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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판 스펙 위조 / 일성록

부흐고비 2021. 9. 15. 08:48
번 역 문


이런 방법으로는 군역을 영구히 벗어날 수 없으므로 온 종족이 재물을 모아 족보를 위조하는데, 성(姓)만 같으면 관향(貫鄕)이 어디인지는 구분하지도 않은 채 부조(父祖)를 바꾸고 파계(派系)를 거짓으로 칭하여 향리에서 으스대며 스스로 반족(班族)이라고 일컬어 윤리를 손상하고 풍속을 무너뜨립니다. 그러다가 역을 져야 할 때가 되면 많은 종족이 한꺼번에 일어나 도포를 입고 비단신을 신고서 족보를 안고 관청의 뜰에 들어가는데 족보는 진귀한 비단으로 싸고 장황(粧䌙)이 찬연합니다. 그것을 가져다 살펴보면 모두가 이름난 석학의 후예이거나 훈벌(勳閥)의 후손이므로 수령들은 진위를 구별할 수 없어 일률적으로 면제해 주기 때문에 조금 부유한 백성은 모두 한가로이 놀게 됩니다.

그러나 군액(軍額: 군사의 정원)에는 정해진 숫자가 있어서 채우지 않을 수 없으므로 수시로 이리저리 옮겨 다니며 품팔이를 하거나 유리걸식하는 무리로 채우게 됩니다. 이들은 오늘 파기(疤記: 인상착의를 기록한 문서)를 받았다 싶으면 내일 달아나는데 10년 안에는 명단을 바꿀 수 없게 되어 있으므로 군포를 거둘 때가 되면 매번 이웃이나 친족에게 책임을 지울 수밖에 없습니다. 다섯 가구가 사는 곳이면 도망한 장정이 한두 명은 있게 마련이고 10촌 이내의 친족 가운데 마을을 떠난 가구가 서넛이나 되기도 하여 한 사람이 몇 사람 몫을 부담하게 되므로 얼마 못 가서 온 집안이 파산하고 이웃과 친족 역시 유리(流離)해 흩어지게 됩니다. 그러면 또 이웃과 친족에게 책임을 지워 대신 징수하니 1, 2년이 지나고 나면 열 가구 중 아홉 가구가 비게 됩니다. 진실로 폐단의 근원을 따져보면 모두 위조한 족보가 성행하고 허위로 기록하는 일이 갈수록 많아지는 데서 비롯되고 있습니다.

 


 원문

此猶不足以永久免役, 則闔族鳩財, 圖出僞譜, 只取姓字之同, 不分某鄕之貫, 換易父祖, 誣稱泒系, 誇耀鄕里, 自稱班族, 傷倫敗俗. 及其一遭侵役, 衆族竝起, 着袍穿鞋, 抱譜入庭, 錦帕珍裹, 粧䌙燦然. 而取而考之, 則莫非名碩之裔, 冑勳閥之雲, 仍爲守令者, 莫卞眞僞, 一例許頉. 於是乎稍饒之民, 率皆閑遊. 而軍額有數, 不可不塡, 則所充定者, 皆是朝東暮西傭雇流丐之類. 此輩今日捧疤, 明日逃去, 而十年之內, 例不得代定. 故每當徵納之際, 不得不侵責於隣族, 而五家之隣, 逃丁必有一二, 十寸之族, 流戶或至三四, 則以一人而應數人之役, 不數年而破一家之產, 爲隣爲族者, 終亦必至於流散, 而隣又徵隣, 族又徵族, 一年二年, 十室九空. 苟究弊源, 專由於僞譜之盛行而冒錄之滋多也.


- 『일성록(日省錄)』 정조 23년 3월 30일, 함열 현감(咸悅縣監)의 장계

 

日省錄은 1752년(영조 28년)부터 1910년(융희 4년)까지의 국왕의 동정과 국정을 기록한 일기체 연대기. 흔히 '왕의 일기'라고 한다.

 

해 설


스펙은 조선에서도 꽤 중요하게 작용하였다. 신분이나 직업 등 일정한 스펙을 갖추면 대체로 조세 부담이나 요역(徭役)‧군역 같은 부역을 면제받는 특혜가 있고 덤으로 일상에서 거들먹거리며 행세할 수 있었다. 조상의 덕으로 가문 자체가 스펙이 되는 금수저가 있는가 하면, 특별한 공을 세우거나 특정 직종에 종사함으로써 얻게 되는 후천적 스펙도 있었다. 향교나 서원 등 교육기관의 하속(下屬), 양반가의 산지기‧묘지기 같은 천민의 직종도 어떤 면에서는 특혜를 누리는 스펙이 될 수 있었다. 그래서 멀쩡한 양인(良人)이나 몰락한 양반이 스스로 권세가의 종이 되기도 하였다.

