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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자연(自然)에 흥미를 잃은 지가 오래다. 그것은 내 생활이 강파르고 윤기(潤氣)가 없어진 탓이라고도 할 수 있다. 감격을 잃고 살아온 데 기인한 것이라 함이 더 정확할는지도 모른다. 절경(絶景)을 앞에 두고 바보가 되는 것은 참 슬픈 일이다. 이렇게 자연 앞에서 허수아비인 내가 그래도 한 가닥 슬픔이나마 느낄 줄 아는 것만은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이 슬픔을 느낄 줄 아는 다행 때문에 내가 인간을 저버릴 수 없게 되는지도 모른다. 인간에의 흥미마저 잃어버린다면 나는 바보가 되는 슬픔마저 잃어버리고 말게 되는 셈이다. 허수아비가 되는 슬픔조차 나에게서 없어지는 것이다.

무료(無聊)해지면 산수(山水)를 찾는 대신 나는 저자를 찾곤 한다. 사람들이 저자는 속(俗)되다고 하지만 나는 그 저자가 그리워지는 때가 있다. 이러한 나를 속되다고 할지라도 나는 누구도 탓하지 않는다. 외로운 속된 시민(市民)이 되어 나를 알 바 없는 너절한 넝마의 저자를 이리 돌고 저리 꺾을라치면 그 싸구려 소리며 오가는 삿대질, 그 인색함, 때로는 배반(背反)의 거리에서 나는 가끔 한량없는 흥미와 흥분마저 느끼곤 한다. 그리고 배반과 항거를 의식케 하는 짜릿함을 느끼기까지 한다. 이러한 저자의 흥미는 곧 인간에의 흥미인지도 모른다. 비속(卑俗)한 인간에의 흥미는 어쩌지 못하는 나의 인간에 대한 신뢰(信賴)에서 연유(緣由)한 것인지도 모른다. 자연을 잃은 내가 이제 인간에의 신뢰마저 잃어버린다고 한다면 영원한 나의 고향은 없다. 오늘 내가 가냘픈대로 인간에의 신뢰를 잊고 있지 않음으로 해서 향수를 느끼게 하는 다행(多幸)이 있는 것이다. 슬퍼지면 저자거리를 거닐기로 한다. 인간에의 신뢰를 저버릴 수 없는 한 나는 비속마저 거부할 능력이 없다. 저자에는 그래도 배반의 거리에서 죄의식이 그 죄 값으로 하여 끝내 비속을 버릴 수 없음은 인간에의 신뢰를 버릴 수 없기 때문이다.

회한의 눈물을 목 가득히 삼키고 있노라면 뜨거움이 뭉쿨하여 짐을 우리는 가끔 느끼게 된다. 언어이전(言語以前)의 포효(咆哮) 같은 절실함이 하나의 소리로서 발(發)할 때 그것을 일러 절규(絶叫)라고도 한다. 인간에의 신뢰로써 이 절규를 말할 때, 그것은 애정으로써 서로를 찾는 소박한 인간의 생태(生態)다. 서로 미워하는 인간들이 또한 사랑하지 아니치 못함은 얼마나 큰 배반이겠는가. 그래서 사람들은 이 배반(모순)을 디디고 그제야 스스로의 위치를 다짐하여 보기도 한다. 자아(自我)의 실존(實存)을 의식하는 것이다.

자연을 잊은 내가 인간을 되찾음은 슬픈 도정(途程)임에는 틀림없다. 허로(虛勞)에서가 아니라 인간에의 종교 앞에 때로 성가(聖歌)처럼 자연을 그리워하게 됨은 그 배반을 미워해야 할 때, 인간에의 슬픔이 나로 하여금 역(逆)으로 자연을 그리워 아니치 못하게 하는지 모르겠다. 이 그리움이 있어 오늘도 나는 저자를 찾게 된다. 저자를 한 바퀴 휘돌고는 또한 여기를 벗어나야 할 의무(義務)에 사로잡힌다. 그것은 꼭 다리가 있는 지점 같은 데서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이 다리를 관념상(觀念上)의 다리라 일컬어도 무방하다. 그러나 꼭 관념이라고만 우길 수도 없다.

이쪽도 아니며 저쪽도 아닌 나는 온기(溫氣)에서 오는 중량(重量) 같은 애정으로써 누구를 소리 질러 부르지 않을 수 없다. 이쪽이 어디인지 저쪽이 누구의 것인지 나도 분명치 않다.

그러기에 이 다리 위에서 허공을 향해 어처구니없이 손을 휘저어보는 슬픔도 지니게 되는 것이다. 자연과 문명에의 교량(橋梁)이라기에는 너무나도 엄청나다. 서정과 지성이라 이르기도 어색하다. 그러기에 내가 처한 대로 한참을 다리 위에서 머뭇거리지 않을 수 없게 된다. 다리를 거니는 것은 나에게 노역(勞役)이다. 그러나 나는 정지(停止)를 모른다. 움직여야 한다. 이것만이 나에게 주어진 명령(命令)이다. 움직이지 않는 돌을 생각하라. 그것은 흙에 동화(同化)되고 마는 것이다. 자연에 배반당한 내가 다시 자연에 동화될 수는 없다. 어쩌지 못함이 인간에의 신뢰로써 존재를 되찾은 내가 새삼 다리 위에서 흐르는 물소리를 들으며 망설이고만 있을 수는 없다. 수많은 오늘의 인간들이 이 다리 위에서 우글거리며 안간힘을 쓰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목메어 부르는 소리가 들린다. 내가 누구를 부르고 누가 나를 부르고 있는 것만은 확실한데 나는 그 소리의 향(向)을 알 수 없다. 그러기에 내가 아직은 살고 있고 또한 시(詩)를 버리지 못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소리 속에 움직임이 있다. 이 움직임에 오늘의 시가 있다. 다리는 어쩌면 광장(廣場)의 섭리를 닮아 가는가 보다. 서로가 불러 이룩한 다수(多數)는 물<江>을 건너야 하는 다리에서가 아니라 흐르지 않는 강 위에 다리를 메우기 시작했다. 그것은 강(强)한 철근(鐵筋)으로서 말이다. 육교(陸橋)다. 도시 한 복판에 매어진 이 육교는 운전하는 교량의 습성을 짊어지게 되었다. 나는 분명 그것이 하나의 관념에서가 아니라, 눈앞에 실존하는 교량을 찾는데 그 많은 아우성을 갈라놓고, 차가운 옛 빙하(氷河)의 흐름에서처럼 오들오들 떨며 열병(熱病)에서 살았다. 그것은 마치 전통(傳統)과 비약(飛躍)과의 갈등이기도 한 것이다.

