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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호박꽃도 꽃이다 / 박병률

by 부흐고비 2021. 8. 12.

“호박꽃도 꽃이냐?”

그런 말을 들으면 “장미꽃만 꽃이냐.”라는 말이 내 입안에서 뱅뱅 돈다. 끝내 말할 수 없어 목구멍에 가시가 걸린 것처럼 통증을 느꼈다. 오래전 집 울타리에 덩굴장미를 심었는데 해가 갈수록 줄기가 손가락 3개를 합친 만큼 두꺼워지고 가시가 사방으로 무섭게 뻗쳤다. 해마다 장갑 낀 손으로 가지치기를 하다가 손과 팔뚝에 가시에 찔린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고민 끝에 장미를 뽑아버리고 그 자리에 호박을 심었다.

얼마 안 가서 울타리에 호박 줄기가 무성하게 번졌다. 내가 키우고 싶은 방향으로 순을 접으며 줄기를 끈으로 군데군데 묶어 주었다. 시간이 흘러 호박꽃이 피었다. 수꽃은 대만 길게 올라오고 암꽃은 달걀만 한 열매를 달고 꽃이 핀다. 호박꽃이 피면 벌들이 꿀을 따려고 모여든다.

꽃은 사람들의 시선을 끌기 마련인데, 어떤 사람은 ‘호박꽃도 꽃이냐’며 콧방귀를 뀌고 지나치지만 나는 호박꽃에 다가가 입맞춤을 하거나 꽃 속을 유심히 들여다본다. 꽃이 활짝 웃고 있을 때 운이 좋으면 꿀벌 2~3마리가 꽃 속에 머리를 처박고 꿀을 따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벌들이 꿀을 따느라고 정신이 팔렸을 때 호박꽃 ‘꽃말’이 떠올랐다. 꽃말은 포용, 해독, 사랑의 용기란다. 내 나름대로 꽃말을 해석했다.

벌들이 꿀을 따느라 이 꽃 저 꽃 옮겨 다니며 귀찮게 해도 웃음을 잃지 않는 것은 ‘포용’이요, 벌들이 한바탕 잔치를 치를 때 수정이 이뤄진다. 수정이 되면 꽃이 오므라들고 머지않아 꽃이 떨어진다. 호박꽃은 세상 뒤편으로 사라지면서 호박잎과 호박에 공을 넘겨준다. 이 또한 ‘포용’ 아닌가.

호박잎은 데쳐서 밥을 싸 먹고, 풋 호박은 따서 된장찌개 끓일 때 듬성듬성 썰어 넣고, 늙은 호박은 호박즙이나 호박떡을 만든다거나 호박죽을 쑤어 먹으면 달짝지근하다. 특히 늙은 호박 꼭지 부분을 도려내 씨를 긁어낸 뒤 꿀 1컵 정도 넣고 도려낸 부분을 다시 닫은 다음, 약 3시간 정도 다리면 물이 고이는데 산모가 출산 후 부기를 빼는 약으로 쓰인다는 것은 ‘해독’이요, 호박씨는 프라이팬에 볶아먹으면 고소하다. 호박잎 줄기는 삶은 다음 마늘 넣고 프라이팬에 살짝만 볶아준다. 호박은 많은 걸 세상에 내놓는데 ‘사랑의 용기’가 아닐까?

호박꽃을 생각하며 나태주 시인 「풀꽃」을 떠올렸다.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 너도 그렇다/

나는 호박꽃을 오래 보는 편이다. 호박꽃이 등불처럼 환해서 오래 보다 보면 마음이 한층 밝아지고, 꽃 속에 ‘수술’이 우뚝 솟아있는데 사람이 목젖을 드러내고 환하게 웃는 것처럼 보였다. 속을 바라보다가 나도 모르게 “와!”소리를 내며 입이 저절로 벌어졌다. 하지만 장미꽃을 처음 봤을 때는 꽃이 화려해서 내게 강렬하게 다가왔지만 얼마 못 가서 싫증을 느꼈다. 사람도 얼굴은 반지르르한데 겪어보지 않고 속을 알 수 없듯, 내가 장미 가시에 손이 찔려서 피를 본 탓인지 꽃이 예쁘다는 생각보다 무섭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호박 줄기는 솜털 같은 게 있지만 장미처럼 손을 다치게 하는 일이 거의 없고, 호박꽃은 봄부터 서리가 오기 전까지 피고 지기를 반복한다. 암꽃은 처음부터 작은 호박과 한 몸이 되어 세상에 얼굴을 내미는데, 어떤 사람은 호박꽃을 바라보며 ‘절구통 같은 몸집, 멋 부린다고 호박꽃이 장미 되나’ 한다거나, 또 다른 사람은 ‘호박에 줄을 긋는다고 수박이 되나’라고 비아냥거렸다. 말장난을 좋아하는 일부 사람이 속은 들여다보지 않고 겉만 보고 이러쿵저러쿵 말들이 많다. 심지어「흥부전」에 ‘호박에 말뚝 박기’가 나오는데, 심술궂고 못된 짓을 한다는 ‘놀부’ 이야기는 웬만한 사람은 다 안다.

“호박꽃과 호박이 세상에 떠돌아다니는 소리를 듣는다면 뭐라고 할까?”

잠시 엉뚱한 생각을 했다.

호박꽃은 투박하지만 순수해 보이고, 호박이 세상을 둥글둥글 살아가는 모습이 오래전 내 마음 한구석에 자리를 잡았으므로. 무엇보다 호박꽃 활짝 피면 나팔을 닮았다고 생각했다. 나팔수가 되어 세상을 향에서 한 말씀 던지지 않았을까? ‘호박꽃도 꽃이다’라고 외치는 것 같다.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어디선가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아서 방 창문을 열었다. 눈길 가는 데로 따라갔다. 늦가을, 해는 서쪽으로 기울고 창문 너머 울타리에 호박 세 덩이가 매달려 누렇게 익어간다. 호박을 오랫동안 바라보는데 호박꽃이 겹쳐 보일까?


박병률 프로필 : 전북 정읍 출생,

한국산문 등단, 한국산문작가협회회원, 성동문인협회 회원, 한국산문문학상 수상, 수필집 <행운목 꽃 필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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