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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찰차 한 대가 경광등을 번쩍이며 아파트 입구까지 따라왔다. 술 몇 잔 하고 음주면허라도 있는 것처럼 의기양양하게 운전을 했는데 생각지도 않은 불청객을 만나게 되었다. 참, 재수 없는 날이다.

“잠시 음주운전 단속이 있겠습니다. 협조해 주십시오.”

“후우우욱-”

“이런! 술을 많이 드셨네요. 면허정지 수치입니다.”

“뭐라고요?”

낭패도 이런 낭패가 없다. 면허증 제출을 요구하는 경찰관 얼굴을 애처로운 표정으로 올려보았다. 그런데 그 짧은 순간에 그의 눈빛에서 묘한 희망이 보이는 것 같았다.

“솔직히 저녁 먹으며 반주로 소주 몇 잔 했습니다. 죄송합니다.”

“그러게 대리운전을 하시지 그랬어요?”

의례적인 대화였는데 뭐랄까, 텔레파시가 통하는 느낌이었다. 분위기가 소주 값이라도 챙겨주면 봐줄 것 같은 느낌이 물밀 듯 밀려오고 있었는데 불행하게도 지갑에는 백만 원짜리 수표 한 장밖에 없었다.

“제가 새벽시장에서 도매업으로 먹고 사는 사람이거든요. 단속도 좋지만 면허가 정지되면 저희 가족은 길거리로 나 앉아야 합니다. 지갑에 백만 원짜리 수표 한 장밖에 없는데 내일 아침 물건을 받아야 장사를 할 수 있어요. 죄송하지만 삼십만 원만 거슬러 주실 수 없을까요?”

“허! 참, 이러면 안 되는데...”

“법에도 인정이 있는 거 아닙니까?”

“사정이 딱한 것 같아 봐 드리는 거니까 다음부터는 조심하세요.”

후덕하게 생긴 경찰관은 통 크게 수표를 받아 바지 주머니 속으로 집어넣었다. 그리고 다시 윗주머니에서 딱지처럼 접은 십만 원 짜리 수표 세 장을 꺼내 거스름돈으로 주더니 순식간에 시야에서 사라졌다. 칠십 만원이 아까웠지만 이 정도로 무마된 것이 어디인가. 멀어져가는 순찰차를 바라보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런데 이튿날 어제 거스름돈으로 받은 수표 세 장을 펼쳐 보다 깜짝 놀랐다. 세상에 어떻게 이런 일도 있다는 것인가. 주머니에는 백만 원짜리 수표 한 장과 십만 원짜리 수표 두 장이 들어 있었다. 십만 원짜리 수표 세 장을 거슬러 준다는 것이 컴컴한 밤중이라 그랬는지 실수로 백만 원짜리 수표를 섞어 준 것이다. 재수 좋은 사람은 뒤로 자빠져도 돈을 줍는다더니 이런 횡재가 또 있을까. 길 가다 새끼줄이 버려져 있어 주워왔는데 집에 와보니 소가 따라온 격이었다. 절로 콧노래가 나왔다. 도대체 얼마나 많은 사람에게 수표를 받아 챙겼으면 이런 일이 벌어질까, 하룻밤 사이에 이십만 원이나 재산을 증식해준 전날의 경찰관이 한없이 존경스러웠다.

이십여 년 전 그야말로 호랑이 담배 피던 시절 이야기다. 요즘 같아서는 그런 경찰관이 있을 수도 없고 있다고 하더라도 핸드폰이 발달해 신고 정신으로 무장한 사람들이 곳곳에서 아우성일 테니 TV 프로그램 중 하나인 <세상에 이런 일이>에서나 소개될 법한 일이다. 그러나 그때는 그랬다. 운전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에피소드 하나씩은 가지게 마련이긴 하지만 당시에는 이런 황당한 일이 자연스럽게 벌어지는 세상이었다.

살면서 세상에는 필요 없이 존재하는 것이 하나도 없다고 한다. 이런 종류의 부정행위도 나름의 가치가 있다는 말이다. 그것으로 인한 부정적인 교육효과 때문이라도 존재 가치가 있는 것이다. 공무원의 월급이 너무 많으면 원칙대로 벌과금을 남발해 사회 전체가 마비될 것이라 월급을 적게 주고 적당한 뇌물을 활성화해야 한다는 웃기는 주장도 있지 않은가? 그래서는 아니지만 그날의 사건을 이렇게 가슴에서 한 번씩 꺼내볼 때마다 분노보다는 너그러운 웃음이 사실은 앞선다.

그런데 요즘 뇌물에는 그런 웃음조차 없는 것 같다. 이런 저런 뇌물들이 모두 없어진 맑은 세상이 된다면 뭐, 더 이상 웃지 못해도 상관없는 일이지만 실상은 오히려 바늘 도둑은 없어지고 소도둑이 판을 치는 느낌이다. 신문지상에 오르내리는 너무나도 천문학적인 금액에 얽힌 사건들을 접하면서도 많은 사람이 무덤덤해 하는 현실이 슬프다.

이제 <김영란 법>이라는 청탁 금지법까지 생겼다고 하니 작은 부조리나 큰 부조리나 보다 나은 미래를 위해 모두 다 없어지길 바라지만 지금처럼 미운 여우가 없어진 후 호랑이가 나타나 더 큰 분탕질을 할 바에는 차라리 호랑이가 나타나기 전 여우가 많았던 시절이 나는 더 좋다. 꾀 많은 여우는 가끔 자기 꾀에 넘어가 내게 이렇게 계속해서 웃음이라도 줄 것이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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