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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을 있는 그대로 사랑하는 법을 배우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린다. 자기 주위에 있는 사람들을 자기 비슷하게 만들려고 애쓰는 버릇이 깊이 뿌리박혀 있기 때문이다.

상대방을 자기 비슷하게 만들려고 하는 노력을 사람들은 흔히 사랑 혹은 애정이라고 착각한다. 그리고 대상에 대한 애착의 도(度)가 높으면 높을수록 그 착각의 도도 높아진다. 그 노력이 실패로 돌아가게 되면, ‘애정을 쏟았으나 상대방이 몰라주었다.’고 한탄하는 것이다.

우정이든 성정(性情)이든 진정한 애정은 상대방을 있는 그대로 사랑하는데서 비롯된다. 있는 그대로의 한 사람을 가능한 한 편안하게 해주려는 노력에서 출발하는 것이다. 이 사실은 사람과 사람의 관계를 떠나 사람과 사물의 관계를 생각하면 자명해진다. 우리가 조선의 백자 촛대 하나에 애착을 지닐 때 우리는 그 촛대가 가지고 있는 색감과 형태를 있는 그대로 사랑하는 것이고, 이중섭(李仲燮)이 그린 황소나 닭을 사랑할 때 일 잘 하는 소나 알 잘 낳는 닭을 염두에 두고 애착을 느끼는 것은 아닐 것이다. 물론 사람을 촛대와 같이 볼 수는 없을지 모르지만, 촛대 이하로 다룰 수는 없을 것이다.

있는 그대로 사랑하는 법을 배우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린다. 아마 성숙과 관련이 있을 것이고 실패의 축적과도 관련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만족감과 가장 큰 관련이 있다고 생각한다.

성인(成人)의 만족감은 두 개의 뿌리를 지닌다. 하나는 자기가 하는 일이고, 다른 하나는 인간관계에서 오는 행복감이다. 작곡에 정열을 가지고 있으면서 경제적이나 사회적인 이유로 다른 일을 하며 일생을 보내는 사람이 있다면 철저한 체념이 올 때까지 그에게 만족감은 없을 것이다. 그리고 주위에 동등한 인격으로 같이 살며 늙어가고 싶은 사람이 없을 때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동기야 어떻든 일단 있는 그대로 사람을 사랑하는 법을 배우면 그 사랑은 다른 사람, 다른 사물에로 확대된다. 어두운 건물들 뒤로 희끗희끗 눈을 쓴채 석양빛을 받고 있는 북악(北岳)의 아름다움이 새로 마음에 안겨 온다. 자신도 모르게 우리는 주위의 풍경을 어두운 마음의 풍경과 비슷하게 만들어 왔던 것이다. 까치가 그저 하나의 새가 아니라 귀족적인 옷을 입고 있는 새라는 것도 발견하게 되고, 늘 무심히 지나치던 여자가 화장이나 옷차림에 과장이 없는, 다시 말해 낭비가 없는 여자라는 사실도 새로 깨닫게 된다. 그리하여 사는 일이 바빠진다. 바빠짐이야말로 살맛 있는 삶의 또다른 이름인지도 모른다.


* 황동규 : 서울대 교수를 역임하고 ‘어떤 개인날’ 등 10여 권의 시집과 산문집 ‘겨울노래’ 등을 출판하였으며 현대문학상, 연암문학상 등을 수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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