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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아버지의 손 / 박정선

부흐고비 2021. 10. 15. 08:39

2021 호미문학대전 은상

아버지가 살아 계실 때는 죽음과 아버지를 연관시켜 생각한 적이 없었다. 나에게도 꿈이 있었고 성공하고 싶었다. 그리고 아버지는 내가 성공할 때까지 기다려주실 줄 알았다. 정말 언제까지라도 기다려주실 줄 알았는데 어느 날 훌쩍 떠나버린 것이었다. 그럴 줄 알았더라면 성공을 미뤄두고 아버지가 좋아하시는 약주를 사 들고 자주 찾아뵈었을 것이다. 바람 부는 날엔 바람에 찢긴 대로 비가 오는 날엔 비에 젖은 채로 성공하지 못한 초라한 모습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불쑥불쑥 아버지 앞에 보여드렸을 것이다.

이젠 아버지가 그리우면 아버지의 손을 닮은 손을 보러 호미곶으로 달려간다. 동해안 포항 호미곶에 가면 떠오르는 해를 받치듯이, 또는 공을 쥐듯이 손가락이 안으로 구부러진 손이 있다. 손은 오른손과 왼손이 바다와 육지를 경계로 서로 떨어져 있고, 바다에 있는 오른손과 육지에 있는 왼손이 서로 손잡고 함께 살아가기를 염원한다. 마음이 하나 되어 서로 평화롭게 상생하기를 희망하는 의미에서 조형된 손을 상생의 손이라고 부른다.

아버지는 생전에 호미곶을 즐겨 찾았고 상생의 손을 무척 좋아했다. 사실 아버지는 호미곶의 손을 알기 전부터 손에 대해 말하기를 좋아했다. 평생 손에 대한 생각에서 떠나지 못했다. 두 팔과 두 다리를 가진 사람의 몸이 좌우 대칭을 이룬 것은 서로 협력하라는 하늘의 섭리라면서, 손도 마찬가지라고 했다. 아버지는 왼손과 오른손을 번갈아 가며 사용하려고 애썼다. 숟가락 젓가락질은 오른손으로 하고, 칫솔질은 왼손으로 했다. 글은 반드시 오른손으로 썼지만, 짐을 들 때는 양쪽으로 나누어 들거나 번갈아 가면서 들었다. 오른손에 비해 힘이 약한 왼손에 대한 배려였다. 오른손이 힘이 센 것은 오른손을 주로 사용하기 때문이라면서, 왼손이 힘이 약한 것은 그만큼 덜 사용한 탓이라면서, 늘 왼손에 대한 배려를 강조했다. 아버지는 오른손을 강자로 왼손을 약자로 본 것이었다. 그래서 오른손의 힘을 왼손에게 나누어 주어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나는 아버지의 생각에 깊이 공감했다. 그리고 언제부턴가 아버지를 따라 하기 시작했다. 다른 건 몰라도 왼손에 대한 배려는 확실하다. 마트에서 장을 보거나 책 몇 권을 사 들고 길을 걷다가도 오른손에서 왼손으로 옮기는 것이 어느덧 습관이 되었다. 오른손에 든 물건의 무게와 상관없이 일정 시간이 지나면 반드시 왼손으로 옮기는 것이다.

그런데 아버지는 오른손 대신 왼손으로 살아야 할 미래를 예측이라도 한 것이었을까. 그토록 왼손을 배려하려고 애썼던 아버지는 오른손을 사용할 수 없게 되고 말았다. 아버지는 교통사고로 오른쪽 팔이 처참하게 망가졌다. 수술을 담당했던 의사가 유리 조각처럼 뼈가 산산조각이 났다고 했다. 수차례 수술을 해야 했고 결과가 좋지 않았다. 오른손 다섯 손가락이 마치 공을 잡는 듯한 모양으로 구부러진 채 마비되었다. 더 이상 직장 생활을 할 수가 없어 퇴직해야 했다. 그리고 6년쯤 되었을 때 어느 날 가슴이 아프다면서 병원에 검사를 받으러 갔던 분이 그길로 영원히 돌아오지 못했다. 폐암 진단을 받았다. 잠자기 전에도 담배를 피울 정도로 평생 담배를 벗 삼아 사신 분이라 수긍이 갔다. 그런데 그것보다도 아버지의 꼬장꼬장한 성격 탓이라는 생각이 더 짙었다. 아버지는 공직생활을 하면서 너무 올곧은 성격, 아무도 못 말리는 외골수 고집 때문에 스스로 괴로운 분이었다. 그래서 더욱 담배에 의존했는지도 모를 일이다. 아버지는 3개월을 선고받았고 정확하게 3개월 만에 돌아가셨다.