이들이 특혜를 누리는 대가는 당연히 누군가에게 무거운 부담으로 돌아가게 되고, 과중한 부담을 견디다 못한 백성들이 마을을 떠나는 일이 전국 곳곳에서 속출하였다. 그러면 다시 남아 있는 사람이 떠난 사람의 몫까지 두 배, 세 배의 조세와 군역을 부담하는 악순환이 이어졌다. 인용한 함열 현감의 장계에서 말하고 있듯 수령은 실제 거주하는 인구가 얼마이든 호적에 편입된 수를 기준으로 군사를 징발해야 했다. 더구나 백성을 보살피고 길러야 하는 목민(牧民)의 책임보다는 보신과 이익에 혈안이 된 부패한 관리에게 백성은 그저 착취의 대상일 뿐이었다. 떠난 사람의 조세와 군역을 이웃이나 친족에게 부가하는 인징(隣徵)‧족징(族徵)이 만연하고, 다섯 살도 되지 않은 아약(兒弱)을 군사로 징발하고, 죽은 사람에게 군포(軍布)를 징수하는 백골징포(白骨徵布)도 아무렇지 않게 자행하였다.

어시재(於是齋) 최성환(崔星煥 1813~1891)은 중인 출신의 무관이면서도 높은 학식이 임금에게까지 알려져 헌종으로부터 ‘시무(時務)와 경세제민의 방략’에 대한 질문을 받고, 《고문비략(顧問備略)》이라는 책을 남겼다. 그 책에 다음과 같은 일화가 나온다.

근래 관동(關東)의 어느 고을에서 한 백성이 아이를 낳았는데 관에서 군정(軍丁)으로 채워 넣으라고 명하였다. 백성이 갓난아이를 안고 관아에 와서 “이 아이는 태어난 지 사흘도 지나지 않았습니다.”라고 호소하였다. 그러자 관에서 “딸인가?”라고 물었고, 백성이 “아들입니다.”라고 하자 “아들이면 그만이지 날짜를 따져서 뭣하겠는가?”라고 하였다. 백성이 “그렇다면 아들인 게 잘못이군요. 아들이 아니면 됩니까?”라고 하고는 갓난아이의 음낭(陰囊)을 떼어서 관에 바쳤다.

과중한 군역에 대한 원한이 천륜까지 외면하게 하였음을 보여주는 극단적인 사례이다.

한편 조선 후기가 되면 화폐 유통이 늘어나고 상업이 발달하면서 부(富)를 축적하는 서민이 생겨나기 시작하였다. 이들은 다른 방법을 찾기 시작하는데, 바로 족보를 위조하여 신분을 세탁하거나 스펙을 위조하는 것이다.

흉년이 들었을 때 개인이 곡식을 내어 굶주린 사람을 도와주거나 국가의 중요한 사업에서 수고한 사람 등에게는 자급(資級)을 부여하고 이름뿐인 명예직이긴 하지만 관직을 주기도 하였다. 그렇게 자급과 관직을 준다는 증명서가 첩가(帖加)이다. 또 과거에 합격하면 합격증서인 홍패(紅牌)를 주었다. 이 문서들에는 임금의 도장인 어보(御寶)를 찍는다. 어보를 위조하여 이 증명서를 만들어 밀거래하는 일은 공문서위조에 해당하는 명백한 범죄이다. 이런 일은 예전부터 있었지만 후기로 올수록 더욱 심해진다. 두어 명이 작당하여 수백 장을 위조해 판 사례가 있고, 진짜 첩가와 홍패를 구하는 사람, 글씨를 쓰는 사람, 도장을 새기는 사람, 판매를 맡은 사람이 팀을 이루는 범죄조직도 생겨났다. 그만한 수요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반드시 조세나 군역 회피를 위해서만 이런 짓을 저질렀다고 할 수는 없지만 중요한 원인의 하나임은 틀림없어 보인다. 위의 장계에서는 위조 족보 때문에 군병의 정원을 채울 수 없다고 하였으나 원인과 결과가 뒤집힌 듯하다. 애초에 위조 스펙, 위조 신분을 만들 필요가 없는 사회였다면 굳이 그럴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위조해서라도 스펙을 갖추어야 하는 사회, 조선은 이후 어디로 갔는가?

글쓴이 : 김성재(한국고전번역원 번역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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