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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허물 / 석민자

부흐고비 2021. 11. 24. 08:41

갑각류나 곤충들은 몸을 키우기 위해 허물을 벗고 인간은 성숙의 한 단계로 허물을 벗는다. 벗어 내는 허물의 부피만큼 몸이 커지는 것이 곤충이라면 측량마저 어려운 것이 인간의 허물이다.

보이지도 않는 것을 향해 내딛는 발걸음은 늘 멈칫거림을 앞세운다. 한 번의 탈피를 위해 놓아 버린 줄이 몇 수십 가닥일지 확신이 서지 않는 현실은 매번 스쳐 지난날에 대한 아쉬움을 앞세운다. 그 줄을 잡았다고 해서 마냥 생이 지상낙원 같기야 했을까만은 힘든 굽이를 돌아들 때면 어쩔 수 없이 놓아 버린 줄에 대한 아쉬움이 발목을 잡는다.

제대로 갖춰 놓고 사는 집이나 삶의 무게에 허덕거리는 집이나 걱정거리에서 놓여나지 못하기는 매일반일 것이다. 행복이라는 것이 마음먹기 나름이라는 말에 무게가 실려지는 대목이다.

얼마나 많은 탈피를 거듭하고서야 적나라한 나 자신을 볼 수가 있을는지.

뭐니 뭐니 해도 인간처럼 겹겹의 꺼풀을 뒤집어쓰고 사는 동물도 없을 일이다. 같은 틀 안에서 같은 교육을 받아도 허물의 두께가 같을 수 없듯이 같은 부모에게서 난 형제도 허물의 두께가 각각이기는 마찬가지다. 시련은 허물을 벗겨 주기도 하지만 덧씌워 주는 잣대도 지니고 있음이다.

그 살아온 궤적을 동그라미로 새기는 것이 나무다. 살점이 떨어져나가는 아픔을 승화시켜 요지부동의 뿌리를 내릴 줄 아는 슬기로움은 인간보다 윗길이다.

곤충들도 심지어는 뱀까지도 허물을 벗어 낼 때는 엄숙하다. 박제된 모습이듯 아름답다. 흔하게 볼 수 있는 것이 매미의 탈피다. 등이 갈라지면서 서서히 몸체가 드러나고 기껏 어둡고 눅눅한 땅속을 기어다니던 벌레에서 비상으로의 그 화려한 탈바꿈은 숨소리마저 조심스럽게 한다. 그보다 더 아름다운 탈피가 또 있을까.

인간에게서 가장 훌륭한 탈피라면 역사에 길이 남을 업적일까. 자기성취일까. 아니면 자기성찰일까.

사람들은 말한다. 누구의 간섭도 없이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가장 바람직한 삶이라고. 그러나 이는 신선마저도 부러워하는 것을 감히 인간이 구하려 들었다는 것부터가 신에 대한 도전으로나 비쳐질 일이다. 태어남부터가 틀에 매여 있음이던 것을.

짐승처럼 털이 나 있는 것도 아니고 피부가 딱딱한 것도 아니면서 태생적으로 허물이 두꺼운 동물이 사람이다. 천사 같은 얼굴로 짐승보다도 어문 행동을 예사로이 해치우는 동물이 인간이다. 만물의 영장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자행되는 만행의 끝은 어디쯤일까.

길이도 깊이도 가늠조차 할 수 없는 것이 인간의 허물이다. 만져지지도 않는 것이 질기기는 쇠심줄이다. 천 년이 흘러도 광채가 그대로인 탈피가 있는가 하면 태생부터 고약스러운 탈피도 있다.

남의 이목 따위 아랑곳없이 하고 싶은 말을 다 하는 사람은 모르긴 해도 속도 달리 생겼지 싶다. 태생적으로 허물이 잘 안 벗겨진다든가 본새가 남보다 두껍게 생겼다든가 뭐 그런 것이 있지 싶다.

거듭남은 허물을 찢어 내고서야 얻을 수 있는 열매다. 새로운 것이 힘에 부치기 시작하면서 땜질하는 방법도 터득하게 됐다. 급변하는 세상은 낯이 설었고 보는 것만으로도 머리가 어지러워졌을 때 내 허물벗기는 중단됐다. 이 나이에 무슨 영화를 보겠다고 새로이 허물을 벗으랴 했었다. 겁 없이 허물을 바꿔 치우는 일도 피가 떫고 비릴 때나 하는 짓이려니 했었다. 누덕누덕 기웠어도 궁둥이 디밀고 앉은 자리는 편했고 이제 더는 낯선 곳을 기웃거리는 일 따위는 없으리라 다짐까지 뒀었다.

‘예순에 학위를 취득하다’

신문 한 귀퉁이에 실린 이 한 줄의 메시지가 던지는 유혹은 강렬했다. 부딪쳐 보지도 않고 주저앉아 버리기에 글쓰기는 너무도 오랜 꿈이 아니었느냐고 내 안에서 소리를 질러댔다. 비록 뒤란으로 밀려나 존재마저 희미해졌어도 아픈 손가락인 것만은 분명하지 않으냐고. 그러니까 지금이라도 도전해 볼 만한 가치는 충분하지 않으냐고.

몸을 낮춘 도전은 나이와 상관없이 아름답다는 것을 예순을 넘기고서야 아프게 깨친다.

얼마만큼을 더 아프고서야 제대로 된 허물에서 벗어날 수가 있을는지.


석민자 :

2004년 '수필문예대학' 2기로 수필 공부에 입문,

같은 해에 『영남수필」 제2회 신인상을,

2005년에 제17회 신라문학상 수필부문 대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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