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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갈채 / 오세윤

부흐고비 2021. 9. 24. 09:10

지난해 가을, 지방에서 있었던 제법 큰 규모의 수필문학상에 도전했다 낙선을 했다. 이만한 글이면 되겠지, 하고 자만한 자존심이 여지없이 구겨졌다. 첫 수필집을 낸데 이어 등단도 하고, 몇 군데 수필지에 발표한 글이 호평을 받는 등 자부심이 하늘을 찌르던 터라 여간 실망스럽지 않았다.

그 다음달, 같은 작품으로 출신고교 총동창회에서 제정한 문학상에 응모해 요행 대상을 받았다. 그나마 위로가 됐다. 시상식과 송년파티를 겸한 정기총회 자리에는 많은 동기들이 참석해 함께 수상을 기뻐했다. 화려한 꽃다발을 세 개나 받았다. 박수도 받았다. 부상으로 노트북도 하나 받았다. 기쁜 한편 쑥스러워 행사 내내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상이라고 타본 게 과연 얼마만인가. 단상에 올라가 상을 타기는 이번이 처음인 것 같다. 어렸을 때부터 내겐 상복이라곤 없었다. 초등학교 때 받은 개근상 네 번이 받은 상의 전부였다. 공부를 잘한 편인데도 우등상을 타지 못한 건 무슨 연유일까. 지금 생각해도 이해가 어렵다. 물론 나름대로 변명거리는 있다. 남들이 이 사실을 알면 무어라할까. ‘저런 친구가 고등학교는 어떻게 우수한 성적으로 들어갔지? 의대는 어떻게 들어갔지? 낙제도 안하고 어떻게 제때 졸업했을까.’ 의아하여 쳐다볼 사람이 한둘이 아닐 듯하다.

돌이켜보니 감추고 싶은 부끄러운 상이 하나 있기는 하다. 전공의 3년차인 때, 국가의 보건시책에 따라 6개월간 무의촌진료에 파견돼 근무한 적이 있었다. 대천 인근의 주포면 보건지소, 진료실 겸 치료실과 방 둘에 주방이 딸린 20평정도 되는 최소한의 규모였다. 외래환자만 볼 수 있었다. 밤잠도 설치며 과중한 업무에 시달리던 병원생활에서, 도시의 일상에서 벗어날 수 있어 오히려 우리들에게 파견근무는 숨통 트이는 훌륭한 재충전의 기회가 되었고 월급의 세 배가 되는 수당으로 생활에도 얼마간 도움이 됐다. 겨울 한달은 방학을 맞은 식구들이 내려와 함께 지내다 갔다. 식구들이 올라간 다음부터는 혼자서 밥을 차려 먹는 일이 잘 되질 않았다. 귀찮기도 했거니와 새삼스럽게 궁상맞다는 생각이 생겨나 주방 드나들기가 불현듯 꺼려졌다. 이웃집에 부탁해 식사를 해결했다. 파견근무가 거의 끝나갈 무렵인 3월 중순쯤, 윗동네 외딴집에 불이 났다. 어린 아들 둘을 데리고 사는 과수댁이었다. 마침 보건지소에는 식구들이 올라가면서 남겨둔 쌀이 세 말쯤 독에 그대로 담겨있었다. 다음날 바로 자전거에 싣고 그 집을 다녀왔다. 근무기간이 끝나 서울로 올라가게 되면 저걸 어떻게 하나 하고 은근히 부담스러워하던 차라 제창 잘됐다 싶어 마음도 홀가분했다. 그리곤 바로 잊어버렸다. 병원에 복귀하고 보름쯤 지났을 쯤, 보사부로부터 공문 한통을 받았다. 표창패를 수령해가라는 뜻밖의 통보였다. 선행과 헌신적 의료봉사에 대한 표창, 부끄럽고 황당했다. 주말을 이용한 것이기는 했지만 겨울의 해수욕장과 인근의 도서지방을 두루 돌아보게 된 귀한 기간의 고마움이 오히려 컸는데 표창을 받다니, 그것도 남아있던 쌀 세 말에. 얼굴 뜨겁게 받아가지고 왔다. 거기에서 끝났으면 그나마 좋으련만 그 뒤로 연이어 정말 낯 뜨거운 짓거리를 했다.

