 닥치는 바람에 수많은 회사와 가정이 풍비박산 났다. 외환위기 피해가 고스란히 2030세대에게 영향을 주었다. 그들이 자랄 때 사회와 가정이 재정적으로 어려워서 지금 안정적으로 사회활동을 하고 있는 4050세대에 비해 혜택을 제대로 받지 못했다. 그렇게 자란 2030 청년들이 심각한 취업난에 내몰렸다. 집값마저 폭등해서 결혼을 포기한 젊은이가 수두룩하다. 연애, 결혼, 출산, 내 집 마련, 인간관계, 꿈과 희망까지 포기한 7포 세대가 되어버렸다. 그들 사이에서 '이생망'(이번 생은 망했다)이란 말까지 생겼다. 앞날이 창창한 젊은이들의 푸른 삶이 무자비하게 무너졌다. 당장 먹고살기도 힘든 그들의 노후는 누가 책임져야 할까.

6070세대는 자식 교육에 올인 하다가 자신의 노후를 준비하지 못한 사람이 부지기수다. 은퇴 후 제 밥그릇 챙기기도 힘이 드는데 부모를 봉양하면서 취업과 결혼을 못한 캥거루족 자식까지 건사해야 하는 낀 세대가 되어 고달프게 살아간다. 허리 한번 펴지 못하는 6070세대는 제 힘에 부쳐 숨이 넘어갈 지경이다.

노후가 준비된 사람들은 자신의 삶을 주도적으로 이끌면서 걱정 없이 보낸다. 그런데 그런 사람이 많지 않다는 게 문제다. 밥을 굶지 않을 만큼의 연금이라도 받는 사람은 그나마 다행이다. 최저 생활비조차 없는 사람들은 늘그막에 쉬지도 못하고 언제 잘릴지 모르는 단기 일자리에 내몰려서 빠듯하게 살아간다. 신노년이란 말이 무색하게 현실적인 삶은 녹록하지 않다. 백세 시대에 그들은 절대빈곤에 빠지지 않으려고 날마다 발버둥 친다.

그들의 꿈은 소박하다. 자신의 집에서 생활비 걱정 없이 김이 모락모락 나는 따뜻한 밥을 먹고 마음 편히 여생을 보내는 것이다. 사치스러운 욕심도 아닌데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집 없는 사람들은 치솟는 집값 때문에 전세에서 월세로 밀려났다. 제 몸 하나 편히 쉴 곳이 없어서 쪽방촌까지 쫓겨나 고단한 육신을 뉘이고 무료급식소를 전전하면서 끼니를 해결하는 노인들도 있다. 햇빛 한줄기 들어오지 않는 컴컴한 방에서 회한의 한숨 속에 사는 그들의 속울음을 그대들은 들어보았는가. 청춘도 꿈도 사그라진 젊은 날의 허상을 안고 하루하루 연명하는 비참한 삶이 버거워서 스스로 생을 마감하는 경우도 더러 있었다. 사회적으로 구제받지 못하고 곪아서 진물이 흐르는 속내를 털어놓을 곳이 없는 우리나라 노인들 자살률이 OECD에서 가장 높다. 누가 그들을 벼랑 끝으로 내몰았을까.

안정적인 생활과 노후를 위해서 집이 차지하는 비중이 크다. 그런데 서울 도심 집값이 세계에서 두 번째로 비싸졌다. 20대는 월급보다 더 빠르게 오르는 집값 때문에 취직을 미루고 부동산 투자 공부로 몰려든다. 30대는 대출규제 강화로 금융권에서 돈을 빌리기 어려워지자 영혼까지 끌어 모아서 집을 사야 한다는 '영끌'에다 빚내서 투자한다는 '빚투'까지 생겼다. 그들은 평생 내 집 없이 살아야 하는 미래가 두려워서 어떻게 요동칠지도 모르는 주택 시장으로 불나방처럼 뛰어들었다. 거기다가 모래성 같은 주식시장까지도 기웃거린다. 자신들의 든든한 노후를 위해서 홀로서야 하는 2030 세대들의 삶의 목표가 집이 되어버렸다.

집 한 채가 소원인 2030세대와 집 한 채만 가지고 노년을 보내는 6070 세대 모두 저주받은 세대라고 말을 한다. 나이는 상반되면서 어렵게 이 시대를 살아가는 점이 서로 닮았다. 돈을 쫓아가는 젊은 세대나 돈이 아쉬운 노년 세대 모두 돈 때문에 골머리를 앓는다. 이들은 다른 세대들이 경험하지 못한 청년기와 노년기를 살아가는 첫 세대가 되었다.