전통의 기점(起點)이 어제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오늘에 있다. 전통이 산 것이라고 하는 까닭도 이 때문이다. 전통의 기점이 오늘에 있음으로 해서 전통이 하나의 창작성(創作性)을 가지게 됨을 볼 때 ‘빙하에서의 열병’은 열병으로서가 아니라 정확한 체온기(體溫器)의 설정을 위한 지성(知性)에의 호소라 아니 할 수 없다. 바꾸어 표현해서 <안으로 스며드는 미학(美學)과 밖으로 내솟는 역학(力學)>이라고 하자.

다리의 위치를 운산(運算)한 나는 마침내 인간의 내부 온도를 척도(尺度)한다. 내가 산수(山水)를 버리고 저자를 찾는 해답은 이것으로 족하리라 믿는다. 그러나 이 미학과 역학에는 아직도 미계산(未計算) 속에 있는 것이 있다. 둘이 하나가 되는 <더하기 셈>에서의 답이 하나가 아님을 알 수 있으되 그것이 무엇인지를 나는 모른다. 영원한 스핑크스의 수수께끼이다. 그러나 다만 이 여럿인데도 허(虛)한 위치에서 자연과 인간의 배반을 메우기 위하여 그 배신행위에 가담하는 한이 있더라도 한 가닥 애정으로 이루어진 신뢰를 두고는 달리 산다는 것을 생각할 수 없다. 보다 더 투철한 시력과 뜨거운 언어에의 실존적 선택이 육교의 방향을 제시할 것이라고 믿고 있다. 남은 것은 이에 대한 작업뿐이다. 로고스(logos)에로 용해된 파토스(pathos)의 영원을 믿는 오늘의 시의 종교를 믿듯이--

이러한 작업이 곧 안으로 스며드는 미학과 밖으로 내솟는 역학과의 통일이라 우겨본다. 함초롬히 우리의 내부에 스며드는 온감(溫感)이 실은 동양(東洋)의 뜰인지도 모른다. 자연에 배신당한 내가 이 뜰에서 서성거리고 있음을 발견할 때 나는 어떤 자기 갈등에서 오는 반항마저 느끼곤 한다. 여기를 벗어나려고 얼굴을 붉힌 적이 한 두 번이 아니다. 얼굴뿐만 아니라 속이 달아오르기까지 한다. 먼 조국의 살갗을 벗어버리지 못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육교에서의 작업광경이라고 하자.

다리 위에는 흐르는 물소리가 없다. 그런대도 나만 소리를 간직하게 됨은 내 안으로 스며드는 물소리가 소리로서 남아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먼 옛날로부터 나누어가진 이 동양의 온기를 나는 서정(抒情)이라 믿는다. 일렁이며 안으로 스며드는 미학의 온기를 밖으로 내 솟기만 하는 힘의 자석(磁石)으로 나는 안정(安定)을 갈구한다. 그것은 기도(祈禱)의 자세라고 하여도 무방할 것이며 반합(反合)의 태세라 하여도 좋다. 인간에의 신뢰 없이 이루어질 수 없는 기막힌 현대의 시련(試鍊)임을 새삼 다져본다. 한 없이 힘은 밖으로 내 솟기를 원(願)한다. 힘은 힘으로만 행세하고자 한다. 과학에서 말하는 분석(分析)과 종합(綜合)의 힘조차 하나의 폭력으로 군림하게 됨을 우리는 기끔 본다. 전쟁(戰爭)이 그러한 경우의 예시(例示)가 되리라. 나는 이 육교에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것도 이러한 불안의 합병증(合倂症)에서인지도 모른다.

여기 밖으로 내 솟는 힘에서 안으로 스며드는 가라앉은 윤리(미학)로써 이에 살갗에의 입김을 불러일으키기 전, 오늘 우리의 살갗은 없는 것이라 믿는다. 그것은 현대의 과제이며 현대시의 효용(效用)의 과업이라 할 것이다. 과학 함을 지성(知性)이라고 한다. 지성은 오늘의 생리(生理)요 현대의 집약(集約)이다. 나는 이 집약에서 아직도 내가 시를 써야할 이유(理由)에 회의(懷疑)하고 있다. 선 자리(육교)의 선택만으로는 시가 될 수 없기 때문이다. 무엇을 말할 것이며 노래해야 할 것인가의 숙제가 숙제로 남아 있는 한(限).

문명의 징검다리에는 뒤란 없다. 앞이 있을 따름이다. <앞>에 무엇을 구호(口號)할 것인가의 숙제가 나에게 또한 나의 시에 대한 숙제로 남겨둔 채 그 주변의 나의 편력(遍歷)만을 말해둘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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