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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베풂 없는 베풂 / 은종삼

부흐고비 2021. 7. 8. 09:00

물은 맛이 없다. 가장 좋은 물이란 맛은 물론 색깔도 냄새도 없는 물이다. 그럼에도 지친 나그네가 길가 옹달샘 물을 한 모금 마시고는 “야! 물맛 좋다.”고 감탄사를 터뜨린다. 맛없는 맛을 본 것이다.

깊은 산 속 암자에서 수행 중인 한 노스님이 한겨울 녹차가 떨어졌는데 눈이 쌓여 구하러 나갈 수가 없었다. 할 수 없이 맑은 청수를 끓여 녹차 잔에 따라 마시면서 “녹차 맛이 은은하다.”고 했다는 일화를 읽은 적이 있다. 물맛을 녹차 맛으로 착각한 것이다.

물은 맛이 없지만, 모든 음식에 맛을 내준다. 만일 물에 맛이 있다면 음식이 제 맛을 낼 수 있을까? 결국 모든 음식은 물맛이다. 좀 지나친 발상일지 모르겠다.

베풂도 이와 같다. 진정한 베풂은 ‘베풂 없는 베풂’이다. 연말연시 이웃돕기 성금을 비롯하여 독거노인 도시락 배달, 자원봉사 활동, 적십자회비 납부 등 베풂이 있어 그래도 살 맛 나는 사회가 유지된다. 종교 집회는 물론이고 명사 초청 강연장마다 ‘베풀어라, 남을 배려하라.’고 힘주어 외친다. 신문지상에는 연일 베풂의 선행자들의 모습이 자랑스럽게 실려 있다.

참으로 바람직한 삶의 모습이다. 베풀고 배려하는 사회야 말로 꿈꾸는 선진사회다. 베풂이 많을수록 행복한 사회다. 그만큼 베풂과 행복한 사회는 비례한다. 국가차원의 복지사회와는 또 다르다. 아무리 복지혜택이 잘 갖추어진 나라라 할지라도 개개인의 베풂이 부족한 나라는 결코 행복한 나라라고 할 수 없다.

우리 전주는 천사마을(노송동)이 있어 자랑스럽다. 얼굴 없는 천사가 20여 년 가까이 매년 연말이면 성금을 기부한다. 총기부액이 5억여 원이 넘는다고 한다. 20여 년간 계속했다는 것도 대단하지만 ‘얼굴 없는 천사’라는데 더 큰 의미를 둔다. 드러나지 않게 하는 베풂이기 때문이다.

모름지기 베풂은 드러나지 않아야 진장한 의미의 베풂이라할 수 있다. 생색내기 위한 베풂은 이미 베풂이 아니다. 생색이라는 대가(代價)를 받았기 때문이다. 성서는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고 했고 불가(佛家)에서는 어떤 대상에도 집착 없이 베푸는 무주상보시(無住相布施)를 가르치고 있다. 곧 마음에 머무르지 않는 보시를 하라는 것이다. 모두가 생색 내지 않는 베풂을 강조하고 있다. 이는 결코 어려운 일이 아니다.

꼭 얼굴 없는 천사처럼 남모르게 하는 큰 베풂이 아니더라도 나도 모르게 하는 베풂은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 사실 우리 생활 자체가 베풀고 살게 되어 있다. 우리 주변에 흔히 ‘법 없이도 살 수 있는 사람’이라는 평을 듣는 좋은 사람들이 있다. 이들은 다 무주상보시를 잘 실천하며 살고 있는 분들이다. 물질적인 도움이나 가르침으로 또는 노력봉사 등으로 베푸는 일도 중요하지만 상대방에게 두려움이 없도록 해주는 것도 큰 베풂이라고 한다.

골목길이 깨끗하면 동네가 돋보인다. 큰 베풂이다. 길거리에서 담배 피우지 않는 것 침 뱉지 않는 것 아무데나 쓰레기 버리지 않는 것 주차를 반듯하게 하는 것도 결코 작은 베풂이 아니다. 국기 다는 날 국기 다는 것도 국민으로서 베풂이다. 이 모든 일상적인 일들이 베풂 없는 베풂이다. ‘베풂 없는 베풂’이 행복사회를 이루는 가장 큰 베풂이다.

■ 은종삼 프로필
• 저서 ; 칼럼·수필집 《청와대의 침묵》 《행복은 제정신》

• 수상 ; 전북교육대상, 행촌수필문학상. • 안골은빛수필문학회장, 행촌수필 편집국장 역임.

• 전북문협이사, 전북수필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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