그리고 나는 아버지의 구부러진 손을 장례를 치르면서 처음으로 잡아볼 수 있었다. 입관 예배를 앞두고 염을 할 때 염사가 가족들 입회 여부를 물었다. 우리는 모두 입회하기를 원했다. 염사는 우리에게 울지 말아 달라고 당부하면서 염을 시작했다. 염사에 의해 향기로운 물, 향탕수에 목욕을 마치고 머리를 곱게 빗겨 가다듬은 아버지는 새 옷으로 갈아입기 시작했다. 생전에 중요한 자리에 가기 위해 정성껏 차려입듯이 새로운 세계로 가기 위해 여러 가지 옷을 겹겹이 차려입었다. 염사가 맑은 옥색 명주 속저고리와 속바지를 입히고, 겉저고리에 겉 바지를 입힌 다음 소매 끝에 한삼을 덧댄 두루마기를 입힐 때였다. 두루마기 소매 끝에 길게 한삼을 덧댄 것은 망자의 손을 가리기 위해서라는데 다섯 손가락이 모두 굽어 있는 아버지의 오른손이 한삼을 움켜쥐었다.

염사가 미처 손을 대기 전에 내가 먼저 아버지의 손에 걸린 한삼을 곱게 풀어드렸다. 그리고 손을 잡아보았다. 손이 마비된 이후 단 한 번도 잡아보지 못했던 손이었다. 아버지가 손을 감춘 탓이었다. 처음으로 잡아 본 아버지의 차가운 손, 석고처럼 굳어 있는 손은 한삼 대신 내 손을 꼭 잡으며 무언가를 말하고 싶어 하는 것만 같았다. 염사가 울지 말아 달라고 당부를 했음에도 크게 소리 내어 울고 말았다. 손이 마비된 후에 나에게 보내주신 첫 편지가 떠오른 탓이었다. 편지글 마지막에 “글씨가 아직 서툴다. 알아서 잘 읽어라. 왼손으로 연습하고 처음 쓴 것이다.”라고 붙인 추신대로 이제 막 한글을 배우는 어린아이 글씨처럼 비뚤비뚤한 글자 한 자 한 자마다 눈물이었다. 아버지는 그런 손으로도 꼭 육필 편지를 쓰려고 노력했고 편지는 어떤 명작보다도 귀했다.

손이 망가지고 난 다음 아버지는 손뿐만 아니라 자신을 송두리째 깊은 내면으로 숨겨버렸다. 대인관계도 기피했다. 꼬장꼬장하고 당당하기만 하던 아버지가 예전처럼 못마땅한 걸 봐도 벌컥 화를 내거나 큰소리를 치지 않았다. 대신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면서 기도했다. 가끔 두 손을 모으고 기도하는 모습을 발견할 때가 있었다. 두 손은 나란히 모아질 수가 없었다. 그래서 왼손으로 마비된 오른손을 감싸고 기도를 하는 것이었다. 그런 모습을 볼 때마다 왼손을 배려하려고 애썼던 아버지가 왼손의 위로를 받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신앙생활 다음으로 아버지가 낙을 삼는 일은 낚시였다. 낚시를 하러 자주 어디론가 떠났다. 아버지는 동해안을 주로 찾아다녔다. 그러다가 호미곶에 가게 되었고, 손 조형물을 발견한 것이다. 새천년(2000)을 맞아 모든 국민이 서로 상생하며 살자는 뜻에서 만든 오른 손과 왼손, 바다와 육지를 사이에 두고 서로 손잡기를 염원하고 있는 커다란 상생의 손이 반갑다고 했다. 맨 처음 다녀오신 날엔 무척 상기된 얼굴로 “누가 그런 생각을 했는지 우리나라에 그런 사람이 도시마다 몇 명씩만 있어도 벌써 선진국이 됐을 것이야.”라고 하시면서 탄복해 마지않았다. 아버지가 그토록 기뻐한 것은, 당시 정치적으로 좌와 우가 전혀 상생할 생각을 하지 않는 사회적 분위기 탓이었다. 그래서 호미곶을 다녀오실 때마다 마음이 통한 벗을 만난 것 같아 기쁘다면서 오랜만에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나는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에야 호미곶을 찾아가게 되었다. 그리고 처음으로 맞닥뜨린 손 앞에서 부동이 되고 말았다. 아버지가 그토록 반겼던 손이 정말 하나는 육지에서 하나는 바다에서 서로 손잡기를 염원하고 있었다. 다섯 손가락이 떠오른 해를 받치듯이, 또는 공을 쥐듯이 안으로 굽어 있는 손은 아버지의 오른손과 흡사했다. 마치 아버지의 구부러진 오른손을 본 따 조각해 놓은 것만 같았다. 그때부터 아버지가 그리우면, 아니 그보다도 일을 핑계로 아버지를 자주 찾아뵙지 못했던 지난날을 후회하며 자주 호미곶으로 달려가곤 한다.

오늘도 나는 그런 심정으로 호미곶 상생의 손 앞에 섰다. 아니 아버지의 손 앞에 서서 아버지의 말씀을 듣는다. “너의 오른손과 왼손은 과연 얼마나 상생을 하고 있느냐?”는 말씀이 또다시 가슴을 울린다.


박정선 프로필: 1951년 출생, 소설가, 문학평론가,

                대표작 장편 ‘백년동안의 침묵’ 외 다수. 비평 :‘타고르의 문학과 사상 그리고 혁명성’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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