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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꽃등 / 박금아

부흐고비 2021. 7. 7. 17:23

내가 사는 아파트 정문 건너에는 작은 사찰이 있다. 일주문과 불탑은 물론, 대문도 담도 없다. 조악하게 올린 기와 아래에 대웅전(大雄殿)이라고 쓴 나무 현판만 없다면 일반 가옥과 다름없는 밋밋한 콘크리트 건물이다.

얼마나 급했으면 부처님을 아파트 앞까지 내려오시게 했을까. 하긴 교회도 성당도 사람 사는 곳 가까이에 있는데 절만 깊은 산 속에 있으란 법 있을까. 애초에 사람 곁에 있던 절을 깊은 산중으로 내쫓은 것이 간사한 인간들 아니던가. 이렇게 마음을 고쳐먹었다가도 이웃을 배려하지 않은 행동거지에는 불쑥불쑥 눈살이 찌푸려지곤 했다.

떨어진 거리라고는 차 두 대가 겨우 지날 정도여서 절집의 일상은 아파트에 고스란히 담겼다. 새벽 네 시면 목탁 소리가 들려오고, 아침 열 시면 스님의 설법 소리가 마이크를 통해 쩌렁쩌렁 울려 퍼졌다. 여름이면 독경 소리가 녹음테이프를 타고 해넘이까지 흘러나왔다. 그만으로는 참을 만했다. 사찰 마당 빨랫줄에서 사흘이 멀다, 하고 옷가지가 펄럭이는 풍경은 꼴불견이었다. 가사와 장삼은 물론, 여염집 남정네도 아닌 스님의 아래 속옷이 대명천지에 너풀대는 모습이라니. 상상만으로도 민망하여 눈길을 돌렸던 적이 여러 번이었다. 절집 바로 앞길은 관악산으로 오르는 입구여서 등산객들조차 아연한 풍경에 쓴웃음을 보내곤 했으니 동네 말썽꾸러기가 따로 없었다. 그런데 그새 정분이라도 든 걸까. 슬슬 절집 안이 궁금해지면서 언제인가부터는 기웃대기까지 했다. 아파트 마당을 거닐다가도 가까이에서 눈을 치켜뜨기만 하면 법당과 서가, 선방(禪房) 내부가 햇살에 비친 스님의 속옷 솔기처럼 훤했다.

며칠 전이었다. 이른 저녁을 먹고 산책을 하러 나갔다. 부처님 오신 날을 앞두고 절집은 땅거미가 내리도록 발 디딜 틈 없어 보였다. 잿빛 생활 법복을 곱게 차려입은 중년 여인이 하얀색 등을 들고 밖으로 나왔다. 몇 번을 두리번거리더니 감나무 아래로 가서는 감꽃 가지에 걸었다. 연등에 달린 이름자가 바람에 나부꼈다. 여인은 리본을 쓰다듬으며 한참이나 서 있었다. 낯이 익었다. 기억을 더듬고 보니 그녀였다. 몇 해 전, 사고로 아들을 잃고서 우울증을 앓다가 이사를 한 5층 주민이었다. 엘리베이터에서 몇 번 마주쳤을 뿐인데 나를 알아본 모양이었다. 합장을 해 보이기에 나도 엉겁결에 머리를 조아렸다. 잠시 후에 고개를 드니 여인은 사라지고 없었다. 대웅전 맨 앞자리에서 백팔 배인지 천 배인지 모를 절을 하염없이 올리는 그녀를 겨우 찾았다. 그녀가 걸어 둔 연등을 올려다보며 나도 모르게 두 손을 모았다.

사찰과 아파트 사이 좁은 가로수 길을 따라 색색의 등이 내걸렸다. 머리가 하얀 초로의 여인이 파란색 등을 걸고 있었다. 산길 산책길에서 자주 만난 아주머니였다. 나를 보자 환하게 웃으며 며칠 전에 태어난 손주라며 핸드폰을 열어 보였다. 그 뒤에서는 또 한 여인이 빨간 등을 달아놓고 연신 머리를 조아렸다. 연등 아래에 매단 이름자가 선명했다. 마흔이 넘은 딸의 배 속에 있다는 태아의 이름이라며 조심조심 읽었다. “행 ‧ 복 ‧ 이”

흰색 등을 든 사람들은 말이 없었다. 세상의 모든 ‘그리움’이 한 송이 흰 꽃으로 피어난 것 같았다. 흰 등 아래를 지날 때면 나도 숙연해졌다. 그때 한 얼굴이 떠올랐다. 세상을 떠난 지 삼십 해가 훌쩍 넘은 이름이었다. 그 순간에 왜 그가 생각났을까. 그에게도 한 개의 등이 필요했던 걸까.

절집 안으로 들어갔다. 하양, 노랑, 분홍, 빨강, 파랑, 초록. 크기가 제각각인 등이 저만의 빛을 품고서 등불이 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흰색 등 하나를 골랐다. 연등 파는 여인이 붓 펜을 건네다 말고 가만히 볼웃음을 지었다. 내 손에 낀 묵주반지* 때문이었을까. 다시 붓 펜과 리본을 주며 물었다.

“누구 이름으로 시주하시겠습니까?”

기억 속 이름자를 썼다. 그런데 그 이름만으로는 허전했다. 새 리본을 받아 가톨릭 세례명까지 꾹꾹 눌러 썼다. 행렬을 따라가다 맨 끝자리에 연등을 걸고 보니 망자의 얼굴이 꽃으로 피어나는 듯했다.

연등 아래를 걸으며 꽃받침 아래에 쓰인 이름자들을 되뇌어본다. 송이송이 연꽃이 피는 자리마다 어둠이 사라진다. 저만치에 잠시 밀쳐둔 어둠이 아니다. 어둠살을 그러모아 만든 빛이다. 태어나지 않은 배 속 아기도, 세상을 떠나 저승을 사는 사람도 이승의 어두움을 밝힐 수 있다니……. 그보다 더 큰 위안이 있을까. 자신이 행한 행위와는 상관없이 이승에서 한 번 생명이었던 적 있는 것은 다 꽃이 되고 빛이 될 수 있단다. 만물이 꽃등(燈)이다.

오늘도 절집 빨랫줄에는 빨래가 나부낀다. 풋! 웃음이 난다. 그러고 보니 스님의 속옷이 펄럭이는 길가, 이곳이 부처가 제자들에게 법화경(法華經)을 설법했다는 영산(靈山) 아닌가. 어찌 이 자리뿐일까. 내가 서 있는 곳곳이 예수와 공자, 여러 성인과 현자들의 말씀을 듣는 성전(聖殿)이요, 강당이다. 한 발짝 산을 오르는 수고도 없이 진리를 들었음인가.

예서 제서 꽃등(燈) 벙그는 소리 들린다.

*천주교 신자들이 묵주 기도를 할 때 묵주 대신에 쓰는 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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