2030세대와 6070세대는 집에 대해 할 말이 많다. 집 없는 2030세대는 자신들을 '벼락 거지'라 부르고 수입원은 없고 집만 하나 있는 6070세대들은 스스로 '가난한 부자'라고 한다. 집값 폭등으로 집이 있는 자는 더 부자가 되었고 집이 없는 자는 더 가난해졌다. 똘똘한 집 한 채가 신분을 상승시키는 금수저가 되어서 사람들의 사회적 신분을 다주택자와 유주택자 무주택자로 나누어버렸다. 그뿐만 아니다. 집이 있는 사람들은 아이들 키우면서 살던 집에 계속 살고 있었을 뿐인데 집값이 올라 보유세가 늘었다고 하소연하고 남들 다 오른 집값이 자기만 오르지 않아서 상대적 박탈감을 느낀다는 경우도 많다. 집값이 사람들 마음까지 분란시키는 악재가 되었다. 이제 서민들이 중산층으로 오를 수 있는 사다리도 사라졌다. 미래가 준비되지 않는 2030세대와 6070세대에게 인생은 살얼음판이다.

집의 본질은 거주가 목적이다. 혈육의 냄새가 진하게 베여있는 모천 같아서 나들이에서 되돌아오게 만드는 공간이다. 가족의 온기가 꽃처럼 피어나서 지친 몸을 위로 받는 편안한 쉼터다. 식구끼리 머리를 맞대고 끼니를 나누어 먹으며 치열한 바깥세상에서 살아남을 수 있도록 생명력을 쌓아가는 터전이다. 세대를 이어져 전해질 가문의 내력과 그와 동급인 대대로 내려온 집안의 음식은 자손들의 입맛에 길들러 져서 혈통의 영원성을 이루어가는 경건한 시공간이다. 인간이 신에게 부여받은 종족보존의 위대한 과업을 완성해가는 거룩한 성전이다. 이렇게 신성한 집의 의미가 부의 척도나 재산을 축적하는 기능으로 타락해버렸다.

들썩거리는 집값이 부추겨서 앞날이 뿌연 안개처럼 보이지 않는다. 돈이 주도권을 가지고 세상을 움직이는 현실이 이상과 달라서 많은 사람이 갈등한다. 공부를 열심히 했다고 인생이 달라지는 것도 아니고 평생 부지런히 일했으나 노년이 편한 것도 아니다. 불확실한 미래가 사람들을 불안하게 만들었다. 그렇다보니 인생 한방의 기회를 노리는 꼼수만 만연해졌다.

모든 세대가 저마다 삶은 다르지만 지향하는 것은 같다. 안정된 생활과 편안한 노후다. 노년에 이 평범한 바람조차 이루지 못하는 사람들 가슴에는 질풍노도로 다가왔던 외환위기와 집값 폭등이 상처가 되어 옹이처럼 박혔다. 미루나무처럼 쭉쭉 뻗어 올라가야 하는 젊은 세대들에게도 생의 시작과 과정이 풀리지 않는 넝쿨이 되어 단단히 엉켰다.

삶이 버거워도 쓰러지지 말고 마음을 단단히 붙들어야 한다. 일찍이 당나라 황벽선사가 '不是一番寒徹骨(부시일번한철골) 爭得梅花撲鼻香(쟁득매화박비향) 한차례 뼈를 뚫는 추위를 겪지 아니하고 어찌 코끝을 찌르는 매화향기를 얻어오리오'라고 말하지 않았던가. 혹독한 추위를 겪은 씨앗이 풍성한 꽃을 피우고 야무진 열매를 맺듯이 이 어려운 시기가 인생을 값지고 튼실하게 꽃 피워줄 춘화 현상일지 모른다. 땡고추같이 매서운 이 고비를 잘 버티어내서 삶의 끝자락에는 노을빛 닮은 환한 꽃을 피워볼 일이다. 매화보다 더 향기로운 인생꽃을 말이다.

삶의 물음표를 가슴에 품고 봄바람이 불어오는 노을 지는 천변을 천천히 걸었다. 하늘을 품었던 냇물 속으로 저녁노을빛이 번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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