전공의 과정을 마치고 처음 개업을 하게 되자 무언가로 나를 그럴듯하게 포장하고 싶어졌다. 별생각 없이 그때의 표창패를 내다가 대기실에 걸었다. 몇 달이 지나 단골이 늘어나면서 어느 정도의 속엣 말도 나누게 되는 친분들이 생겨날 쯤, 하루는 한 단골환자가 넌지시 내유(來由) 물어왔다.

“무의촌 보건지소에도 계셨군요. 선행을 많이 하셨나보죠?”

부끄러워진 나는 딴청을 하는 걸로 우물쭈물 그 궁지를 비켜났다. 그날 밤 내내 나는 나 자신이 너무도 싫었다. 다음날로 바로 상패를 치웠다. 처치곤란이던 쌀 세 말로 엉뚱하게 받은 선행 상, ‘나는 선행을 베푸는 의사’라고 광고한 그 몰염치함, 상패를 치우고도 참 오랫동안 부끄러웠다.

나타난 결과만으로 상을 받는다는 건 재능만으로 찬사를 받는 것처럼 그렇게 유쾌하지 못하다. 상도 각고의 노력과 공력이 바탕이 되어 받게 되었을 때에야 참되게 빛이 나는 게 아닐까. 여인의 미모도 영혼이 담겨야 진정 아름답듯, 재능도 열정으로 담금질되었을 때에야 비로소 상도 받을만하지 않겠는가. 물려받은 그대로의 미와 재능은 그렇게 뽐낼 일만은 못될성싶다.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고는 한다.

글쓰기도 어쩌면 마찬가지일 듯 하다. 독서와 사색과 체험과 시행착오를 거치는 끊임없는 탐색, 좌절을 이겨내는 인내와 노력이 있어야만 상을 받아도 부끄럽지 않으리라 생각을 한다. 공로에 대한 상과 갈채는 받아 마땅하기는 하다. 하지만 글을 쓴다는 게 과연 갈채를 받고자 함이었던가. 칭찬에 귀가 솔깃해지면서 글을 쓰는 것에도 점점 더 인정받기를 은근슬쩍 바라는 속물스러워진 자신을 본다.

배고픔과 목마름을 달래는 일이 육신적 욕구라면 상과 갈채를 탐하는 일은 정신적 허기라고나 할까. 어쨌거나 둘 모두 삶에 위안과 기쁨이 되기는 한가지일 수 있겠다. 인정과 갈채를 바라는 일도 모두 자연스러운 인간의 욕망임을 부정할 수는 없다. 다만 그 욕망을 절제하여 그것의 노예가 되지 않고 자유로울 수 있을 때 그것들이 모두 기쁨일 수 있음을 늦게나마 깨닫는다. 인기를 의식하게 되면 글쓰기의 초심은 이미 잃어진 상태가 된다. 갈채와 상과 인기, 인정을 받고자 연연한 이 며칠 나는 전혀 자유스럽지 못했다.

혹 글이 공감되어 박수를 받는다면 나는 여운이 긴 박수를 받았으면 싶다. 마지막 악장이 끝나고 이어지는 2,3분쯤의 절대묵적(黙寂), 그런 혼신을 다한 연주를 하고나서 받는 감동 깊은 박수라면 그 아니 뜻있으랴. 대중이 아니어도, 지음(知音)하는 이의 갈채라면 단 한 사람의 것이라 해도 상으로 족하다.


오세윤 수필가 :

△서울의대 졸업 △소아과 전문의

△《한국산문》편집고문 △수필문우회 회원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창작지원금 수혜

△저서 『은빛갈겨니』, 『숨베, 그 서툴게 끼인 자리』 외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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