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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익숙한 외로움 / 차성기

부흐고비 2021. 8. 3. 09:04


오늘도 어느덧 어스름이 내리면 가족이 기다리는 집으로 돌아가는 것이 모두의 일상이리라. 이는 자못 상쾌한 공기를 들이쉬듯 자연스러운 일이나 한편 가족이 없는 이에겐 공허한 외로움으로 다가서는 건 아닐까. 수년 전 지방으로 출장 갔을 때다. 집 떠날 일이 거의 없는 내겐 오랜만의 출장에서 거래처와 밀고 당기느라 온종일 지친 때. 무거운 몸을 이끌며 들어서는 호텔 방 검은 내 그림자의 앞선 모습이 불현듯 떠오른다.

기다려주는 가족 없이는 설사 집이라 해도 평안을 얻을 수 있을까? 아니 평안은 얻을 수 있다 해도 몰려드는 외로움은 또 다른 시험일지 모른다. 이때 집에 혼자 남아있는 아내도 필경 같은 느낌일 것이다. 지나간 개발시대 휴일 없이 일하는 남편을 하염없이 기다리며 며칠씩 독수공방했던 신혼 때 아내도 같은 마음이었을까? 지난달 아내가 여행 떠난 빈집에 들어서는 순간 처연했던 적막감은 아직도 뇌리에 남아 어른거린다.

우리도 여느 집과 마찬가지로 예외는 아니어서 아들딸 모두 분가해서 부부만 남았다. 남매를 키울 땐 사랑이 넘친 보금자리로 가족은 서로 기꺼이 방패막이가 되어주고 따듯한 부모 사랑 아래 아이들은 어느새 훌쩍 커 갔다. 이젠 자기 삶을 찾아 모두 떠난 지금 우리는 외로운 빈집 증후군으로 가족으로서 부부 역할도 이전과 다름을 강요하고 있다.

그런데 지난달 돌연 새로운 상황을 맞아 가족에 대해 한 번 더 생각하는 기회가 생겼다. 아들네가 집 근처로 이사 오면서 새집 인테리어 공사를 위해 한 달간 함께 살기 원해 손주와 함께 지내는 시간이 많아졌다. 맞벌이이니 자연 손주들은 우리 차지가 되고, 힘들지만 천진난만한 아이들의 눈망울을 보며 새로운 생의 기쁨도 느껴보게 되었다. 손주와 어울려 뛰어놀다 보니 외로움은 느껴볼 사이 없이 흘러갔다. “손주와 한달살기” 책은 이렇게 태어났다.

하루를 반추하며 돌아오는 귀갓길, 현관에 들어서면 방긋 웃으며 반길 아이들의 해맑은 모습이 먼저 다가온다. 얼핏 눈을 들어보니 적막한 집안에 환상이 겹치다가 돌연 현실로 돌아온다. 매일 아침 소란으로 여는 아이들의 성화로 바삐 돌아가던 순간들과 더더욱 고요해진 지금은 도무지 현실 같지 않은 것이다. 한 달간의 행복은 눈 깜짝할 순간이고 다시 우리 부부만 남아 아스라한 추억을 공유하며 공허한 미소로 서로를 쳐다본다.

그동안 전통적인 우리의 가족 형태는 사회 최소 기본 단위로서 부부와 자녀로 이어진 사랑의 공동체가 대부분이었다. 정부도 4인 가족을 표준으로 사회경제 정책을 펼쳐 왔다. ​그러나 변화하는 사회는 필연 가족의 진화를 불러오고 최근엔 점차 이러한 핵가족도 분열을 거듭하여 1인 가구가 30%를 넘어 대세를 이룬다. 이에 따라 고독사 등 외로움에 따른 폐해도 스멀스멀 다가와 남의 일이 아니다.

얼마 전 눈여겨보았던 일본 영화 “어느 가족”은 가족의 전통적 형태에 충분히 의문을 던졌다. 사랑이 없는, 그래서 외로움에 절망하는 가족이 보편화하는 일본 사회를 반영한 거였다. 우리나라도 여기서 자유롭진 않겠지만 거기서 비록 피는 한 방울 섞이지 않았어도 사랑으로 서로 아껴주어 외롭지 않은 가정이 존재할 수도 있다는 가정(?)이 다소 충격으로 다가왔었다. 즉, 사랑의 공동체가 행복해야 할 가정의 전제조건 가운데 가장 중요한 하나임을 암묵적으로 제시하였다.

나아가 보완책의 하나로 “따로 또 같이”를 바람직한 생활방식으로 제안할 수 있지 않을까? 가족으로서 최소한의 고리를 만들어 주어 각자 자신의 삶에 충실하면서 구성원의 역할도 즐거이 부담한다. 서로 개성을 존중하면서 가족공동체의 삶에 무게중심을 놓는 것이 외로움을 이기는 지혜로운 노년의 삶이 아닐까? 바로 우리 부부의 모습이다.

그러나 현재의 행복도 언젠가 자연의 섭리에 따라 사랑하던 사람이 떠나게 되면 어쩔 수 없이 남은 사람은 1인 가족임을 피할 수 없게 될 터이다. 이래저래 우리는 1인 가족이 정점인 사회를 향해 치달을 것 같다. 하지만 1인 가족은 가족이라는 속박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는 장점도 있겠으나 외로움의 극복이라는 태생의 숙제도 안고 있다.

최근 많은 가정에서 애완동물을 해결의 한 방법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그러나 이마저도 공동체 구성원으로서 보살핌의 부담으로 다가와 망설이는 경우도 적지 않아 노약하거나 여행 철엔 덩달아 유기견도 많아져 냉정한 현실을 보인다. 대안의 하나로 이웃 나라에선 애완견 로봇이 인기리에 판매되고 있다. 특히 노년에겐 보살핌의 부담은 없는 반면 말동무 역할에 만족하면서 받아들이는 이가 많다고 한다.

추세로 보면 향후 가족 구성원으로서 로봇 인간이 도입될 가능성도 자주 거론된다. ​벌써 가정용 대화 로봇이나 요리 로봇이 시판되고 있고 일부 감정 전달까지도 도입하는 단계에 다다르고 있다. 머지않아 감정을 공유할 수 있는 로봇이 출현하면 가족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낯설지 않게 될지도 모른다. 그렇다 해도 추억을 공유하는 가족같이 외로운 노년이 바라는 만큼 해소될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우리 오십 플러스 세대는 온갖 변화의 마파람을 안면 가득히 맞아왔지만, 미래에 맞게 될 가족의 변천은 두렵다. 더는 가족이 외로움을 지켜주지 않을지도 모른다. 대안이 있기나 할까? 다윈은 일찍이 종의 기원에서 “적자생존”을 설파했다. 즉, 변화에 적응하여 외로움에 익숙해진다면 대안이 될 수 있을지도. ​그렇다면 사랑은 다 쏟고 가자. 어차피 우리는 혼자 이 세상에 오지 않았는가?


스카이엔지니어링(주) 대표이사 

한국과학기술정보협동조합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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