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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왕년에 바위였다고? / 박병률

부흐고비 2021. 8. 12. 09:08

나는 바위다. 산꼭대기에 울타리처럼 쳐있고 숲이 나를 떠받치고 있다. 내 몸이 안개에 싸였다가 걷힐 때 어떤 등산객은 나를 ‘신처럼 여기며’ 두 손을 모아 기도를 하고, 사진사는 ‘와 멋지다’고 큰소리를 하면서 카메라를 연신 들이댔다. 나는, 내가 높은데 산다는 이유로 사람들이 우러러본다는 착각 속에서 내 안의 뿌리가 썩는 줄 몰랐다.

천둥·번개 치고 비바람이 불던 어느 여름, 사람 머리통만 한 몸 일부가 떨어져서 산 아래로 곤두박질쳤다. 데굴데굴 굴러서 큰 소나무에 기대고 있었다.

소나무에 말을 걸었다.

“여기가 어디야?”

“천불동, 너는 어디서 굴러온 돌멩이니?”

“내 뿌리는 설악산 울산바위야, 천연기념물 제171호로 높이가 950m나 된단다. 나를 몰라보다니….”

바위는 돌멩이라는 말에 화가 치밀었지만 부정할 수 없는 현실이다. 소나무가 말을 이었다.

“어이, 돌멩이 씨 내 몸에 난 상처를 보시오. 내가 붙잡지 않았으면 당신은 ‘죽음의 계곡’으로 빠졌소.”

돌멩이는 죽음의 계곡이라는 말에 정신이 바짝 들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소나무에 상처가 나 있고 풀이 자신을 감싸고 있었다. 햇살이 나뭇가지 사이로 얼굴을 내밀고 나비가 날아와서 날갯짓할 때, 갑자기 먹구름이 몰려오더니 장대비가 쏟아졌다.

계곡물이 순식간에 불어서 돌멩이는 죽음의 계곡으로 휩쓸렸다. 돌멩이는 물살이 흐르는 데로 이리 부딪히고 저리 부딪히면서 떠내려가다가 바위를 발견했다. 자기와 닮은 바위가 물속에 산다는 게 신기했다.

“바위야, 나 좀 살려줘! 흙탕물이라 숨을 못 쉬겠단 말이야.”

“어디, 쪼끄만 게 난리야!”

“나도 옛날에는 바위였다고.”

돌멩이가 바위라고 우기자 물속에 있는 바위가 콧방귀를 뀌었다.

“흥! 큰소리치는 놈치고 별 볼 일 없더라고.”

비가 그치고 사나흘 지나자 물속이 유리알처럼 반짝거렸다. 바위 주변에 크고 작은 돌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고, 돌 틈새로 가재가 기어 다니고 물고기가 떼를 지어 바위 밑에서 놀고 있었다. 돌멩이는 이런 풍경이 낯설었다. 바위로 살 때는 목이 뻣뻣해서 아래를 내려다볼 수 없었고 누가 옆에서 얼씬거리는 것도 싫었다. 벌· 나비를 반기지 않았고 나무도 바위에 뿌리를 내리지 못했다. 그런 탓인지 돌멩이는 기세가 당당했다.

“나는 너하고 노는 물이 달라, 위에 있는 공기가 얼마나 좋은지 모르지? 물속에 사는 바위가 뭘 알겠어!”

바위 일부가 떨어져서 돌멩이로 추락했지만, 물속에 있는 바위를 무시하고 주변과 어울리지 못한 채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장마가 또 몰려왔다, 비는 보름쯤 계속되었다, 산사태가 나고 저수지 둑이 무너질 때 돌멩이가 쓸려간 곳은 동해바닷가 백사장이었다. 돌멩이는 물속에서 밖으로 나온 것만으로도 숨통이 트였다.

잠시 후 파도가 밀려왔다. 파도가 철썩철썩 소리를 내며 돌멩이를 때렸다. 돌멩이는 파도에 끌려갔다가 밀려나기를 반복했다. 그러다가 돌이 모여 있는 곳으로 갔다. 돌들은 크기만 다를 뿐 한결같이 둥글둥글했다. 몸집이 가장 큰 둥글납작한 돌이 물었다.

“어디서 왔니?”

“내 뿌리는 설악산 울산바위야, 천둥이 치면 하늘이 울린다는 ‘천후산’을 알아?”

돌멩이는 목에 힘을 줘가며 자기소개를 했다.

“몸이 멍투성이구나! 우리도 처음에는 너처럼 몸이 멍들고 뾰족뾰족 날이 서서 보잘것없었지…. 오랜 세월 눈· 비· 바람· 파도에 쓰러지지 않고 맞서면서 동글동글 다져진 몸매란다. 너도 그럴 거야, 힘내!”

돌들이 나서서‘우리 사이좋게 지내자’며 돌멩이를 환영했다. 하지만 바위가 돌멩이로 살아야 한다는 생각은 쉽게 바뀌지 않았다. 돌멩이는 지난 일을 떠올렸다.

산 정상에 우뚝 솟은 바위였을 때, 사람들은 내가 멋있다고 칭찬이 자자 했지. 그래서 아래는 관심이 없었고 나는 더 높이 올라갈 꿈에 젖어있었어. 하늘 가까이 올라가는 꿈을 꾸며 내가 제일인 것처럼 으스대다가, 어느 날 몸 일부가 조각나는 바람에 높은 곳에서 떨어졌지. 몸이 멍들고 깨지면서 아래로 구르다가 소나무에 걸렸을 때, 나무 아래 돋아난 풀이 내 상처를 감싸주고 나비는 날아와서 내 마음을 달래줬어. ‘죽음의 계곡’ 흙탕물에 휩쓸렸을 때는 앞이 안 보였지, 참고 견디니까 물이 맑아지더군. 가재랑 물고기들이 떼 지어 노는 모습들이 눈에 아른거릴까?

돌멩이는 낮이면 산봉우리를 올려다보고 밤에는 별을 바라보며 외로움을 달랬다. “나는 왕년에 바위였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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